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그 여름의 향기

내안에 사계(여름)

by 염상규

바닷바람이 스치던 여름의 오후가 있었다.
뺨을 간질이던 소금기 어린 바람, 풀숲에서 묻어 나오던 초록빛 내음, 그리고 장마비가 퍼붓고 난 뒤 진득하게 피어오르던 젖은 흙냄새.
그 모든 향들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면, 나는 어느새 젊은 시절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젊은 시절,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우산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고, 신발 속은 이미 물웅덩이가 되었지만, 그게 오히려 자유였다.
그날만큼은 세상의 어떤 무게도 어깨에 얹히지 않았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발밑에서 튀는 물방울의 경쾌함이, 그 자체로 음악이었다.
내 심장 박동과, 내 청춘의 리듬과, 내 웃음소리가 뒤섞인, 오직 그 여름만이 들려줄 수 있는 합주였다.
그리고 바다.
내 여름은 언제나 바다로 완성되었다.
해변 모래 위에서 느껴지는 햇볕의 뜨거움, 파도에 부서져 흩날리는 소금내음, 멀리서 풍겨오는 구운 생선 냄새와 막 잡아 올린 조개의 비릿함.
그 향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나를 청춘으로 데려다 주는 입구였다.
모래 위에 맨발로 서 있으면, 파도가 발목을 스쳐갈 때마다 마치 “넌 뭐든 할수 있어.”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지금 나는 바다와는 동떨어진 도시 한복판에 산다.
창밖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때의 장면들이 불쑥 찾아온다.
오늘도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는다.
머그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커피향이, 그 여름의 냄새와 섞인다.
비에 젖은 바다의 짠내, 장마 뒤 풀밭의 풀냄새, 그리고 지금의 커피향이 어우러져, 마음속 오래된 앨범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긴다.
그때의 나는 젊었고, 뜨거웠으며, 조금은 무모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떤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는 가득차 있었다.
여름의 냄새는 그런 나를 기억 속에 고이 보관해둔다.
그리고 오늘처럼 비가 오는날, 조용히 꺼내어 내 곁에 앉힌다.
마치 그 시절의 나와 마주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나누는 것처럼.
비록 지금은 마음에 은빛이 스미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여름의 바람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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