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반면교사

by 김태광수


정희라 - 벛꽃구경 오이소



브런치라는 동네는 가끔 보면 무슨 ‘성공한 사람들의 박물관’ 같다. 다들 아침에 레몬 워터 마시고 명상한 다음, 세련되게 다듬어진 실패담을 꺼내 놓는다. 그들의 실패는 마치 명품 청바지의 디스트로이드 진처럼 계획된 빈티지 같다. 멋있고, 정갈하고, 극복해낸다.


​거기에 비하면 내 글은 그냥 구멍 난 양말이다. 꿰매지도 못하고 버리자니 발가락이 시린, 그런 구질구질한 현실.


​내 이력서는 솔직히 말해서 참 '정직'하다. 반전도 없고 고점도 없다. 남들은 ‘성장 서사’를 쓸 때 나는 ‘생존 기록’을 쓴다. 가끔 여기서 멀쩡한 문장을 쓰다가도, 거울을 보면 힘이 빠진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비속어와 삐딱한 생각이 록 스피릿처럼 날뛰고 있는데, 정작 화면엔 “삶의 통찰” 운운하는 가식적인 문장이 적혀 있을 때. 그럴 땐 내가 꼭 남의 옷 빌려 입은 어린애 같다.


​소설 초안? 그건 다시 읽으려면 청심환이 필요하다. 그때의 나는 내가 무슨 헤밍웨이라도 된 줄 알았다. 분노랑 열등감을 대충 버무려서 내던지면 그게 ‘날 것의 미학’인 줄 알았지. 지금 보니 그냥 '덜 익어서 배탈 나는 고기'였다. 현실에서 못한 욕설을 캐릭터 입에 처박아놓고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라고 외치던 과거의 나를 보면, 타임머신 타고 가서 등짝을 후려치고 싶다.


​세게 쓰면 깊어 보이는 줄 알았다. 비명을 지르면 예술인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냥 소음 공해다. 읽는 사람은 귀가 아프고, 쓴 놈은 목이 쉬어 있다. 문장 마디마디마다 “나 좀 봐줘, 나 진짜 힘들었어”라는 결핍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보는 내가 다 민망하다. 자의식 과잉이 낳은 괴물, 그게 딱 그때의 내 문장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전략을 좀 바꿔보려한다. 멋있는 척을 못 하겠으면, 차라리 '망하는 법'의 장인이 되기로.

​성공한 사람들은 어떻게 올라가는지 가르쳐주지만, 나는 어디로 떨어지면 뼈도 안 남는지 알려줄 수 있다. 감정이 폭주해서 문장이 꼬일 때, 자격지심을 솔직함으로 착각해서 글을 망칠 때, 내가 바로 그 ‘실패의 표본’으로 거기 서 있을 생각이다.


​내 글을 보고 누군가가 “아, 최소한 얘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혹은 “내 글이 이 정도 쓰레기는 아니네”라고 안도한다면, 나는 내 할 일을 다 한 거다. 누군가에게 자존감을 퍼주는 ‘인간 밑바닥 깔개’ 역할, 이거야 말로 가성비 좋은 재능 아닌가.


​성공담은 사람을 끌어올리지만, 나는 그 따위에 힘 낭비하기 싫다. 대신 나는 여기까지 내려오지 말라는 ‘낭떠러지 주의’ 표지판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번쩍이는 이정표는 못 돼도, 빨간색 경고등은 밤에 더 잘 보이는 법이니까.


​성공한 작가? 그런 건 다음 생에 노려보고, 이번 생엔 아주 디테일하고 구질구질하고 비루하고 유머러스한 '반면교사'로 남으련다. "저렇게는 쓰지 말자"는 다짐을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내 글의 유일한 순기능이다.


​자, 내 글을 보고 용기를 얻으시라. 당신의 오늘은 적어도 나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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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비상업적 에세이 작성 맥락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출처: 인터넷 밈(Meme)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