떨림은 말보다 정확하다

[04화]10분 일찍 도착하려던 나보다 먼저 와 있던 너

by 김선일

Chapter 04. 반팔 깃을 당기며 건넨 번호


형들과 함께 오늘 묵을 숙소를 잡고, 재정비를 마쳤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향수를 손목에 살짝 뿌렸다. 6시 약속. 10분은 일찍 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나섰다.


지도를 보며 초행길을 걸었다. 함덕의 골목은 생각보다 좁고 어두웠다. 핸드폰 화면 속 파란 점이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는 신호를 보냈다.


'거의 다 왔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서 있었다. 식당 앞에, 나보다 먼저 와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10분 일찍 오려던 내가, 그녀보다 늦었다는 사실에 묘한 설렘이 밀려왔다. 이 사람도 나처럼 이 만남을 기다렸던 걸까.


"늦었어요?"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황급히 내린 핸드폰 화면은 이미 까맣게 꺼져 있었다. 나를 기다리며 꽤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게 분명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붉은 조명이 우리를 감쌌다. 테이블 위에는 붉은 소면 파스타와 쫀득한 뇨끼가 놓여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맑은 동쪽 하늘을 버리고 흐린 이곳으로 달려온 나의 '투항'이, 결코 틀린 선택이 아니었음을 확인받는 순간이었다.


술잔이 몇 번 부딪히고,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오빠는 형제 있어요?"


"응, 형 하나 있어. 너는?"


"저는 여동생 있어요."


조명 탓일까, 아니면 취기 탓일까. 마주 앉은 그녀의 볼이 붉게 상기되어 보였다.


"취미는 뭐예요?"


"나? 책 읽는 거?"


"어? 저도요!"


그녀가 반가운 듯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근데 오빠는 무슨 장르 좋아해요?"


"나는 주로 비문학. 자기계발서나 에세이 같은 거. 너는?"


"저는 소설이요. 특히 감성 소설."


같은 취미지만, 우리가 걷는 길은 조금 달랐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서로 다른 세계를 가진 사람과의 대화는 새로웠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어느덧 접시는 비었고, 술잔도 바닥을 드러냈다.


"이제 나갈까요?"


나는 계산을 하고 그녀와 함께 식당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해가 완전히 지고, 함덕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빠."


그녀가 나를 불렀다.


"응?"


그녀가 내 반팔 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번호... 줄 수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수줍게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그녀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액정 위로 숫자를 누르는데, 손끝이 제멋대로 떨렸다.


'진정해라, 제발.'


겨우 번호를 입력하고 핸드폰을 돌려주려던 찰나, 나는 보았다. 핸드폰을 건네받는 그녀의 하얀 손끝 역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나만 떨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산책할래요?"


그녀가 먼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호를 교환했지만, 이 밤이 끝나는 게 아쉬웠다.


매거진의 이전글간절함은 우연보다 치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