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일자리 찾는 방법
흔한 말로, 나는 일복이 많다. 어느 회사나 단체에 소속되어도 주어진 일 외에-심지어는 그것이 전혀 다른 포지션의 일인데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별도로 보수를 챙겨주는 경우는 거의 없이 열정페이만 받은 적도 많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쓸데없는 일복이다 싶지만, 일복 많은 게 좋은 점도 있다. 나는 일복이 많기에 엄마 간호할 때를 제외하면 석 달 이상 백수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워킹홀리데이 메이커 때도 적용되었다.
낯선 땅에 적응하기 바빴던 5주간의 어학원 기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기로 했다. 나보다 먼저 호주에 정착했던 친구들의 조언대로, 인터넷 게시판과 한인 마트 앞이나 도서관 등에 설치된 실물 게시판을 이용했다. 어떤 친구는 가게 앞에 붙여 놓은 구인 광고를 보고 무작정 밀고 들어가서 이력서를 내밀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또한, 언어도 걸렸는데, 아무리 영어 실력이 늘었다고 해도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한 정도였다. 결국 언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만 찾아야 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친구의 도움으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밀었고, 처음 몇 군데에서는 면접 보라는 이야기가 없었다. 어떤 날은 나의 모자란 용기에 좌절하면서 맥주만 마셨고, 어떤 날은 다시 용기를 끌어모아 이력서를 내러 다녔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다행히, 태국 식당과 한국 식당에서 면접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식당은 셰어 하우스에서 기차와 버스를 이용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골드 코스트(Gold Coast)에 있었다. 마침 며칠 전에 이사하겠다고 선언한 룸메이트가 그녀의 엄마를 보러 갈 겸 나와 함께 기차를 탔다. 룸메이트의 응원을 받으며 한인 마트 한 군데와 한국 식당 두 군데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았다. 그 후에는 룸메이트와 기분 좋게 골드 코스트 해변을 돌아다녔는데, 서퍼스 파라다이스(Surfers Paradise)라고 불리는 호주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였다.
기분 좋았던 골드 코스트를 다녀온 다음 날, 시티 내에 있는 태국 식당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일단 시티 내에 있는 식당이니 지난 5주 동안 익숙한 곳이었고, 셰어 하우스에서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주 2일 일하는 것인데다 일당이 턱없이 적었다. 이렇게 된 거, 정들었던 룸메이트도 떠난다고 하니 이 기회에 나도 브리즈번을 떠나기로 했다.
호주 내에서 내가 아는 대부분의 식당은 수습 기간인 며칠 동안은 무보수로 일해야 했다. 이것을 악용해서 워킹홀리데이 메이커나 유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가게도 종종 있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는 그런 경우가 없었다. 3일 동안 한국 식당에서 무보수로 일하면서 브리즈번과 골드 코스트를 오갔다. 룸메이트도 떠났고, 자정이 훌쩍 지나서 귀가하자니 피곤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 식당에서 멀지 않는 식당 겸 숙박업을 하는 곳으로 당장 이사를 했다. 맨 앞쪽은 식당, 그 뒤에는 모텔, 맨 뒤쪽은 셰어 하우스처럼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나는 맨 뒤쪽 부분에서 일본인 친구들과 룸메이트로 생활했다. 한국 식당에 취업한 지 5일 만에 한 이사치고 너무도 잘한 선택이었다.
셰어 하우스처럼 운영하는 곳을 유닛(unit)이라고 불렀는데, 유닛 안에는 세 명이 머물 수 있는 침실이 두 개 있었고, 화장실 겸 욕실과 주방이 딸린 거실은 공용공간이었다. 나와 다른 방을 사용하던 한국인 남자는 우리 숙소 앞쪽에 있는 모텔 방을 청소했는데, 내가 이사한 지 3주도 안 돼서 그 일을 나에게 물려주었다. 같은 한국인끼리라서 일자리를 물려 준 거라 할 수도 있지만, 휴식 시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 둔 덕분이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두루두루 친해지고 볼 일이다. 이렇게 나는 투잡이라는 말을 모를 때에 생애 처음 투잡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했는데, 호주에서는 낮에 모텔 청소를 하고 밤에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쉬는 날은 각각 달랐다. 식당에서는 토요일과 평일 하루를 쉬게 해 주었지만, 때에 따라서는 휴일에도 지원을 나가야 했다. 모텔은 숙박한 손님이 많은지 적은지, 혹은 숙박을 연장했는지에 따라 일의 양이 달라졌다. 두 일을 모두 쉬는 날에는 열심히 놀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휴일이 되면 잡일과 휴식으로 하루가 순삭 해 버렸다. 물론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어디 안 가서 들고 나는 셰어 메이트들과 즐거운 시간도 가지고 여행 준비도 틈틈이 했다.
투잡을 해도 생활하는 패턴이 한국과 거의 비슷했다. 일이 끝난 후 친구들과 한잔하고 가끔은 다른 장소로 놀러도 가거나 쇼핑으로 기분 전환하는 등등. 단기간에 여행 경비를 모으기도 빠듯한 돈이 생활비란 명목으로 많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날 즈음, 친구 중 하나가 농장 일을 권해 왔다. 일은 고되어도 보수는 많고, 시골이라 돈 쓸 일이 없을 거란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또한, 같은 유닛의 친구들이 떠나고 있는 시기와 맞물려서 나도 변화가 필요할 때였다.
호주에 오래 머문 한국인 유학생의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브리즈번 시티 내에 있는 한 유학원에서 안전한 농장 일을 알선한다고 했다. 농장 일도 잘못 고르면 일은 고되고 보수도 적은 데다가 겪지 않아도 될 나쁜 일들이 있을 수 있다 하므로 신중해야 했다. 이번에도 일본인 친구와 동반해서 농장 일을 알아보고, 시티에서 다른 친구들도 만나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돌아왔다. 투잡을 정리하는 건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언제 다시 볼지 모를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좋은 추억을 함께하기에는 적당히 아쉬운 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한 내 첫 번째 농장 일은, 딸기 생산지로 유명한 카불처(Caboolture)에서 딸기 패킹(packing)을 하는 것이었다. 면접을 볼 때 대체로 노약자라고 생각하면 지붕이 있는 창고 겸 공장 같은 공간에서 패킹을 시키고, 힘이 좋아 보이면 피킹(picking)을 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함께 홈스테이하는 일본인 언니, 농장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 인도네시아인 아줌마, 홍콩인 아저씨와 주로 같이 일하고 점심시간을 함께 했다.
한 번은 주급이 내가 계산한 것과 다르게 나와서 책임자로 보이는 호주인에게 가서 말했다. 그런데 그녀와 나의 계산 방법이 달랐다. 심지어 내가 말은 트여도 아직은 잘 못 알아듣는지라 의사소통이 잘 안 되었다. 여기서 놀랍게도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내가 말한 차액을 정산해 주었다. 내가 제대로 정산받았는지 친구들과 다시 계산해 보았는데, 애초에 내가 잘못 계산한 게 맞았다. 나는 너무 부끄러웠지만, 책임자에게 다시 찾아가서 사과하고 추가 정산분을 돌려주었다. 이번에는 호주인 책임자가 놀랐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계산이 잘못되었다고 이미 정산한 돈을 돌려준 사례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호의를 내보였다. 의사소통이 안 되면 진심을 전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 사례를 호주에서 만난 몇몇 한국인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들은 진짜 정산을 잘못 받아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도 있고, 책임자 혹은 감독관에게 불이익을 받을까 봐서였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일하던 딸기 농장의 책임자는 진짜 착한 사람이었다.
카불처에서 농장 일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받았기에, 애들레이드(Adelaide)에서도 농장 일을 찾았다. 애들레이드에서는 브리즈번처럼 네이버 카페 사람들을 찾기 어려웠고, 든든한 한국인 유학생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다행히 내가 머물던 백패커스는 일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후배 여행자들을 위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으로 킹스톤 온 머레이(Kingston on Murray)라는 곳에서 농장 일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틀 뒤, 썸머 타임(Summer time)이 시작돼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무사히 애들레이드 시티를 벗어나서 농장 일을 알선해 주는 백퍼커스로 이동했다.
그런데 가장 보수가 많다는 포도 시즌이 끝나버려서 소위 “돈이 되는” 농장 일이 많지 않았다. 또, 백패커스에서 알선하는 농장 일은 오로지 백패커스 사장이 지정하는 일자에, 그가 지정하는 사람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매일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운이 나쁘면 일이 아예 없거나 몸은 고되고 보수는 형편없는 일을 맡을 수도 있었다. 나는 여기서 악취 심한 밭의 무를 뽑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돌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등, 힘은 들고 돈벌이는 안 되는 일을 여럿 했다. 그러다가 나무에 올라가서 살구 따는 일을 했는데, 8종류가 넘는 벌레들의 시간차 공격과 적은 보수에도 다른 일보다 나은 것이라 감사했다. 만일 이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감사의 마음도 없었을 것이고, 잘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뒤 알아본 바로는, 도시에서는 한국에서처럼 여러 다양한 일을 할 수도 있고, 의사소통 수준에 따라 몸이 편한 일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소통이 수월하지 않은데다가, “정착”이 아닌 “여행”이 목표인 워킹홀리데이 메이커였기에, 몸 편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평생 해 본 적 없는 Picking & Packing을 긍정적인 경험으로 생각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극한 상황까지 가보고 나니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솟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의사소통보다 중요한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력서를 들이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실행력이다. 덧붙이자면 사람도 잘 사귀어 두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많이 묻고, 그들의 말을 많이 들어두면 막막했던 앞길에 한 줄기 빛이 들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리해보자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그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관련 있는 사람에게 문의해 보는 게 시작이다. 그 뒤부터는 이력서를 작성하고 용기 내어 문을 두드려야 한다. 어쩌면 나의 많은 일복은 이렇게 두드린 문에 비례해서 생기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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