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불쑥불쑥 소식을 듣게 된다
나는 어릴 적에 외가집에 가면 사면초가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 이유는 비교대상이 있어서 그렇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친밀한 어머니의 작은어머니가 늦둥이를 낳았고 그 늦둥이가 나보다 7일 먼저 태어나서 그는 나의 외삼촌이 되었다. 가족들이 일관성 있게 다 비슷비슷한 실력이라 생각했으나, 늦둥이 외삼촌은 시골에서 전교 1등을 하여, 나와 수능을 같이 봤다. 늦둥이 외삼촌은 서울 상위권 학교를 갈 수 있는 실력인데, 집안 형편으로 인해 그 지역 교대를 가서 나보다 취업도 일찍 하였고 눈 동그란 초등학교 선생 아내와 결혼도 하여 딸랑구와 셋이 잘 살고 있다. 2년 전에 친척 결혼식에서 동갑외삼촌을 우연히 봤는데 나보다 때깔이 월등히 좋았다.
이모아들 웅이의 등장
어머니와 친밀한 형제인 이모 아들이 등장하면서 나와 나의 동생은 아직까지도 비교를 당하고 있다. 이모아들의 이름은 웅이이고 나이는 나보다 3살 어린, 나의 남동생과 동갑이다. 웅이는 3살 때 한글을 떼었고 책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내가 어릴 적에 생각 없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웅이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을 하였다. 초등학교 방학 때 외갓집에서 웅이와 만나면 웅이는 동생과만 놀고 나랑 잘 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이모집에 가면 이모부는 이모와 결혼을 반대했던 어머니와 내가 닮았고 명랑이라 쓰고 나대는 성격인 나는 이모부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셨고, 나보다 동생을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이모아들 웅이는 나와는 다르게 중ㆍ고등학교 때까지도 공부를 잘하였으며, 웅이가 더 대견한 건 이모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오시면 웅이는 이모가 바로 쉴 수 있게 설거지나 집안일들을 해 놓는 착한 아들이었다.
이모는 이런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웅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있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교는 집과 가까운 국립대를 가게 되었고 자연계 중에 의대다음으로 가장 좋은 과를 가게 되었으며, 졸업 후 바로 학과 교수 추천으로 서울로 취업을 하게 된다. 취업 후 그는 광명시의 단칸방에서 알뜰하게 돈을 모아 인천에 집을 사게 되었다. 웅이가 집을 살 때 이모는 도와줄 형편은 아니라고 들었다. 웅이는 이모가 아프다고 하면 적합한 약과 병원을 알아보는 등 이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웅이의 아내는 회장님 딸인데도 검소하기까지 했다.
아내와 나는 양가 도움 없이 둥이를 기르면서 하루하루가 전쟁이어서 나는 직장생활을 하는 웅이보다 결혼을 일찍 하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아내와 나는 양가 도움 없이 둥이를 기르면서 하루하루가 전쟁이어서 그런지 그 시절의 기억은 어디론가 해리되었다. 우리 둥이가 대충 3살쯤 되었을 때, 이모아들 웅이는 회장님 딸과 직계가족만 모여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회장님은 초록창에 나올 정도로 명망이 있었고, 회장님 딸의 결혼식에 거래처에서 보내는 축의금만 해도 상당할 텐데, 거래처와 회사에는 결혼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웅이 아내는 웅이보다 2살 연상이었고 공부도 잘하여 서울 상위권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었다. 웅이 아내가 웅이 결혼 인사드리러 외갓집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웅이아내는 모든 가족의 선물을 사 오는 센스쟁이의 끝을 보여 외갓집에서 웅이는 대스타가 되었고, 회장님 딸이라면 명품을 많이 사고 소비를 많이 할 줄 알았으나 웅이 부부는 외식은 거의 안 하고 음식을 집에서 다 해 먹는다고 하였다. 웅이의 아내도 웅이와 같이 검소하다고 하였다. 그 처갓집에는 상가도 있어 월세가 상당함에도 웅이는 처가집 도움을 받지 않고 웅이가 구입해 놓은 인천의 집에서 신접살림을 꾸린다고 한다. 웅이의 아내는 샘이 많고 질투가 많은 이모와 전화를 자주 하면서 이모와 친밀도가 높다고 한다. 이모는 이모아들인 웅이는 성격이 무뚝뚝한데 며느리는 엄청 싹싹하다고 한다.
"네가 웅이보다 못한 게 뭐 있는데 너는 왜 그러냐?"
어릴 때 어머니는 나와 웅이를 비교하면서 "네가 웅이보다 못한 게 뭐 있는데 너는 왜 그러냐?"라고 그러셨다. 이모는 어머니와 같은 학력을 가지고 있고 당시 이모부는 당시 전문학사를 나왔으며, 집도 지방이고 심지어 나는 학원도 많이 다녔는데 즉 웅이의 배경보다 나는 훨씬 나은 조건에서 사는데, 웅이보다 상대적으로 공부도 못하고 집안 어지럽히고 만날 뭐 사달라고 떼쓰기나 하고 최근에는 "예전에 나한테 들인 학원비가 아깝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어렸을 때 발분(發憤)의 정신을 가지고 노력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화(禍)로 공부를 해서는 집중이 잘 되지도 않았고 지속력도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가 나에게 웅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나는 어느 날부터 초연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렸을 적에 일찌감치 내가 가진 기질로 앞으로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변화를 모색하되, 당장 변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이는 부부끼리 검소하게 살면서 뭔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그림과 가장 근접하여 나도 웅이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나는 내 실력대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생각 외로 능력이 많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쌓아가면서 실력을 기르고, 검소하게 살아 자금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나는 웅이처럼 과거에 어머니 잘 도와드리고 공부도 꾸준히 해서 좋은 학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지거국이 목표였고, 취업이 잘 되는 경영학과를 가고 싶었지만 실력이 되지 않아 경영학과를 가지 못하였다. 그래도 나는 취업을 하게 된다면 월급의 70% 이상 저축하여 독립하는 게 나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나는 이성교제가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으나, 나는 혹시라도 결혼을 한다면 검소한 분하고 살아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능력이 있지 않아 검소하게 살아야 60 이후에 한 달에 50만 원 정도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웅이가 회장님 딸과 결혼하여 웅이 처가의 자산력을 웅이가 빌리는 것은 제외하고, 웅이는 부부끼리 검소하게 살면서 뭔가를 이루어 내는 것이 내가 살고자 하는 그림과 가장 근접하여 나도 웅이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우리는 언제 웅이 그늘에 벗어날 수 있을까?"
나와 동생은 자조 섞인 말로 "우리는 언제 웅이 그늘에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자주 한다. 나의 동생은 마침 웅이의 딸랑구와 같은 시기에 딸을 낳았고 이름도 이중모음 아래위로 옮기면 될 정도로 이름이 비슷하다. 어머니와 이모가 건강하셔서 웅이의 이야기를 오래 이야기를 듣고 싶기는 하지만 이모의 자랑을 듣는 동생도 괴로울 거다. 웅이의 딸은 순둥순둥한데 동생의 딸은 예민한 기질이 있다.
"그 집이 좁다"
동생은 30대 후반에 결혼을 하였는데 어머니는 동생의 아내 즉, 작은 며느리는 웅이 아내와 비교했을 때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주위에서 아들ㆍ딸 결혼시키면서 들은 게 있어, 동생이 결혼할 때는 어머니가 일용직 해서 안 먹고 안 써서 돈을 모아 경제적으로 동생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어머니 말을 빌리면 작은며느리는 결혼할 적에 모아둔 돈이 없었고, 친정집에서 결혼할 당시 해 온 게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동생은 지금 내가 대학교 때 살 던 집 28평에 살고 있는데, 어머니가 동생이 들어오기 전 세입자를 내 보낼 때 어머니의 도움으로 전 세입자를 내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 동생, 작은 며느리, 딸랑구 셋이서 살고 있는데도 명절 때 동생은 "그 집이 좁다"라고 하여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가 흙 파먹고 살아도 우리 둥이 주머니 돈은 챙겨서 내 보내야겠다
작은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할 도리를 했다고 생각하여, 이제는 동생이 어머니를 전담마크 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와준 것에 대해 작은 며느리의 행동거지를 보면 도와준 돈이 아깝게 느껴지는 것 같다. 어머니는 나에게 웅이 안사람과 작은며느리와 비교가 많이 된다 하신다. 나는 어머니에게 동생의 결혼이야기를 들으니 "결혼생활도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나는 "부부가 죽이 잘 맞으면 결혼한다"
는 주의인데 또 살고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유는 나만 빌어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자식에게 어느 정도는 지원을 해 주어야 그래도 자식이 조금은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우리 아들 장가보낼 때까지 직업이 있는 게 목표이다. 이런 현실들을 보고 나는 아들이 장가간다고 하면, 내가 흙 파먹고 살아도 아들 주머니 돈은 챙겨서 독립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 때 나는 작은 며느리와 아무 이야기 안 하고 밥상 치우고 설거지하고 궂은일만 하다가 온다. 나는 말에 일관성이 없어서 내가 말만 하면 동생은 옛날이야기를 하여 놀려댄다. 나도 아들이 있는데 아들에게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명절 때는 아침 일찍 가서 아침 먹고 바로 처가집 간다.
동생도 자랑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동생은 동생 친구들 자랑을 일삼으며 자기 절친은 과천에 분양을 받았고, 누구는 떡볶이집 매스컴에 타서 엄마하고 유럽여행 갔다 왔는 둥, 동생은 친구들에게 우리 집 이야기를 할 게 없다고 한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가족에게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지 친구들을 아주 끔찍하게 여겼고 동생은 내가 친구 없다는 걸 은연중에 약점을 잡는다. 나는 회사에서 결산 때 분식을 일삼는 회사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고, 연대의식보다는 개인의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불만 있으면 그걸 표출해 내는 메타인지가 좀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매일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 이하도 없는 것 같다.
동생 : "엄친아의 반대말은 뭐야?"
나 : 뭘까? 잘 모르겠는데
동생 : (그는 나를 보며) 우리 형...
저도 많이 반성하고 아직도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역부족이네요..
마지막으로 어머니.. 어머니의 나이가 70 가까이 되었는데도 몸이 안 좋으시지만 경제활동의 의지를 보이시는 모습 너무 존경스럽고,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큰 게 아닌 작은 무얼 바라는지는 알지만 즉 며느리와 소통을 하고 싶다고 하시지만 제가 여러 가지 이유로 어머니의 요구사항을 못 들어드려 죄송해요.. 저도 웅이처럼 검소하고 하나하나 이루어 나가며 살고 싶습니다. 저는 웅이를 보면서 저도 많이 반성하고 아직도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역부족이네요.. 어머니가 나를 키울 때 지금과 같이 이렇게 살라고 정성을 들여 키운 건 아니었으리라 생각하고 앞으로의 삶이 더 좋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머니 미안하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