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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연 Aug 17. 2023

취업의 달인은 아니고요,
열심히 살았습니다. ②

feat. 첫 취업 성공기

앞글에서 취업 성공기가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서류전형과 면접을 지나왔다고 해서 취업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류 전형과 면접은 통과했으나, 아직 입사예정자들의 연수가 남아 있었다. 당시에는 입사예정자란 말을 사용하지 않아서 나는 이것이 대학교 새내기 OT 쯤 되는 것으로 여겼다. 얼핏 보기에는 별다를 것 같지 않지만, 소속이 확정된 대학교 새내기와 달리 입사예정자는 회사 사정으로 취업 취소가 될 수도 있는 신분이고, 아직 정해진 소속이란 게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 나의 소중한 고3 여름방학의 일부를 희생해야 하는 연수는 선택의 여지없이 필수 참석이었다. 연수는 전주에 위치한 사내 연수원에서 며칠간 합숙으로 이뤄졌다. 연수원에서의 일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몇 가지만은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첫 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비빔밥으로 유명한 전주지만, 기차역 앞 식당에서 먹은 비빔밥은 돈 아깝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맛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그 후 다시 찾아 간 전주역 앞에는 그 식당이 안 보였다. ) 또, 연수원까지 차편이 없어서 난생처음 나 홀로 어렵게 택시를 타 보았다. 얼마나 심장이 쿵쾅대며 뛰던지! 잊을 수 없는 나름의 홀로서기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기억나는 것은, 연수원 내의 선배님들이 자주 하는 엄포였는데, 연수원 내에서 ○○을 못하거나 혹은 하게 되면 짐 싸들고 바로 퇴소 조치한다,라는 내용이었다. 굉장히 상식적인 부분에 대한 것이라서 엄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빈말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주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빈말이 전혀 아니었다. 연수원 생활에 적응 못하면 조직 사회에서 적응 못하는 셈이 되니 예비 교육의 목적도 있지만 부적응자 솎아내기도 연수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으리라. 


Pixabay, PublicDomainPictures 님의 이미지


마지막으로는 금융그룹 내의 4개 회사 중, 희망하는 곳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생명보험사, 화재보험사, 카드사, 증권사 중에서 당시에 가장 잘 나가던 곳은 생명보험사였다. S그룹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그곳! 많은 동기들이 생명보험사를 지원했는데, 선배님들은 비인기 회사인 카드사나 증권사로 지원자를 분사시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꼬여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작업인데도 나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었기에 웃기기도 하고 진지해지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연수원에 머무는 동안 전쟁이 일어났다며 상황극을 연출했던 것 같은데, 순진했던 난 그 순간 상당한 두려움을 느꼈다. 


여러 가지 일은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전주 연수원에서의 연수 기간은 내게 좋은 느낌으로 남아있다. 300 대 1의 경쟁을 지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거라던 주입식 엘리트 교육이 기분 좋게 들렸고, 처음 해 보는 미션 수행도 마냥 즐겁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나 홀로 긴 기차 여행을 해 보아선지 나름 다 컸다고 자부도 했고, 고비 하나를 넘겨서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게 연수 기간이 끝나고 뒤이어 여름 방학도 끝났다. 2학기 말에나 출근하기로 되어 있기에 대학 준비를 하지 않는 나에게는 몇 달간의 여유가 생겼다. 학생으로서의 본업을 교지 편집부 기자로 알고 있는 나답게, 남은 고교 시절은 교지 만들기에 올인하기로 했다. 


Pixabay, David Schwarzenberg 님의 이미지


내 모교는 독특하게도 교지가 격년으로 드문드문 발간되다가 내가 3학년이 될 때 매년 발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2년 연속 교지 편집부 기자 출신으로는 나와 내 1년 후배가 유일했기에 내가 자동으로 교지 편집부 부장이 되었다. 2학년 때 교지 편집부 고문 선생님은 무엇인가를 실행하는 힘이 월등히 좋은 분이었다. 나름 선생님들 사이에서 서열도 좀 되시는지, 교지 만들기에 좋은 환경을 잘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학년이 바뀌고 다른 선생님으로 고문이 바뀌자 이름만 남은 교지 편집부는 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2학년 때 고문 선생님을 그리워했고, 그분을 만난 것을 내 생애 최고의 행운 중 하나로 여겼다. 


S그룹 연수를 다녀온 여름방학 이후 나는 그리운 고문 선생님을 따라 자신감 있게 해야 할 일을 실행했다. 주입식 교육의 영향으로 스스로 선택받은 엘리트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누가 뭐라 해도, 교내에서 교지 편집을 해 본 사람은 나와 내 후배 밖에 없었다. 후배는 의상과 쪽 학생으로, 교지 편집에 흥미는 있었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나는 2학기 내내 여유가 있었기에 취재에 적극적이었고, 교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사를 쓰고 편집했다. 심지어 펑크 난 기사를 1시간 동안 작성해서 만회했다가 날려 먹고는 30분 만에 재작성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뭐든 하고자 마음먹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불쑥 자라났다.


교지도 만들고 동네에서 소소하게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2학기도 열심히 잘 보냈다. 겨울 방학 즈음, 다시 회사에서 나와 동기들을 소환했다. 이번에는 2주 동안 출퇴근을 하면서 전산만 주야장천 교육받았다. 학교에서는 본 적도 없는 엑셀 프로그램을 이때 처음 만져봤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전산 교육을 하고 매번 시험을 봤는데, 여기서도 일정 점수 이하로 내려가면 바로 퇴출이란 엄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몇몇 동기들은 전산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아직 스무 살도 채 되기 전이니 숙소에서 홀로 있어야 하는 게 더 무서울 수도 있었지만. 


2주 동안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주입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학교에서는 겨우 C언어 일부를 특별활동 시간에나 잠깐씩 다뤄봤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중요 과목은 아니었으며, 내가 아는 가장 유용한 전산은 워드프로세서가 전부였다. 그런데 엑셀이니, 훈민정음이니, MS워드니, 하는 이상한 프로그램을 단 시간 내에 완벽하게 익혀야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힘든 상황을 함께 보내다 보니 그때는 경쟁자라기보다는 그냥 같은 전투에 나가는 전우 같은 심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했다. 


Pixabay, Augusto Ordóñez 님의 이미지


다행히도 동기애 덕분에 가까스로 전산 시험에 통과하고, 대충 때려 찍은 사내 토익도 통과했다. 그렇게 해를 넘겨서, 첫 출근을 하고 드디어 300여 명의 동기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입사식이란 것을 했다. 그 유명한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의 주인공인 회장님의 입사 축하도 받았다. 내 옆자리의 동기가 회장님의 외모로 별명을 지어서 웃은 것은 우리만의 비밀. 다사다난했던 첫 취업 성공기는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열심히만 잘 살면 취업도 이뤄진다는 강한 확신을 남기고.


(그러나, 열심히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


#지난한취업과정

#첫취업성공기

#열심히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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