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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의 건강 프레쉬] 희망과 절망 사이

많은 이들은 건강을 상실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유한함을 절실히 목도한다. 그 후 인생에 대한 끈덕진 애착은 당연지사이다. 일생토록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가 그제야 하고 싶은 게 생겨나기도 한다. 평소 하고 동경했지만 쉽사리 결행하기 힘들었던 버킷리스트를 정성스레 만들어 보기도 한다. 건강이 주는 삶의 성찰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인간에게 건강은 늘 각성의 마중물이 된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어쩌면 타인이 보기에 하찮은 것들일 수도 있다.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고 맛있는 음식을 가족과 함께 먹고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한가로이 들을 수 있으며 사랑하는 이들이 아프지 않고 부단히 살아가는 모습은 행복의 크기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행복도 아니다. 행복은 지극히 평범하다.      



극심한 통증으로 내게 찾아오는 어떤 환자는 “선생님 왜 제 삶은 고요하지 않을 까요”라며 탄식한다. 또 어떤 환자는 참기 힘든 통증 앞에서 일말의 응석도 없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호소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떤 미더운 위로를 해줘야 되는지 딱히 고민하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의사와 환자와의 굳은 결속은 해답을 주며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닌 침묵이 불편하지 않는 사이임을 믿기에 침묵을 마냥 지켜주기도 한다. 마냥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의례적 위로는 상대에게 기만으로 보여 지기도 하기에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기대는 거의 희미해져 희망은 자취를 감춘 듯이 보이는 환자도 있다. 아름다워 지려 결심한 코 수술의 후유증으로 병원을 돌고 돌아 내게 온 환자는 끊임없는 절망과 슬픔의 변주 속에서 사람들과의 대면조차 버거워했다. 보통 그런 경우는 다소 건조한 의학적 조언에 더해 혼자 외롭게 웅크리고 있을 환자에게 “잘 치료하면 분명히 나아집니다. 환자분은 여전히 아름답다”라는 말을 살포시 건네 본다. 본디 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기억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절망 속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절망도 없는 절망의 시간과 슬픔도 없는 슬픔의 시간은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이겨내야 희망의 힘이 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야 치료 효과도 좋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그럴 때 절망을 밀어낸다.      



환자로부터 희망을 놓아 버린 절망적 한탄을 유난히 많이 듣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많이 아프다. 촛불도 꺼져가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환자의 희망 앞에 의사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시나브로 인간의 체온이 담긴 따스한 손잡음과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결기뿐이다. 그런 날은 꿈조차 잠이 들 만큼 온몸의 기력은 쇠진된 채 잠이 든다. 그랬다. 희망은 기력이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을 빌리자면 “절망은, 말 그대로 모든 바람을 끊어내는 일.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 않다. 바람을 멈출 때, 고민이 시작 된다”며 “절망은 사유의 광맥이다”라고 했다. 의사로서 늘 마음에 새긴 두 가지가 있다. 소중한 생명을 다루며 의사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사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의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기에 피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절망을 지닌 채 찾아온 환자의 치료 앞에 용기를 갖겠다는 것과 실천으로 환자에 대한 존경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 의사는 서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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