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림 Feb 02. 2022

위장은 다 털렸지만 차는 마시고 싶어

입맛과 위장이 타협하며 남들보다 좀더 빠르게 어르신이 되어간다

나에게는  차를 밤에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각잡고 차를 마신다는 행위 자체가 일과 끝나고 술마시는 것의 대체였기 때문이다. 커피를 못마시니 아메리카노로 흐린 정신을 깨운다는 개념이 없는 데다 차를 적절하게 우려마시는 자체가 일하면서 하기엔 너무 번거로웠다. 한편 일과가 끝나면 긴장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기 위해 술을 혼자 마시기도 했지만, 건강상 언제까지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난 밤에, 에너지가 남아있는  좋은 날엔 차를 마시게 되었다. 작년 말에  운조차 다하기 전까지는.


루이보스와 허브티를 찾아서

위장이 약하거나 카페인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가장 선택하기 좋은 대용차는 허브티나 루이보스가 아닐까 한다. 차나무(카멜리아 시넨시스) 잎으로 만들지 않으면 차가 아니라는 보수파일지라도 속이 쓰린 데는 어쩔 수 없다. 일단 재작년에 산 루피시아 티백 100종 세트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던 디카페인 티를 전부 꺼냈더니, 작두콩이 들어간 한 가지 이외에는 전부 가향한 허브티이거나 루이보스였다.

루피시아 티백세트의 디카페인 티들

시중에 유통되는 허브티는 대부분 카모마일, 레몬그라스, 로즈마리, 페퍼민트, 로즈힙 단일이거나 이 식물들을 기본으로 여러 재료들을 배합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 마트에서 구할 수 있는 제품을 우려보거나, 카페에서 주문해 마셔보면 향긋하기는 커녕 좀 꿉꿉한 맛이 난다. 어쩌면 차보다도 품질과 보관상태를 더 많이 타나 싶을 정도인데 수요는 더 적기 때문일 것 같다.


한편, 가향되지 않은 루이보스 차를 마셔보면 나무껍질같은 맛이 난다. 나무껍질을 달여마셔본 건 아니지만 누구나 카카오 100%가 먹어보지도 않은 크레파스맛이 난다는 건 아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다.


한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허브티가 십수년 전과 비슷하게 열악한 반면, 루이보스티는 양인들이 가향으로 많이 극복한 편인 것 같다. 맛없는 찻잎이라도 가향으로 극복해서 균일한 대량생산 품질을 만들어내던 솜씨가 더 맛없는 루이보스티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보통 카라멜이나 바닐라 계통의 가향이 인기있지만 최근 마음에 든 건 로네펠트의 루이보스 크림 오렌지이다. 오렌지 향이 강렬하게 피어오르다 약간 크리미한 향과 맛이 거드는 느낌이다.

로네펠트 루이보스 크림 오렌지

로네펠트는 국내에 판매되는 브랜드 중 가장 다양한 허브티와 루이보스티 라인업을 갖고 있다. 품질은 괜찮았지만 가격이 좀 비싼 느낌이라 찾아봤더니 내가 산 티백 제품의 경우 현지가와 한국 수입 제품 가격이 약 1:2.5 정도의 야만없는 배율이었다. 바로 앞에 좀 비싸도 정식수입차를 사먹자고 써놓긴 했지만, 관세도 낮은 편인 허브티가 2배가 넘는 건 너무한게 아니냐며 내 안의 가성비충(…)이 폭발해버리는 바람에 재구매는 좀 고민하게 될 듯.

로네펠트 프루티 카모마일

오랫동안 좋아했던 위타드의 베리베리 크러쉬는 허브보다는 말린 베리류 과육의 향과 맛이 지배하는 편이다. 위타드에서는 이런 제품들을 infusion이라는 카테고리로 판매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물보다는 탄산수에 냉침해서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위타드 베리베리 크러쉬

차 선배님들은 왜 자꾸 약이 되는 보이차를 찾는가 했더니

이렇게 빈속이거나 밤 10시가 지나면 대용차들만 열심히 마셔댔더니 속쓰림은 덜해졌지만 뇌가 헛헛해지는 느낌이었다.


차나무 잎을 사용한 평범한 차 중 가장 속쓰림이 덜한 건 아무래도 호지차가 아닌가 한다. 일본에선 새카맣게 볶은 걸 숭늉처럼 아무때나 마셔대지만, 추억보정 없이 굳이 어렵고 비싸게 사올 만한 맛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주저하고 있다. 제주에서 구매한 호지차는 잎도 살아있고 조금 더 고급스러운 부드러운 맛이 나는 편이다. 약간 장르가 다른 맛과 향이고 가격도 그렇다.

제주 다원의 호지차

결국 어르신들처럼 보이숙차로 가야하는가도 싶어 직구를 안할 수 있는 것들로 몇 가지 시도해봤으나 흙이나 지푸라기를 연상케 하는 묵은 뒷맛과 쿰쿰한 향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자꾸 위를 박박 긁어내리는 생차의 풍부한 향에 끌려버리곤 했다. 일단 퍼지는 향을 최대한 가득 코에 머금고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습관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보이생차는 마시다 보면 약초물 마시는 것 같고 은근히 맛있다.

보이차는 대부분 딱딱하게 압축된 덩어리를 칼로 직접 뜯어서 마셔야 하는데 이게 또 게으른 성격과 잘 안 맞는 점도 있다. 이 과정조차 차 마시는 일의 일부로 즐기는 분들도 많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장벽에 가깝다. 오히려 해외직구를 찾으면 큰 덩어리를 해괴하지 않아도 되는 실용적인 형태의 차들이 제법 있지만, 한국은 보이차 수요가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이상 급으로 가면 무조건 357g 단위로만 사야 하는 점이 다소 아쉽다.

보이차 해괴법을 담은 동영상.
왕덕전 보이생차는 딱 엽전크기로 1-2회 음용분에 맞게 압병되어 있어서 실용적이다. 맛과 향도 좋은 편. 그러나 위를 너무 긁어서 자주 마시긴 어렵다….

왠지 이렇게 한참 헤매다 보면 중국차의 정착지는 작년 여름부터 거의 차 백화점이 되고 만 정산당으로 흘러가곤 한다. 어째서 심지어 보이숙차마저 나의 게으름에 딱 맞춰 꿉꿉한 맛이 거의 안 나고 칼로 뜯을 필요도 없는 것을 팔고 있는 것인가… 그 차는 바로바로


정산당 푸롱호 보이숙차(산차) https://lapsangstore.com/products/pulonghao-ripe-puer ​

정산당의 차들이 늘 그렇듯 보이차도 1–2회분 분량의 샘플팩을 팔고 있어서 시음 후 결정해 볼 수 있다.


정산당 푸롱호 시음 컬렉션 https://lapsangstore.com/collections/puer-tea/products/pulonghao-puer-minibag-tasting-collection

향보다 약간 꾸덕하고 단 맛이 나는 목넘김에 집중했더니 숙차도 그럭저럭 마실 만해졌다. 또 위장이 편하고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도는 점이 좋긴 하다. 수면 간섭도 덜한 편이다. 이렇게 입맛과 위장이 타협해가며 어른… 아니 어르신이 되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차와 코리안 프라이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