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선풍기 바람 속의 게으름

내안에 사계(여름)

by 염상규

여름의 오후, 선풍기 바람이 느릿하게 방안을 맴돈다.
회전하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선풍기의 동작에 맞춰, 나도 무심히 고개를 옮기며 바람을 따라간다.
에어컨처럼 즉각적인 시원함은 없지만, 선풍기 바람에는 묘하게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온기가 있다.
땀을 식혀주되,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지는 않는 부드러운 바람.
마치 “서두르지 않아도 돼.”라고 귓가에 속삭이듯.
창밖에는 매미가 쉼 없이 울어댄다.
그 울음은 분명 힘차고 요란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이 게으른 오후를 위한 배경음악처럼 느껴진다.
골목 안쪽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도, 가끔 들려오는 이웃집 반려견 짖는 소리도, 모두 이 오후의 느릿한 리듬 속에 스며든다.
테이블 위에는 아침에 내려놓은 아이스커피가 있다.
얼음은 이미 녹아 물과 섞였고, 맛도 연해졌지만 그조차도 오늘은 나쁘지 않다.
옆에는 몇 장 읽다 덮어둔 책이 놓여 있다.
글자를 따라 눈을 움직일 수도, 그냥 덮어둔 채 바라볼 수도 있다.
오늘은 그 모든게 자유다.
시계를 보니 오후 두시 반.
하루의 절반이 지나갔지만, 남은 절반이 이렇게나 넉넉하게 기다리고 있다.
할 일은 내일로 미뤄도 좋을 만큼 한가롭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마저 한낮의 날카로움이 아닌, 살짝 기울기 시작한 부드러운 빛이다.
이런 날엔, 게으름이야말로 가장 호사스러운 사치다.
선풍기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으면, 바람이 발끝에서 얼굴까지 천천히 훑어 올라온다.
눈을 감으면 시간도 함께 멈춘 듯하다.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면서도 마음은 한없이 가볍다.
‘오늘은 참 좋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여유는, 하루의 반이 이미 지나갔음에도 남은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아도 좋고, 그저 선풍기 바람 속에서 늘어뜨려도 된다.
여름 한낮의 이 평범한 휴일은, 어쩌면 앞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완벽했던 오후.
선풍기 바람은 여전히 느릿하게 나를 스치고, 나는 그 속에서 한없이 흐믓해진다.
이 오후는 어쩌면,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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