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임님, 내가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다.
"말했잖아요"는 보통 나보다 기세가 우위에 있을 때 낮잡아서 하는 말로 알고 있다.
보통 회사에서 "말했잖아요"의 이야기를 듣는 상황은 예를 들어, 내가 새로운 회사에 이직을 했을 때 전임자가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는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디테일한 상황에 들어가면 전임자는 내가 이직한 회사에 정이 다 떨어진 상태로 새로운 사람인 나에게 업무를 알려주었는데 내가 전임자의 이야기를 잘 못 알아듣게 되어 전임자가 나에게 또 말하게 될 경우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라고 핀잔을 줄 때 사용한다.
또한, 내가 이직한 회사의 차장인데 과장님에게서 일을 배울 때 과장님이 나에게 "차장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라고 아주 짧게 알려주고 자세하게 알려준 것처럼 말할 때 "제가 말했잖아요"를 사용하는 것으로나는 알고 있다.
주임님.. ERP 하고 엑셀하고 숫자가 안 맞아요
예전 글에서 언급했던 백두혈통의 사원이 주임으로 명칭만 바뀌었고 직급만 같다. 팀장님도 인맥으로 들어온 백두혈통의 주임님에게는 천사다. 그런데 내가 주임님에게 ERP 하고 엑셀 숫자가 안 맞다고 말했더니 주임님은 "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라고 한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주임님이 관용을 베풀어서 한 번 말을 더 해줄 수는 없었나?
내가 그렇게 주임님 말에 기억을 못 했나?
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위 둘 중에 마지막은 아니었다. 내가 중견기업으로 이직을 했을 때, 나는 많이 경직되어 있어 그런지 같은 과장의 직급 동생이 알려준 내용에 대해 이해를 잘 했더라도, 여러 번 물어보면 "제가 말했잖아요"를 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 과장님은 "이 회사에서 버텨라"라고 하면서 많이 알려주곤 했다.
나도 그랬었나?
나는 윗사람에게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라고 못해봤던 기억이 난다. 나 같은 경우는 전공과 다르게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내가 확인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지, 윗사람에게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라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었다. 만약 주임님이 팀장님에게 "팀장님,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라고 했다면 가만히 있을 팀장님이 아니다. 내가 주임님에게 뒤집어 씌우는 그런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왜 나한테 "예전에 말씀드렸잖아요"를 한 번도 아니고 습관처럼 자주 하는 주임팀을 보면서, 나는 주임님의 업무태도에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주임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주임님은 6시가 되면 가방을 부스럭거리면서 퇴근할 준비를 한다.
내가 무수히 고민했던 회계처리도 주임님에게는 이유식 떠 먹여주듯이 다 떠먹여 드린다.
원래는 업무도 안 주고 싶었으나 팀장님이 후학양성하라고 해서 우리 주임아기 뜨거울까 봐 숟가락에 있는 이유식을 부채로 밥 식혀가며 우쭈주하면서 하나하나 다 떠서 먹여 드린다.
주임님 월급인상률이 나의 2배가 넘는다. 심지어 주임님 월급이 나 대리 때 받던 월급보다 많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주임님에게 한 마디 하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팀장님은 주임님 편을 들기 때문이다. 우리 팀에서 그만큼 나의 입지는 없는 편이고 나는 아랫사람에게도 예의를 다 하기 때문에 나는 아랫사람에게 말할 때도 되게 신중하게 말한다. 그런 나의 저자세 회사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위의 사람 복도 없는데 아랫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독자적으로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현실을 알고 나니 씁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주임님과 예의를 최대한 갖추고 서로 평행선을 그리면서 남은 회사생활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