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스탄 땅의 일상, 느리게 흐르는 로컬의 결]
2019년, 키르기스스탄에서 처음으로 ‘베쉬바르막’을 마주했다. 고등학교 시절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말뼈 가루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막연하게만 느꼈던 ‘말고기’가 내 눈앞에 실제 요리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는 평생 구경조차 하기 힘든 말고기가 이곳에서는 결혼식 같은 큰 잔치에 빠지지 않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중앙아시아의 식탁은 투박하지만 정직하다. 고기와 밀가루, 그리고 감자, 당근, 양파. 이 몇 안 되는 식재료로 그들은 수천 년을 버텨왔다. 화덕에서 갓 구워낸 동그란 빵 ‘논(Non)’을 찢어 기름진 고기 볶음에 곁들이는 일상은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위구르 문화의 영향을 받은 볶음면이나 만두도 있지만, 한국 음식처럼 다채로운 조리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단조로움이야말로 척박한 고산 지대를 견디게 하는 유목민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베쉬바르막은 말고기를 푹 삶아낸 국물에 직접 손으로 민 수제 면을 넣고, 그 위에 부위별로 썰어낸 고기를 산처럼 쌓아 올린 음식이다. 현지인들은 산과 들에서 약초를 뜯어 먹고 자란 말고기를 최고의 스테미너 보양식으로 꼽는다. 사실 한국인에게 양이나 염소의 향은 때로 버겁지만, 말고기는 의외로 다정했다. 특별한 간을 하지 않아도 누린내가 전혀 나지 않고, 살점 사이의 지방조차 담백했다. 아내와 함께 베쉬바르막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다음 끼니를 잊을 정도로 배가 든든해지곤 했다.
이곳 오쉬나 비슈케크의 시장을 걷다 보면 묘한 풍경과 마주한다. 바다가 없는 내륙국임에도 강에서 잡은 붕어나 메기 같은 민물고기들이 좌판에 깔려 있다. 하지만 민물 요리에 익숙지 않은 내게 그것들은 늘 ‘그림의 떡’이었다. 소고기 1kg에 8달러인 나라에서 5달러면 살 수 있는 생선은 가난한 이들의 단백질원이자, 누군가에게는 향수(鄕愁)의 맛이었을 것이다.
문득 같이 일하던 직원에게 물으니 1,000달러면 말 한 마리를 살 수 있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힘들겠지만, 언젠가 조용한 시골에 살게 된다면 말 한 마리를 사서 동네 목동에게 맡겨두고 싶다는 즐거운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산으로 들로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내 말을 보러 가는 삶, 그것이 이 땅이 주는 투박한 로망이 아닐까.
재미있는 것은 이 단출한 고기 식탁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이 바로 한국의 ‘김치’라는 사실이다. 느끼한 고기 지방과 향신료의 맛을 잡아주는 김치의 감칠맛에 현지인들도 금세 매료되곤 한다. 이제 대형 마트에서 한국 김치를 찾는 건 일상이다. <오징어 게임> 같은 K-컬처의 유행 덕분이기도 하지만, 여름 채소를 소금물에 절여 겨울을 나는 그들의 ‘절임 문화’가 우리의 김치와 닮아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화려한 미식은 아닐지라도, 정직한 땀과 대자연의 시간을 담아낸 중앙아시아의 식탁. 그 투박한 그릇 속에서 나는 이방인인 동시에, 그들과 같은 음식을 나누며 조금씩 이 땅의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