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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을 통해 본 오징어의 사회학

오징어는 한자로 오적어(烏賊魚)로 표기한다. 오징어의 검은 먹물을 까마귀에 빗댄‘오(烏)’자에 물고기를 뜻하는‘즉(鯽)’자를 써서,‘오즉어(烏鯽魚)’라 쓰였는데 후세에 음이 같은‘오적어(烏賊魚)’가 되었고 오늘날의 오징어에 이르렀다고 알려져 있다. 기록된 문헌을 찾을 수 없으니 구전이라 해도 무방하다. 

오징어는 명태와 함께 우리 민족이 즐겨 먹는 해산물이다. 서민의 대표적 음식으로 통용된다. 오징어는 스스로의 몸을 변화시켜 감정을 드러낸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마지막 생존의 수단으로 먹물을 뿜어낸다. 그러나 독성은 없다. 생사의 갈림 길에서  온몸으로 분출하는 먹물마저도 인간에겐 머리 염색의 도구로 쓰임 된다. 무기력한 분노이다.  

어린 시절 오징어에게는 왜 붉은 피가 없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피는 붉은색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피가 붉다는 것은 피의 성분에 철(Fe)을 함유한 헤모글로빈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오징어의 피에는 구리(Cu) 성분의 헤모시아닌이 있다. 헤모시아닌은 산소에 산화되면 연한 푸른빛을 띤다. 오징어 몸에 흐르는 연한 푸른색의 점액질은 붉지는 않지만 피가 분명하다. 쉽게 접하고 쉽게 잡히는 오징어도 여타의 존재와 같이 존엄이 있다는 의미이다.

한국에서 제작된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몰아가고 있다. 제작사인 넷플릭스의 테드 서랜도스 최고경영자는 “오징어게임이 비영어권 드라마 중 최대 흥행작이 될 것이 확실하다”라고 찬사를 보낸다.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건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물이다.

대중의 사랑을 받는 문화는 시대의 정서를 반영한다. ‘오징어 게임’이 그렇다. 1편부터 9편까지 내리 드라마를 관람하는 '정주행'은 내게 호사스러운 일상이라 가당치도 않았지만 일주일간 틈틈이 짬을 내었다. 이 작품이 대중의 찬사와 지지를 획득한 이유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처지가 관객 모두에게 깊은 동질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의 절망을 먹이로 삼는 것에 대한 유대감이 아닐까 싶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내내 불편한 진실 앞에서 때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때로는 측은지심의 심정이 들기도 하였지만 극중 설정은 어느새 몰입을 가져다준다. 드라마가 설계한 게임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우리 사회를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징어 게임’이 던져 주는 우리 사회의 화두는 코로나19 이후 부쩍 확장된 경쟁과 불안과 그리고 극명한 사회 양극화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성찰이다.

나를 위시하여 일반 시민들에겐 감히 엄두도 못 낼 거액의 상금을 두고‘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약삭빠른 손익을 계산하고 망설이지 않고 사람다움의 태도마저 저버린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은 흥미롭지만 인간의 이중적 민 낯 앞에 불편함을 느낀다. 승자독식의 지독한 경쟁 체제 속 인간 본성을 제대로 파헤친 드라마는 이윽고 죽음을 앞둔 사내의 주변인들 자화상을 담아낸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데쟈뷰된다. 

‘오징어 게임’최후의 승자에게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라고 묻는 게임의 설계자의 대사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통렬한 힐책이다. 감독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았건 극중 주인공 성기훈의 대사처럼 어쩔 수 없는 노릇이더라도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는 일은 인간으로서의 바른 태도이다. 불신과 냉소, 배척으로는 척박한 세상살이 그 어디에도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애당초 인간은 연대하지 않으면 소통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관계는 선택이 아닌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오징어는 빛의 자극에 반응하여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주광성이기 때문에 밝은 빛이 있는 곳으로 모여든다. 이러한 습성을 역이용, 오징어잡이 배는 밤에 밝은 집어등을 내걸고 오징어를 잡는다. 456억의 상금이라는 휘황찬란한 불빛을 향해 달려드는‘오징어 게임’속 일그러진 군상들의 면면은 때로는 극악무도하고 때로는 더없이 인간적이다. 9부까지 이어진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야 왜 연출자가 드라마의 제목에 오징어를 차용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인간은 헛된 욕망의 불빛을  향해 달려들어 끝내 소멸되는 오징어가 아니다. 그래선 안된다. 우린 서로에게 생존을 지탱해 주는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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