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서유화

by 요지

한여름, 오후 두 시. 창밖은 태양열로 지져진 아스팔트에서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숨통을 조이는 습한 공기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어깨를 축 처지게 했다. 그러나 에어컨이 빵빵한 학원은 시원함을 넘어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였다. 나는 얇은 카디건을 여미며 교재에 시선을 박았다. 문제집 페이지마다 형광펜 자국이 무지개처럼 번져 있었지만, 내 눈은 어떤 색깔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지우개 가루를 터는 기계처럼, 정해진 수순을 밟아 다음 문제로 넘어갈 뿐이었다.

중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엄마는 말했다.


“유화야. 공부 열심히 해서 1등 하자~ 응원할게”


1등. 그때부터 그것은 내 이름 앞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이자, 엄마가 내린 그리고 스스로 내린 내 존재의 이유였다. 어머니의 입가에 떠오르는 잔잔한 미소, 아버지의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뿌듯함.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숨 고르는 것조차 아깝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새벽 2시까지 이어지는 공부는 딱히 힘들지 않았다. 그 목표가 내 삶의 이유고 부모님이 날 낳으시고 가장 바라시는 거니까. 이 거대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 과목이었고,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옆자리에서 졸다 고개를 처박는 아이, 인강을 듣다 스르륵 잠드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심해’

수학 숙제를 다하고 나니 시곗바늘은 3시를 가리켰다. 학원 수업 시작이 10분 뒤였다. 보통 이 정도면 화장실을 가거나 휴대폰을 보지만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아까 풀었던 수식들이 둥둥 떠다녔다. 공부하는 게 별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지만, 쉴 때만큼은 공허했으면 좋겠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교실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수진이가 안 왔다. 보통 9시에 와서 공부하는데 좀 이상한 일이었다. ‘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다시 시계를 보았다. 수업시작 전까지 2분이 남아있었다. 나는 수업 때 쓸 책을 들고 복도를 향했다.

온통 무채색에 길게 이어진 복도. 수많은 방. 가끔 있는 색깔은 [온리 스카이]라는 학원 이름과 방에 적혀있는 등급뿐이었다. S, A1, A2, B, C, F, FF. 학원은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등급을 나누었고 최고 등급 S는 중학생인데 고등 과정을 거의 마친 아이들이 가는 곳이었다. 나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닌지라,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 수준이 A1이었다. 아, 수진이도 그랬다. 근데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들었지만 나와 비등비등 했다. 내가 1등이면 그 애는 2등을 했으니까.

복도를 걷던 내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내 담당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함께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쉬는 시간의 왁자지껄한 소리 대신, 복도 전체에는 낮게 깔린 불안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선생님은 평소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유화야, 혹시 수진이한테 연락받은 거 있니?”


“네? 아니요. 잠시만요, 확인해 볼게요.”


곧장 휴대폰을 켜고 알림을 확인했다. 아까 전만 해도 없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진(2-8)님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 알림을 클릭해 메시지를 보았다. 나는 문장을 읽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수진이 죽었구나.' 수진이 왜? 왜 죽었을까. 왜? 호흡이 가빠지고 온몸이 흔들렸다. 그런 나를 본 선생님은 나를 상담실로 데려갔다. 정확히는 끌고 가셨다.

[친구 유화야. 이 메시지를 받았다면 나는 이미 네가 있는 세상에서 벗어났겠지. 만약 나의 죽음이 너의 삶에 방해됐다면 미안해. 하지만 너라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나를 이해해 줄 거고. 그렇지? 솔직히 힘들잖아. 매일 문제집만 보고, 평가받고, 비교하고, 내 가치는 오직 시험 점수로만 표현되고. 그런 세상이 진짜로 싫었어. 그걸 버티는 나도, 너도, 그리고 이 사회도 다 망가트리고 싶었어. 그래도 나만 망가져야 하니까 죽었어. 다시 살고 싶기도 하고.


음, 나는 사후세계가 없었으면 해. 거기서도 또 이러면 어떡하지? 이왕 도망쳤는데, 진짜 절망적이겠다. 신이 있다면 인간의 힘듦을 보듬어주는 세상을 만들어 놨겠지?


아, 마지막으로, 나 너 미치도록 싫었어. 나는 힘든데 너는 일상인 듯 마냥 평온했으니까. 그 외의 모든 것이 다 그냥 싫었어 증오할 정도로. 네가 나쁘다는 건 아냐. 아니... 아닌가? 이제 선도 악도 잘 모르겠다. 뭐. 이제 마무리할게. 잘 지내. 오직 너 때문에 죽은 것도 아냐. 그냥 가방끈이 무거워서, 양말이 축축해서 죽고 싶을 때도 있었어. 아, 내 녹음기는 학교 정문 화단에 있어. 듣든 말든. 들을 거면 너만 듣고. 그냥 쓰고 싶은 거 쓴 거라 엉망이네. 그럼 안녕.]


“선생님 수진이가.. 그게”


“유화야.”


“뭐라고 말해야 할지...”


“유화야, 괜찮니?”


“... 네. 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냥.”


점점 힘이 빠진 목소리는 공기 중에 흩어졌다. 적당히 친했던 그 아이. 내내 2등과 3등 사이를 오가며 나를 바짝 쫓아오던 아이. 교재 한 페이지를 새벽까지 달달 외우고, 내 눈 밑 다크서클이 자기의 것보다 얕다고 웃었던 그 아이. 학원에서 종종 마주치던, 어쩌면 나보다 더 간절하게 1등을 원했던 아이. 그녀의 죽음은 내 심장을 단단한 바위처럼 굳게 했다가, 곧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부딪히는 것 같았다. 모든 소음이 멎고, 오직 심장이 쿵,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제 겨우 10분 전, 내가 '한심해'하고 속으로 비웃었던 그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왜, 왜 하필 그 아이였을까. 나처럼, 어쩌면 나보다 더 치열하게 이 경쟁과 압박을 버텨내던 아이였을 텐데. 그 아이가 끝내 무너졌다면, 이토록 강하다고 자부했던 나 역시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예고편일까. 나는 지금 이곳에, 마치 스스로 단두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기분으로 서 있었다. 수진이가 간 그 길의 다음 순번인 양.

하지만 부서진 마음은 아무도 몰랐다. 겨우 알았더라도 공감하는 척만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다시 수업을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무심하게도 눈물은 흘리지 못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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