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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의 건강 프레쉬] 기억의 편린

사전적 의미의 기억은 ‘사람이나 동물 등의 생활체가 경험한 것이 어떤 형태로 간직되었다가 나중에 재생 또는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기억은 통상 감각을 통해 구성된다.     



일테면 냄새와 감촉, 음성 등으로 뇌에 새겨진다. 아픈 배를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 손바닥의 온기, 유별난 이별을 위로해 주던 노래 가사, 유년을 지배했던 친구와의 놀이, 맛있던 음식의 미각, 아스라이 코끝을 자극하던 타인의 향수 등이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뇌에 저장된다.     



이럴 때 기억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좋은 기억은 인생의 힘이 되지만 모진 기억은 때로는 삶에 딴죽을 건다. 트라우마란 이름으로 기억의 늪에서 삶이 허우적댄다. 그것은 때론 감당하기 힘들 때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는 비극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고 규정했다. 둘 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이지만, 후자가 더 흥미롭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인간은 이익과 공포로만 움직인다”고 했던가.     



인간의 기억은 매우 이기적이고 간사하다. 선택 취사 형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로 새겨진 기억들은 확증편향을 태생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입장에서 기억되기에 타인을 아프게 한 사실조차 느끼지 못한다. 부모님의 사랑이 그러하다. 내겐 성장의 추억이지만 부모님에겐 내리사랑의 대가였을 기억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앞에 부끄러운 몸서리가 처진다.     



그 언젠가 그룹 GOD의 노래 중에 "어머니는 자장면을 싫다고 하셨다"라는 가사가 그러하다. 그 옛날 자장면은 흔하게 범접하기 어려운 호사스러운 음식이었다. 어머니가 그 자장면을 싫어하셨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자식 입으로 들어가는 자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어머니들은 허기보다 행복이 먼저였을 것이다.     



얼마 전 새하얀 눈이 쏟아지는 퇴근길, 문득 잊었던 추억이 절로 떠올려진다. 이럴 때면 누구나 작은 기억의 편린들을 지난다. 이윽고 눈과 관련된 인생의 풍경에서 잊었던 사람에 대한 기억에 다다르면 기억은 그제서야 무지개 융단처럼 깔려 망각했던 시간을 시나브로 소환한다.  


   

나이 들어가며 기억의 편린들은 나뭇잎이 우거져 그늘이 드리우기도 하고 관계의 이끼들은 때론 촉촉하고 눅눅하기도 하다. 살아낸 시간은 오로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으로도 파노라마처럼 기억을 불러들인다. 아, 맞다. 기억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었구나.  취사선택했던 행복한 기억뿐만이 아니라 불행했던 기억들의 조각들,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촘촘하게 붙여야 한다. 나쁜 기억이 행복의 부당한 박탈이 아닌 행복의 재구성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야 알겠다. ‘사람의 가치’에 기초한 기억이 아니라면 지난 시간의 행복과 불행은 온전하게 누군가의 아픔과 배려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한 기억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추억은  기괴하고 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의 자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주 내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변형된 것들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진실 앞에 숙연해진다. 망각은 신이 준 축복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잊힐 기억은 없다. 애써 잊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놓치고 간 기억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면, 누군가의 도움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던 이들을 잊고 살았다면 이제 그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나가야 한다. 더 레테의 강을 건너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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