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비밀 -1-

-단편선 <Sümpfe der Verzweiflung> -5-

by 김태광수

그날은 불길하게 축축했다. 1999년이었는지, 아니면 그 근처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기억이란 원래 늘 어긋나기 마련이다. 날씨는 온통 회색빛이었고, 창틀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데도 물기가 배어 나왔다. 화창한 햇빛이 우중충한 구름 너머로 싸늘하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방과 후였다. 운동장 구석에서 밀치던 손바닥들, 내 이름을 조롱처럼 불러대던 웃음소리가 아직 귓속에 남아 있었다. 동창들의 괴롭힘에서 겨우 벗어나 혼자 집에 먼저 들어온 참이었다.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이 서늘한 침묵을 메우고 있었다.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잘못이었다. 열쇠를 걸지 않은 현관문이 툭 치듯 열리며 어떤 사내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같이 놀던 형들 또래쯤 되어 보였지만,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키는 크고 여위었으며, 피부는

잿빛처럼 칙칙했다. 눈은 기묘하게 커서 꼭 뒤집어진 생선 같았다. 젖은 신발에서 비린내가 배어들었다.


“엄마 계시냐?”


“안 계세요.”


남자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장식장 위 사진들과 싸구려 플라스틱 꽃병, 시들어 말라붙은 꽃다발, 더러운 방석과 벗어던진 양말들. 그는 탁자 위의 과도를 집어 들며 낮게 물었다.


“돈은 어디 있냐?”


“몰라요.”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소리 지르면 안 된다.”


나는 그가 나를 찌를 거라고 확신했다. 두려움에 휩싸여 눈물이 흘러넘쳤다. 목구멍 깊숙이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흐느낌만, 멈출 수 없는 눈물만 흘렀다. 그 침묵이 내 유일한 대답이었다.

남자는 그것이 이상했는지 몇 번이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마치 자기 손에 들린 칼을 뒤늦게 발견한 사람처럼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과도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젖은 신발이 현관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그가 골목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울었다. 그러나 소리는 끝내 내지 않았다. 오직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눈물을 훔친 뒤, 여느 때처럼 TV 앞으로 달려갔다. 만화 채널, 홈쇼핑, 뉴스 화면을 닥치는 대로 돌려대며 그 장면을 잊으려 애썼다. 화면 속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지만, 내 안의 공포는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왔을 때도 그 일을 말하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은 이미 너무 피곤해 보였다. 사실 내가 굳이 말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날 엄마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보석금을 마련해야 했지만, 집안의 돈이 사라져 결국 감옥에 갔다고. 그 얼굴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그저 무표정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언젠가 사라졌던 돈의 액수가 묘하게 누나가 자취 없이 사라뜨리던 돈과 닮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침묵은 우리 집의 언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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