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흔히 보는 풍경, 무리 안에서의 정치적 논쟁이다. 소모적인 대립임을 인식하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믿고 싶은 뉴스에 기초한 진영 편애자나 정치평론가가 되기 일쑤다. 주장의 근거로 인용한 뉴스들의 효용성과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사용한 ‘무용지식’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뉴스에 대한 가치와 확신은 굳은 신념으로 발전되어 타자의 합리적 의견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이럴 때 토론은 감정 섞인 언쟁이 된다.
객관성에 근거한 의견의 대립이라면 열린 시민사회를 위해 다행스럽다. 그러나 억지 춘향식으로 정치적 입장을 강요받는 상황에 직면하면 불편함이 밀려와 관계는 난망해진다. 제아무리 합리적 사실에 기초한 의견일지라도 비과학적 논리와 표본도 안 되는 설익은 경험치의 득세 속에서는 과학이 주는 신뢰의 태도는 무기력해진다. 언제부터인가 사회적 이슈 때마다 둘로 나눠진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의 해양 방류 결정에도 갈라진 정파적 주장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극단의 주장이 난무하지만 전가의 보도처럼 과학에 바탕을 둔 주장이라는 명분은 차용된다. 그러나 따지고 들면 논리는 빈약하다. IAEA에 이어 우리 정부 자체 조사 결과 발표로 오염수 안전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는 사실상 일단락됐다.
하지만 오염수 안전성과 오염수 방류를 인정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크게 존재한다. 오염수 방류에 대한 반대가 많은 국민의 우려를 도외시할 순 없다. 정부가 응당 짊어져야 할 설득의 역할이다. 그 논거는 당연히 과학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학적 사실이 개입할 여지는 현재로서는 없어 보인다. 국민 불안은 날로 가중되고 있다. 어떤 주장이 선동인지, 과학인지 이쯤 되면 국민은 난망해진다. 팩트 체크에 충실해야 할 언론의 역할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이다.
원리주의는 사회통합에 매우 불온하다. 절대적 믿음을 강제하기에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실 원리주의적 행태를 띄는 이들은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확증 편향적 행태를 견지한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기준을 절대화한다. 또한 그것을 사회 전반에 강요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기도 안 찰 가짜 뉴스가 소멸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득세하는 이유는 이러한 원리주의 소매상이 많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원리주의 상품은 잘 팔린다. 그래도 그렇지 국민 건강을 담보로 과하기 그지없다.
의료현장에서 종종 마주하는 당혹스러운 환자가 있다. 과학적 치료보다 확신에 찬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경우이다. 대부분 극소수의 사람에게서 임상적 증상의 호전 효과를 보였을 뿐 이를 뒷받침할 이론적인 근거와 위험성에 대한 연구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부작용이나 다른 의학적 위험이 생겼을 때 사실 대책이 없다. 의사의 존재 이유는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위험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함이다. 그러함에도 의사를 믿지 않고 표류하는 정보를 맹신한 나머지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민 건강을 담보로 한 원리주의적 주장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결은 진실로서 정리되어야 한다. 더 큰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위선과 가공된 정보는 국론 분열과 사회통합을 저해한다. 믿고 싶은 주장에 천착하고 편취된 현상을 이용하는 극단적 세력이 득세하는 시대에 상식적이며 포용적 열린 사회를 지켜내는 것은 선동이 아닌 합리적 의심이다.
균형 잡힌 합리적 의심의 토대 위에 단단하게 서 있는 시민사회는 국가의 동력이다. 핵 오염수와 관련하여 취사선택된 주장을 맹신하지 말고 시민으로서의 과학적 의견에 기대여 의심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열린 의사결정의 건강함을 따르고, 합리적 민주주의의 힘을 믿는 것이 시민사회의 힘이다. 적어도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사실이 편향된 주장에 포박당한 오류일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자.
국민의 안전과 직결된 환경적 현안에 대해 진영논리에 포위되고 넘실대는 비과학적 주장의 서사 과잉에 함몰되면 사회통합은 요원해진다. 국가적 위기는 도래한다. 이를 염려한다면, 시민으로서 보편적 균형감을 갖추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정보의 선택지를 확장해보자. 우린 늘 확증편향과 합리적 의심의 경계에 놓여 있다. 늦었지만 우린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