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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민국 IMF 시절 배경

by 염상규

우리 아들이 얼마 전에 군입대를 해서 마음이 들떠있는 요즘 당시를 떠올리면 내가 군복무시절이었다.
요즘 군대는 급여로 월 75만 원을 적금으로 들어주고 제대할 때 750만 원이 모이는데 그 돈에 750만 원을 더 보태줘서 1500만 원 적금통장을 들고 전역한다고 한다. 내가 이등병 때 첫 월급이 5.000원 남짓이었으니 요즘은 입대하고 사병생활도 보람은 있을 듯하다.
물론 가장 혈기 왕성할 때 젊은 청춘들의 영혼을 갈아 넣으며 좋은 시절을 통제하니 무엇으로도 보상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여건이 나아져서 다행이란 말이다.
IMF 시작될 때 나는 병장 말년에 제대를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당시에는 말년에 휴가를 다녀오는 일정으로 군복무 계획이 정해져 있었다.
군대 선임이 말년 휴가를 복귀하는데 제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기쁜 마음에 들어오는 게 아닌 상당히 어둡고 표정이 안 좋다.
이유를 물어보니 밖(사회)은 지금 칼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어디를 가더라도 거리에 사람들이 안 다니고 지인들께 말년휴가 나왔다고 술 한잔 얻어 마시려 해도 만나주지를 않는단다.
그 선임은 연고가 대구에 살던 사람이라 지역경제가 어려운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드디어 내가 휴가를 갈 차례에 복장으로 온갖 각은 다잡고 멋지게 집으로 향했었다.
부모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지만 표정이 안 좋으신 건 웬일일까.
그날 밤에 어머니께서 술상을 봐주시어 어른들과 소주를 마시면서 군대 말뚝 박으라고(부사관지원 장기복무) 말씀을 하시길래 무슨 일인지 여쭈어 보니 지금 사회가 많이 안 좋으니 이 시기를 잠시 피했다 나오는 건 어떠냐고 제의를 받았다. 입대하고 매일 매달을 오늘만 기다려오며 복무해 왔는데 재입대를 해야 하는 심정이 오죽하랴.
일단 제대하고 열심히 적응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때부터 뉴스를 관심 있게 보고 신문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티브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경제 책임에 대해 무차별로 얻어맞으면서 제대로 된 답변 하나 못 하고 당시 대통령이 참 부끄럽다 생각도 많이 했고 국민들은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질타도 많이 했다.
대표적으로 쟁쟁하던 한보철강, 기아자동차(당시 현대가 인수해서 현재까지 경영중)등 1997년 그해 약 14.000개 이상의 기업이 위기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그때부터 대한민국 자살률이 치솟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의 모든 아빠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공원과 오락실(지금의 PC방과 비슷)을 배회하며 하루를 보내고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귀가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어려운 회사 상황에 퇴직당한 일은 아내에게 말은 못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벼룩신문(현재 알바몬, 알바천국과 비슷)을 볼펜으로 표기하며 일일이 DDD(공중전화박스)에 가서 면접날짜를 받고 취업하기 위해 이력서를 들고 뛰어다니며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
그럼 도대체가 IMF 외환 위기는 무엇인가?
과연 정치인들이 정치를 못해서 그런 것인가?
우리 대중들은 한 가지 꼭 알아야 할 게 있다.
국가에 어떤 쇼크가 오면 국민들이 동요하고 누군가를 물어뜯기 위해 대상을 찾게 된다. 그리고 명분이란 것을 만든다.
프랑스혁명을 들여다보자.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정치자금을 오로지 빚을 내어가며 국가를 운영했는데 점점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루이 15세 에게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루이 15세 역시 국가예산의 절반이상을 부채상환에 허덕이다 루이 16세로 국가운영이 넘어간다. 그때부터 왕실의 사치가 시작되며 많은 비리와 부도덕한 정치를 끌고 가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상황까지 이어진다. 돈을 받고 귀족을 늘리고 그 귀족은 국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징수하며 악습이 이어진다.
지금 부르주아라는 상인계층이 그때 돈을 주고 귀족이 된 경우다.
귀족들은 지역통치를 하며 지방마다 세습이나 법률이 달라 일정한 세금을 취할 수 없었던 왕실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청부업자를 고용하게 되고 그 업자들은 중간에 자신들도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국민들을 쥐어짜게 된다.
지금 같은 경우 국가지도자가 조금만 정치를 못해도 탄핵 이야기가 서슴없이 나오는데 당시에 저런 정치상황이면 국민들이 들고일어나도 백번을 더 일어날 상황이다.
프랑스의 라이벌 국가인 영국이 미국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이 독립전쟁을 하면서 미국을 돕기 위해 국가재정에서 독립지원금으로 지원한 것도 프랑스에게 많은 부담이 됐다.
지방마다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심지어는 지신들을 통치하던 귀족까지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나서 외치기 시작한다.
“빵을 달라!!!”
그러면서 지역의 영주들을 단두대로 끌어올려 목을 베고 농민봉기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된다.
이때 누군가 대중 앞에 나타나서 명분이라는 것을 만든다.
“여기 봐봐. 여러분들 짐승이야? 아니잖아.
배고파서 빵 얻어먹으려고 지금 뒤집어엎는 거야? 아니잖아.
나라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후손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우리는 멋진 유토피아를 만드는 거잖아.
내 말 맞아 틀려.
이제부터는 자유, 평등, 우애라는 슬로건을 걸고 썩어빠진 왕정을 무너트리고 멋진 프랑스를 다시 만들자.”
그러면서 새로운 정치인이 등장해서 기득권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매김한다.
IMF 외환위기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손가락질받고 모든 책임이 돌아갔다.
사실 당시에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가 경제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다.
면밀히 따지면 태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아시아 전체로 퍼지면서 동아시아 경제위기로 번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뼈 때리게 아팠던 이유는 국가에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었던 게 문제였다. 그래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처럼 유연하게 버티지 못한 것이다.
국가에 재정이 없어서 더 이상 외채를 갚지 못한 상황으로 이어지자 외국 투자자본이 일순간에 빠져나가고 국가부도사태에 이르게 된다.
기업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기업활동을 하는데 당시에는 기업들이 몸집을 불리고 확장시키는데 여력을 집중하던 시기라 계열사가 많아지고 고용률이 높아지며 한창 전성기를 맞이하다 불황이 오고 내수경제가 얼어붙자 기업활동이 위축되고 부채를 이기지 못하여 도산이 일어나고 같은 계열사와 동종업계, 그리고 협력업체, 하청업체 등 줄줄이 기업들이 쓰러져 나가면서 시작이 된다.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외국 부채에 많이 의지하고 기업들도 해외에서 돈을 빌려 공장을 짓고 기업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에서도 대기업 육성 위주의 정책도 한몫했다.
70년대부터 경제개발계획을 대기업들이 주도를 하면서 자연스레 이어진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기업경영도 대폭으로 개혁을 하게 된다.
당시 한국의 노동자들, 근로자들이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정리해고라는 제도가 생기고 노동시장이 탄력적으로 바뀌면서 사회적으로 오랜 기간 지속된다.
현재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단기 계약사원을 채용하고 고급 인력들을 고용하면서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반 기업사상을 가지고 국내회사들을 까자는 게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정부는 스타트업 기업 육성 및 벤처기업 육성에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4차 산업혁명 :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기업 중견기업이 몇 개 날아가니까 우리 경제가 휘청거렸음을 당시의 경험으로 알았을 것이다.
IMF(국제통화기금)로부터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돈을 빌려오면서 내부적으로 곪아있던 상처들을 다 도려내고 극복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살을 붙여가며 새로운 바디를 생성했다.
이를 통해 경제구조를 개선하고 강력한 국가경영정책의 기틀을 갖게 된다.
국가는 경제의 투명성을 갖추고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 위기에 닥치면 늘 민중들이 나라를 구했다.
금 모으기 운동 기억하는가?
전 국민들이 가정에 보유하고 있던 금을 자발적으로 은행에 들고 가 한국은행의 금 보유량을 늘려 그 금을 통해 국가신용도를 재조정하고, 그것에 이어 외환보유고를 높이는 계획으로 ‘KBS 금 모으기 캠페인’ 이 시작되었는데 IMF 국가부도를 극복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들이다.
금 모으기 캠페인 이전 한국은행 금 보유량은 약 10 여톤 정도였는데 4개월간 금 모으기 후 약 220톤의 금을 보유하게 되었다.
외환위기 시절 할머니의 금가락지와 젊은 부부의 아기 돌반지를 거두어들인 정성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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