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ümpfe der Verzweiflung -번외판 2-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낙원이란 있을 수 없는 거야.”
— 미우라 켄타로, 『베르세르크』
1999년 초였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 학교라는 공간은 기이할 정도로 길게 늘어났다.
아이들은 그런 변화를 짐승처럼 포착해냈다. 말수가 줄어들고 그림자가 짙어진 애는 무리에서 가장 먼저 도태된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유희였다. 지나가며 가방을 툭 밀거나, 주인이 앉아 있는 책상을 발로 건드리는 정도. 그것은 폭력이라기보다 탐색에 가까웠다.
며칠이 지나자 탐색은 확신으로 변했다. 이유 없는 밀침이 일상이 되었고, 복도에서는 등 뒤로 발길질과 폭언이 날아와 꽂혔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학교는 견디는 곳이었고, 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방과 후의 유일한 도피처는 어머니의 가게였다. 부천역 근처, 화려한 백화점의 뒷모습이 가리고 있는 상가 구석의 작은 식당. 점심시간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면 그곳엔 미지근한 공기만 남았다.
문을 열면 찌든 기름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곧이어 눅진한 국물 냄새가 뒤를 쫓았다. 천장의 형광등은 낡은 변압기 소리를 내며 ‘지잉, 지잉’ 낮게 울었다. 그것은 마치 가게가 내뱉는 신음 같았다. 어머니는 주방 안에서 붉은 고무장갑을 낀 채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나는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가게 안은 지독하게 정적이었다. 숟가락이 멜라민 그릇에 닿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낡은 환풍기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듯 덜컹거리며 돌아가는 소리뿐이었다. 구석에 놓인 브라운관 TV에서는 연신 Y2K와 밀레니엄의 종말론을 떠들어댔다. 세상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들떠 있었지만, 적어도 그곳에서만큼은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백화점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펄럭이며 지나갔다. 가끔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백화점 안내 방송은 이 낡고 좁은 식당과는 다른 차원의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숟가락을 오래 내려놓지 않았다. 밥알을 씹는 행위만이 내가 안전하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해 12월, 세상이 새로운 천 년에 대한 기대와 광기로 들끓을 때, 나의 유일한 낙원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적자가 계속됐다고 했다. 마지막 날, 식당에는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주방의 수도꼭지에서는 더 이상 물소리가 나지 않았고, 정겨웠던 식탁들은 하나둘씩 알몸이 된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벽에 붙어 있던 메뉴판이 떼어지자, 그 자리에는 누런 벽지가 흉터처럼 남았다. 벽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음식들의 이름을 문신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백화점 지정 식당’이라 적힌 녹슨 간판이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나는 가게 앞에 서서 울었다.
슬퍼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정말 갈 곳이 없다는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간판이 떨어진 자리엔 텅 빈 어둠만 고여 있었다.
그날 이후, 불 꺼진 집에 홀로 들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어머니의 옷에선 이제 기름 냄새 대신 독한 화장품 냄새와 비릿한 술 냄새가 섞여 났다. 현관에는 낯선 남자의 구두가 놓이기 시작했다. 광택이 흐르는 검은 가죽 구두.
그 구두가 놓인 날이면 집 안의 공기는 수조 속에 갇힌 것처럼 눅눅하고 질식할 듯 답답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 순리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2000년 봄방학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세상은 바뀌었다고 축배를 들었지만, 교실의 공기는 여전히 1999년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나를 배제했고, 복도에 놓인 내 체육복을 발로 차 먼지를 묻히며 낄낄거렸다.
그날 오후, 교실 바닥은 왁스 칠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 가방을 발로 찼고, 가방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뒤에서 비릿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보았다.
먼지와 자잘한 모래알들이 흩어진 나무 바닥 틈새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다.
누군가의 신발 밑창에 매달려 온 이질적인 존재.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비명처럼 교실을 가로질렀다. 낡은 나무 바닥과 쇠붙이가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 안쪽을 긁어댔다.
누군가 발을 끌며 다가왔다.
질척거리는 신발 밑창 소리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서서히 끊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뇌 뒤쪽에서 서늘한 이물감 같은 생각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그 문장은 족쇄처럼 발등을 찍어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어지는 속삭임은 환청에 가까웠다.
맞서야 한다.
맞서야 한다.
맞서야 한다.
그것이 내 이성이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텅 빈 식당의 형광등 소리나 장례식장의 소음과 섞여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바닥에 닿은 돌멩이의 감촉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는 것.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교실의 시끄러운 소음들이 진공 상태에 빠진 듯 일순간 멀어졌다.
나는 돌멩이를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손안의 돌은 이제 내 살점의 일부가 된 것처럼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돌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서 있는 놈의 그림자가 보였다.
나는 그 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