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나한테만 준 선물
서울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공주행 직행버스를 타고 2시간쯤 지났을까, 난 거의 토하기 직전에 이르렀다. 늘 그랬듯이 타기 전부터 불안하기 시작해서 승차 후에는 태연한 척,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30분 정도 지나면 뱃속이 메슥거린다.
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참다 보면 1시간이 지나가고 거의 다 왔다, 이제 내린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몸에 소름이 돋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 꼼짝달싹 못한다. 버스가 정지하는 순간, 동시에 승객들이 일어서서 내리는 동안 결국 일은 벌어진다. 의자 밑바닥에 고스란히 토해버리곤 개운함에 몸서리를 치고, 그다음 민망함이 죄책감과 함께 밀려든다. 곧 이어지는 엄마의 당황함에 내뱉는 말, 분주하게 수습하느라 움직이는 소리에 둘러싸인 채 처분만 기다린다. 매번 겪는 일이라 그동안 엄마도 손을 안 쓴 건 아니었다. 터미널 약국에 미리 들러 멀미약-마시자마자 뱉고 싶은 끔찍한 맛-을 사서 먹여봤고, 공복이면 멀미를 더 할 수 있다며 집에서 떠나기 전 밥 몇 숟갈이라도 미리 나한테만 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토하기 직전, 내가 매번 경험했던 그 지점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나름 호흡 조절을 무난히 잘하고 있었고, 게다가 옆에 앉은 엄마의 강압적인 경고까지 더해져 마침내 난 깔끔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그날은 큰 외숙모가 외사촌 동생들까지 함께 터미널로 마중까지 나온 날이기도 했다. 난 버스에 내려 그들과 눈이 마주쳤고 바로 몇 걸음 못 가서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버티고 있었다. 외사촌들이 달려와 둘러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 저런 멀미하는구나, 토해볼래? 괜찮아, 토해도 돼. ” 외숙모가 어디서 났는지 비닐봉지 하나를 내 앞에 벌려 놓고 말씀하셨다.
난 갖은 애를 쓰고 참아봤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수치심을 뚫고 토사물이 나오는 동안 걱정스럽지만 따뜻한 시선이 내 정수리에 박혔다.
"저런 참느라고 힘들었겠구나, 괜찮으니까 편하게 더 해 봐". 손수건으로 얼굴이며 입을 닦아주며 말씀하셨다. "이따 외갓집에 가려면 여기서 버스 타고 좀 들어가야 되는데 일단 쉬었다 가보자". 잔잔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뒤집힌 뱃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착한 동생들은 무슨 일인가 궁금한 눈빛만 있었을 뿐, 소란을 떨거나 나를 놀리지는 않았다. 그때 내 나이가 11살이었으니 여자 동생들은 각각 9살, 7살 즈음이었으리라. 남자 동생은 말을 시작하기 전이라 조용했고... 잠시 후 화장실 갔던 엄마가 나타났고 이미 일을 해치운 나를 보고 어이없어하셨다.
공주 출신인 엄마는 뭔가 일을 보고 바로 서울로 갈 예정이었다. 나를 이끌고 외숙모는 터미널 옆 시장으로 데려갔다. 어느 옷가게에 들어가시길래 무얼 사시려나보다 하며 따라 들어갔는데 여아용 백양표 메리야스 2개를 집어 계산을 하셨다. 여름방학 동안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내보기로 한 나는 탐구생활과 필통, 옷가지 등이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외숙모가 아무 말 없이 산 물건을 가방에 넣어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집에서 갖고 온 거 있어요,라고 말할 법도 한데 묻는 말에도 대답 잘 못하던 어린 내가 외숙모가 속옷까지 사서 챙기신 이유를 어찌 알았으랴. 집에서 챙겨 온 메리야스와 동일한 상표지만 신상이었던지 목둘레에 새로운 모양의 자수 레이스가 달린 그것을 난 비닐 포장도 벗기지 않고 나중에 집에 그대로 갖고 왔다.
외할머니 벽장에 두었던 내 가방 속에 넣어두고 이틀에 한 번쯤은 비닐을 뜯고 싶은 유혹을 잘 견디었다. 그것을 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나한테만 준 선물... 서울 올라와서 엄마에게 보이자 놀란 듯이 “이걸 외숙모가 사 줬어? 왜 입질 않고서... ”라고 말했다.
외숙모는 이틀 후 나보다 2살 어린 여자 외사촌만 옆에 붙여주고 가족들과 공주집으로 되돌아가셨다.
내가 심심할까 봐 또 시골 생활도 거의 처음이라 그러셨던 것 같다.
외갓집에는 남부 지방의 전형적인 대청마루 벽, 고개를 올리면 보이는 지점쯤에 액자들이 즐비했는데, 전통 혼례식에서 말을 탄 외삼촌 사진이 보였다. 또 족두리를 머리에 이고 원삼을 입고 있는 사진 속 외숙모 얼굴을 보면서 난 공주 같다, 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렸을 적 안방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하얗게 부푼 베일을 머리에 쓴 서양 여자 인형이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그걸 보고 그린 걸까? 얼굴은 맨 위에 차숟가락 만하게 그려놓고 나머지 종이 한 면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긴 드레스를 입은 공주는 눈이 커다랗고 속눈썹은 빗을 꽂아 놓은 것 같아야 했다. 마루에 걸린 사진 속 외숙모가 내가 그렸던 공주와 닮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외숙모의 조상은 먼 곳까지 높이 거슬러 올라가면 혹시 백인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전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너무 심한 곱슬머리를 가진 여자 이야기를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부모들도 모두 곱슬머리라고 말했다. 대대로 가까운 조상한테 외국인은 전혀 없다고 했다. 어떤 유전자이든 간에 4-5세대가 지나면 발현이 흐려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곱슬머리는 곱슬 강도 분류에서 3c를 받을 만큼 평범하지 않았고 결국 그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유전자 검사까지 받게 했다. 결국 에티오피아 0.02 %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왔는데, 한국인이 아무리 단일민족이라 해도 모두 이런 비슷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DNA 종류와 수치의 정도는 다를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외사촌들도 외숙모 덕분으로 모두 이쁘고 키가 크다. 실제 남자 외사촌은 드라마 도깨비에 출현했던 배우 이동욱과 많이 닮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20년 전쯤 배우 이동욱 사진 10장과 본인 사진을 1장을 섞어놓고 진짜 저를 찾아보세요,라고 본인 미니홈피에 올린 적도 있었다.
아무튼 어렸을 때 우리 엄마였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나에게는 천사 같았던 외숙모는 내가 20대가 지나면서부터 나를 “생질~”이라고 부르셨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 줄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편의 누이 딸을 높여 부르는 말이 생질녀라는데 간단히 부르신 듯하다. 50대 중반인 나를 지금도 전화 통화하면 생질이라고 부르신다. 그때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난 서울로 돌아왔고 몇 년이 안지나 외갓집도 큰 외숙모집도 서울로 이사 왔다. 그 후 명절이나 무슨 날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종종 외삼촌집에 가곤 했는데 우리 가족이 현관에 들어서면 외숙모가 주방으로 빠르게 들어가 쌀부터 씻으셨다. 전기밥통에 밥이 있을 텐데도 새 밥 지어서 주려고 그런 거야,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셨다. 언제 먹어봐도 외숙모의 음식은 정갈하고 맛깔났다. 그런데 까다로운 외삼촌 음식 시중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게 없어서 외숙모도 고생이고 딸들도 난리다.
수년 전 외사촌이 전화해서 말했다.
“언니, 아빠가 같이 여행 가면 되는데 절대로 안 간다, 하시고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 밥 때문에 못 간다, 하고 결국 아빠 드실 음식 해놓고 간신히 엄마만 데리고 가면 꼭 도착한 날 저녁에 혼자 돌아간다니깐, 아빠 아침밥 해야 한다고. 미치겠어, 그놈의 밥이 뭔지... 이번에는 제주도 갔는데 웬걸, 하룻밤 자고 다음날 혼자 비행기 타고 집에 갔어... ”
어느 해인가, 외숙모가 크게 아프셨다. 면역성 저하로 인한 질환이었는데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이라 했다. 걱정되어 외사촌과 통화를 했는데 부들부들 떨면서 내게 말했다. “ 언니, 아무리 내 아빠지만 이해도 용서도 안돼, 엄마 잘못되면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오래전부터 외삼촌은 잦은 외도와 신경질, 유달리 깔끔하고 잔소리 많은 성격 탓에 외숙모를 정신적으로 지치게 하셨다. 외숙모는 오랜 시달림에 극도의 불안 상태에 이르렀고 안정을 위해 정신병동에 20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하시고 얼마 안 되어 몸에 이상이 생긴 거다. 외사촌이 울먹이며 이어서 말했다.
“ 엄마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을 때 면회를 갔는데 엄마가 나도 몰라보더라고... 진정제를 얼마나 먹여놨는지 멍한 얼굴로, 초점 없는 시선으로 집에 가게 해 주세요, 가고 싶어요, 그 소리만 계속하는 거야... 내가 가슴에서 뜨거운 눈물이 차오르는데, 진짜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근데 지금 몸까지 저렇게 아프니까... 앞으로 명절이고 추도식이고 다 필요 없어... 오지들 말라고 해... 우리 엄마, 이제 더는 못해... 못하게 할 거야...”
그 뒤로 집집마다 알아서 하기로 하고 모여서 하는 명절이나 추도회는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우리 친정도 마찬가지라고, 아무한테나 말하고 싶었다.
이 일보다 훨씬 더 전의 일이지만 막내 외삼촌이 고관절 수술로 병원에 있다가 퇴원했는데 외숙모가 밤새 집에서 손수 끓여 우려낸, 사골국물이 담긴 들통 통째를 전철 타고 날랐다, 고 들었다. 무려 1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앞집에도 있고 뒷집에도 있을 것 같은 이런 여인들이 참 많다. 그 여인들이 이젠 와상 환자로 요양원에 누워있거나 돌아가시고 없다. 그 여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혜롭고 현명했으며 가정을 온전히 지켜냈다. 매일 자식들 세끼 밥을, 도시락을 꼬박 챙겼다. 그 수많은 여인들의 헌신과 희생이 더 이상 미덕으로 거듭나지 않기를, 하지만 뜨겁게 감사한다. 옆에서 보고 배운 게 그런지 나도 손목이며 허리며 온전하지는 않지만 나름 잔머리 써가며 엄마 자리를 지키고는 있다. 하지만 그 강도와 양은 엄마 세대에 비하면 경상도말로 정말 택도 없다.
휴일에 내가 늦잠이라도 자면 얌전히 라면 끓여 먹고 게임하며 놀고 있는 남편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늙은이가 됐을 때 이런 여인들이 제발 주변에, 아니 이 나라에 많이 없기를 바라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