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대리님 푹 쉬고 올 수 있음 와요 고마웠어요

왜 뱀대리인지는 묻지 말아줘요 그건 지켜줘야 할 거 같아요

by 정훈보

대리님은 체구가 작지만 두 아이의 엄마로 씩씩하게 맞벌이를 하였다. 대리님의 딸내미는 귀가 부처님 귀라 복스러워 보여 나는 부럽다고 생각했으며, 대리님의 남편은 애들과 정서적 친밀도도 굉장히 높아 개인적으로 모범적인 아빠라고 생각하였다. 대리님은 나보다 이혼 확률이 극도로 적지만 불륜, 이혼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대리님 말의 워딩은 조금 하드 했다. 3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대리님은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말을 가끔 했는데 그중 하나는 "결혼하고 10년 있으면 남편하고 재산 분할은 반으로 해야 해요."라고 해서 갑자기 나 자신을 보는 거울이 삭 비쳤다. 나는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인생을 아는 척했었던 적이 많았다는 것에 내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사회생활을 한 번도 안 해본 내가 10년 이상 나보다 큰 조직생활한 아내에게 조언을 했다는 것이 지금 보면 굉장히 수치스러운 기억 중의 하나이다. 나는 30대에 취업을 했지만 대리님은 20대 어린 나이에 객지에 나와 취업해서 생활전선에 일찍 뛰어 들어 그런 거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출이 1,000억이 넘는 회사에 시스템이 없어, 대리님은 구매팀에서 엑셀로 작성한 입고내역을 검증해서 나에게 정말 빠르고 정확하게 던져주었다. 그래서 4분기 결산을 할 때 매출 및 매출원가를 빠르게 내릴 수 있었으며 매출 및 매출원가를 내리다 틈이 날 때 타 계정과목을 회계처리하여 결산을 정말 빨리 끝냈던 기억이 있다. 대리님은 타 팀에서 왔지만 내가 부탁하면 내 말을 빠르고 그리고 잘 알아 들어줘서 나는 대리님과 개인적인 말은 최대한 적게 하고 일로만 엮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리님은 내 민낯을 투명한 유리에 너무 잘 비춰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리님은 회사에 애들 교육기관이 바뀌어서 육아휴직을 쓰고 싶다고 했단다. 그런데 회사에서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로는 올해부터 수주가 줄어들기 때문에 인원 감축을 한다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 타이밍이 정말 묘하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우리 팀에서도 1명을 내 보내야 한단다. 지금 나는 감사 때문에 지쳐 있는데 그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더욱 기분이 다운되었다. 결국 우리 팀에서 대리님이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되었다. 대리님은 육아휴직을 담주부터 간다 하지만 휴직 후 돌아올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리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감히 그런 말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차례도 곧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대리님 육아휴직 마치고 판교 이런 영한 느낌의 지역으로 가서 안정적인 회사생활하길 바라요. 제가 그 회사에 원서 넣으면 저 괜찮다고 한 번만 해줘요. 면접이라도 볼 수 있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세 번째 회사(3) - 연대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