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텔레마케터를 시작했습니다.
상담원(상담사) 혹은 TM이라고도 불리는 텔레마케터(telemarketer)라는 직업을, 나는 꽤 오래전부터 접해 왔다. 국내 최초의 홈쇼핑인 G홈쇼핑이 L홈쇼핑이라고 불릴 때부터였으니, 과장을 좀 보태자면 이쪽 업계의 시조새나 화석인 셈이다. 시조새나 화석쯤 되니까 '콜탑(콜센터에서의 실적 상위를 지칭)'이 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당연하게도, 먼저 시작했다고 혹은 그저 오래 묵혀두기만 했다고 무조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나는 S그룹 시절 선배들이 '열심히만 해서는 안 돼. 잘해야 해'라고 여러 번 충고하고 타이를 정도로 일머리 제로에 고지식한 타입이었다. 이런 타입의 경우, 웬만해서는 콜탑이 될 수 없다. 혹시라도, 어쩌다 한 번 콜탑을 했다고 하면, 아마 그 사람은 몸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콜 센터에서의 상위 실적이라고 한다면 우선은 콜을 많이 받아야 하는데 일머리 제로 타입이 콜이 많다는 것은, 식사를 거르고, 화장실도 안 가며, OT(Over time)를 출퇴근 전후로 한 달 내내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일머리 있는 사람도 실적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주변에 동일한 사례가 많았고 나 역시 L홈쇼핑에서 겪었던 상황이다.
내가 처음 텔레마케터, 즉 상담원 일을 시작한 것은 L홈쇼핑에서였다. 일반적으로 텔레마케터라고 하면 전화로 상품을 판매하는 아웃바운드(OB) 상담원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일반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인바운드(IB) 상담원까지도 텔레마케터라고 지칭한다. 여기에서 인바운드란 고객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아서 다양한 상담업무를 하는 것이고, 아웃바운드는 상담원이 고객에게 전화해서 세일즈나 해피콜 등의 업무를 진행하는 것을 뜻한다.
L홈쇼핑 시절의 나는 인바운드 일반 상담원으로 시작해서 아웃바운드 전문 상담과 인터넷 상담까지 다양한 업무를 두루 거쳤다. 일반 상담팀일 때는 상품 주문과 배송 조회, 상품 사양 및 구성 설명을 주로 안내했는데, 처음 일반 상담팀에서 인바운드 상담을 했을 때의 내 콜수는 전체 평균보다 낮았다. 일머리 없고 고지식하니 당연했다. 몇 주간 상품 및 CS 교육을 받고, 그것을 실습하였으며, 선배와 동석해서 실전을 배웠다. 당시 L홈쇼핑에는 인큐팀이 있었는데, 신입 상담원이 팀 배정받기 전에 임시로 머무는 팀이었다. 인큐팀에서는 단순 문의 위주로 콜을 받았으며, 콜수에 대한 실적 압박이 심하지 않았다. 일단 콜이 밀려들면 손을 보태는 정도만 해도 무난했다. 그럭저럭 응대해도 오안내만 하지 않으면 성공한 셈이었다.
인큐팀을 벗어나 자신의 팀이 배정되면 이때부터는 실적 압박이 들어왔다. 이때 나는 야간에 학교도 다녀야 했기에 실적보다는 학교 과제가 우선이었다. 콜센터를 지원한 계기도 근무시간 내에만 업무를 하고 칼 퇴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강제 OT가 한 달 동안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못다 한 업무를 집에 들고 가서 밤새워서 해 왔던 S그룹 시절보다는 버틸만한 강도였다. 선배 언니들도 어린애가 제 손으로 학비 벌어 야간대를 다닌다고 하니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곤 했다. 특히, 입사한 지 겨우 6개월 된 새내기에게 인큐팀 부슈바를 맡긴 것은 파격적인 호의였다. 신입을 담당하기에 일이 어렵지 않았고 슈바의 배려로 칼퇴근도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로, 부슈바는 슈바 혹은 슈퍼바이저(supervisor)라고도 불리는 중간 관리자의 보조 역할을 했다.
학습효과를 높이는 좋은 방법으로는 반복학습과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꼽는다. 인큐팀에서 부슈바로 있으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병행하다 보니 상담 업무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 당시에는 부슈바도 콜을 받았고 동시에 신입들의 업무도 보조해야 했다. 동일 문의를 여러 번 반복해서 받다 보니 어떻게 안내해야 보다 효과적이고 정확히 안내할 수 있을까 연구하고 실습할 수 있었다. 또, 내가 효과 본 방법을 다른 신입들에게 전파하고 그 결과를 수집하면서 나만의 데이터를 모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정리한 나만의 데이터는 다시 고객 응대 시 활용되고는 했다.
야간대를 졸업할 무렵, 인큐팀에서 컴퓨터 CS팀으로 이동했다. L홈쇼핑에서는 일반 상담팀과 CS팀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일반 상담팀에서 대응하기 어려운 건이 CS팀으로 넘어왔다. 아웃바운드 콜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주로 장기 배송 지연이나 예약 주문 현황 안내, AS 접수 및 진행 등의 업무였다. 그중엔 택배 도난이나 배송 오류인지 알았는데 사기와 엮어 들어갔다거나 금융 사고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었다. 한 번에 해결하기 어려운 건이 대부분이다 보니 콜 실적에 대한 압박은 덜했지만, 콜이 밀릴 때는 모든 업무를 뒤로하고 인입되는 콜을 받아야 했다. 일반 상담에 대한 감각은 그대로인데 CS 업무 스킬은 높아져 가니 일은 힘들어도 성취감이 넘쳤다. 다 같이 힘든 일을 하다 보니 팀워크도 좋았고, 함께 의논하고 해결하는 게 몸에 배어 ‘집단지성’의 힘을 마음껏 체감했다.
일반 상담에 비해 CS 상담은 case by case여서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일화도 많았다. 1년 넘게 사용한 노트북을 AS가 늦다는 이유로 신제품으로 바꿔 달라고 하거나, 아들이 구매한 상품이 사기에 엮였다고 신고하거나, 맞교환하기로 한 고가의 상품을 교환 않고 둘 모두 가지고 잠수를 타는 등등. 이런 사례들 덕분에 제품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했고, 배송 시스템도 꿰고 있어야 했으며, 협력업체와의 기싸움에 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고가의 상품을 다루다 보니 사기나 금융 사고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그에 대한 지식도 쌓게 되었고, 주문 패턴을 보다 보면 이게 해당 케이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었다.
야근이 잦았던 CS팀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인터넷 게시판 팀이었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이메일 문의 시 답변 글을 작성해서 상담하는 팀이었는데, 콜이 밀릴 때 잠깐 지원하는 것 외엔 콜 업무가 거의 없었다. 필요한 스킬로는 뛰어난 글 실력보다 오해의 소지가 없게 글을 잘 다듬을 수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니까. 전화 한 통이면 끝나는 업무를 글로 풀어내는 것을 어떻게 잘해야 할까 가 관건이었다. 글을 남긴다는 것은 고객 민원 시 증거자료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더해 답변을 작성했다. 일반상담과 CS 상담 구분 없이 문의가 들어왔으므로 타 팀에 협조를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협조를 요청한다고 답변을 멈추면 안 되었기에 먼저 답변 가능한 것을 우선 처리했다. 그러니까 정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정해서 빠르게 처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인터넷 게시판 팀은 이제까지 해 온 일들의 종합판 같은 것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 같은 거랄까?
인터넷 게시판 팀을 뒤로하고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되기 전까지 야간 팀에서 일했다. 그런데 일반 상담을 하는 야간 팀에서는 입사 초와 달리 일이 비교적 수월했다. 콜탑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언저리까지는 갈 수 있었다. 콜수가 주간보다 적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동안 해 왔던 일들을 참고해서 일반 상담을 하는 것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근무 인원이 많지 않은 야간 팀은 단순 상담 외의 상담이 어려웠다. 그래서 야간 팀은 일당백을 해야 하는데 일머리 없던 이전의 나라면 좀 어려울 수도 있었다. 다행히 이때는 여러 팀을 돌아본 후라 다양한 경험치가 있었고, 마치 원래부터 일머리 있었던 것처럼 수월하게 업무 수행이 가능했다. 이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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