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영어 느는 방법
내게는 자랑스럽게 일군 몇 가지 “성공한 꿈”이 있다. 그중 하나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되어 본 것이었다. 워킹홀리데이 메이커가 된다는 것은 내게 아주 간절했던 소원 중 하나였는데, 준비 기간만 3년 정도 소요되었다. 그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TOP3 중 한 시절이었다. 물론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로 살았던 1년여 시간도 치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주 브리즈번(Brisbane)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한 명은 여행사에서 설명회도 같이 듣고 비행기 표 예매까지 함께했지만, 다른 한 명은 비행기 탑승 직전에 만난 사이였다. 두 친구 모두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이었고, 호주 정착 초기에 서로에게 많은 의지가 되어 주었다.
첫날엔 이민성에 들려서 비자 라벨을 받고, 텍스 넘버(Tex nember)를 신청하였으며,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계좌 개설을 위해 난생처음으로 외국 은행에 갔던 나와 친구들은 언어의 장벽이 높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내 두 명의 친구 모두 영어 실력이 꽤 좋은 편이었다. 한 명은 출국 직전까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토익 점수 상위권을 지켰었고, 다른 한 명은 동남아시아 쪽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래서 어학원 등록과 계좌 개설 모두 친구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은행에서 내가 친구들을 영어로 도운 일이 있었다. 계좌 개설하는 데 에너지를 모두 쏟은 친구들은 피로해서 이미 영어는 물론 한국어도 제대로 안 들리는 상태였다. 사실, 계좌 개설은 한국 내 은행에서도 제대로 알아듣고 서명하기 힘든 어려운 계약이 아니던가! 친절한 은행 직원은 그것을 최대한 쉬운 영어로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지만, 낯선 땅에 떨어진 지 불과 며칠 안 된 여행 초보자들에겐 엄청난 난관이었다. 여행자수표를 입금하려는 우리에게 은행 직원이 바로 출금은 어렵고 다음 주 언제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발음이 매우 독톡했다. 지금이야 익숙하니까 금방 알아듣지만, 맥락 없이 튀어나온 “먼-다이”라는 말에 내 두 친구는 멘붕이 왔었다. 그렇지만 나는 영어를 제대로 발음도 못 하는 “Beginner”였기에 오히려 그것을 “Monday”라고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제야 친구들은 “호주식” 영어 발음이 존재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실하게 깨달아야 했다. 지금부터는 호주식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은행 계좌의 돈도 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멘탈이 탈탈 털리고 돌아온 첫 숙소는 브리즈번 시내 쪽 백패커스(backpackers)였는데, 남녀 공용으로 방을 사용했다. 처음 보는 외국 남자와 같은 방을 썼는데, 호기심 많고 친절했다. 내 친구들의 성별이 남자였기 때문인지, 그 남자는 우리 쪽으로 과하게 다가오지 않고 적정선을 잘 지켰다. 하지만 호주 여행 초보였던 우리 셋은 긴장과 불안으로 잠을 푹 잘 수는 없었다. 이틀 뒤, 나는 전날 운 좋게 한인 마트 앞 게시판에 붙은 쪽지를 보고 셰어 하우스(Share house)로 들어갔고, 내 뒤를 이어 친구들도 각각의 셰어 하우스 혹은 홈스테이(home stay)를 찾았다.
우리 셋이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던 어학원은 태국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주변 어학원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다. 사실 처음 찾은 어학원이 너무 비싸서 옮겨온 곳이기도 했다. 두 친구는 레벨 테스트 후에 상급 클래스로 향했지만, 나는 당연히 “Beginner class”로 향했다. 든든했던 한국인 친구들과 헤어져서 낯선 외국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향할 때는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아니 두려움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가져갔다. 다행히도 내 운은 계속 좋게 작용했는지, 유쾌한 영국인 선생님과 친절한 태국인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인 친구도 생길 뻔했으나, 뭐 때문인지 사이가 멀어졌다. 결국 내게 남은 건 친절하고 명랑한 태국인 친구들과 일취월장한 영어 실력이었다.
내 영어 실력은 불과 5주 만에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5주 뒤 레벨 테스트에서도 증명되었다. 저렴하다고는 해도 한국에서의 한 달 학원비를 한 주에 내야 하는 어학원을 5주나 다녔다. 돈 때문이라도 매 순간순간 이 악물고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어학원의 커리큘럼은 재미있었고 진도를 따라가기도 수월했다. 수업 외에 소풍이나 BBQ 행사에도 참여했는데 그때는 좀 더 편안하게 영어를 쓸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태국인과 일본인 친구들은 같은 아시아권에서 왔다는 동질감에 자주 대화를 나눴다. 이때부터 나는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다. 어차피 다 함께 못 하는 영어였고, 누군가 영어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말을 더 잘 알아들을 것이니 오히려 좋았다.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 준다는 모임도 여럿 나갔지만 나와 맞지 않거나, 예상외 비용이 나가는 일도 있었다. 시간과 돈이 넉넉지 않았기에 밖에서는 어학원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집에서는 내 일본인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는 호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서 일본어보다는 영어를 잘했다. 또한, 한국어도 약간 했는데, 그녀의 남자친구와 이전 룸메이트가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영어에 자신 없었던 나는 호주행에 <Grammar in Use>를 두 권 들고 갔었다. 그중 한 권을 매일 3~4개의 유닛(unit) 정도 공부해서 30일 만에 마쳤는데, 일본인 룸메이트가 내 진도를 확인하고 복습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영어가 늘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셰어 하우스에서는 조금 멀지만, 매주 브리즈번 주립 도서관에서 영문 책과 오디오북을 빌려왔다. 도서관 직원분의 도움으로 이때 처음 오디오북을 알았는데, 카세트테이프에 해당 책 내용이 실감 나게 녹음되어 있었다. 얼마나 실감 나는가 하면, 그중엔 내가 듣다가 무서워서 꺼버린 오디오북도 있었다. 그렇게 오디오북을 듣고, 같은 내용의 책을 보면서 단어와 문장을 익혔다. 내게는 약간의 활자 중독이 있었기에 뜻을 몰라도 매일매일 무조건 읽고 보았다. 오디오북을 기억하면서 대충 이런 내용이겠거니 짐작하면 대체로 그게 맞았다.
이 밖에도, 시티(city, 시내 중심을 이렇게 불렀다)에 갈 때면 무간지나 광고지들을 걷어 와서 하나하나 읽거나, TV에서 반복되는 시간대별 뉴스나 지역 광고를 유심히 보았다. 아무래도 반복하게 되면 몇 개는 외우게 되기 때문에 지역 광고 중 하나는 따라하기까지 했다. 물론, 뜻은 잘 모르고 발음도 그게 맞는지 확실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영어에 많이 노출되니까, 영어로 말하는 꿈을 꾸거나, 영어로 생각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영어만 배우지 않았다. 내게는 일본인 룸메이트와 학원 친구가 있다 보니, 약간의 단어나 감탄사는 일본어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친절한 태국인 친구들을 이해해 보고자 그들의 알파벳을 배워 보기도 했다. 글자도, 발음도 어려워서 알파벳 이후로는 바로 포기해 버렸지만, 태국인들의 영어 발음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들리는 언어가 태국어, 일본어, 영어다 보니까, 가끔은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며칠인가, 몇 주는 한국어를 까먹어가면서 감탄사는 일본어, 일상생활은 어린아이 수준의 영어로 뇌가 혼란한 상황을 맞았다. 그 와중에도 친구들이 늘어가는 내 영어 실력을 칭찬해 주는 게 기분 좋았다. 또한, 클래스의 친절하고 유쾌한 영국인 선생님은 내게 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노력한 만큼 영어 실력이 느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한창 붙었다. 좋은 사람들 덕분에 혼란한 상황 중에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니 영어가 나의 메인 언어가 되는 날이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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