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태어난 여인

4화 내가 만든 이름 짝엄마, 친숙모

by 개똥이엄마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리나케 숙제부터 마쳤다.

특별히 할 일이 있어 바빴던 것도 아닌데, 습관이 그랬다.

아마 불안장애 같은 게 이미 있었던 것 같다.

그날도 책가방까지 다 싸놓고 할 일없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집에는 나 혼자였고, 엄마는 여느 때처럼 옆집에서 동네 아줌마들과 화투를 치던가, 음식을 만들어 다 같이 먹던가, 뭐 그랬을 거다.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났고 곧장 나는 문을 열었다. 몇 달 전 쿠웨이트에서 돌아온 삼촌이었다.

“ 어, 삼촌? 웬일이야. ” 반갑게 웃으며 맞이하는데, 삼촌 뒤로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현관에서 두세 개 정도 계단 밑에, 아담한 여자가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쑥스러운 듯 서있었다.

나도 똑같이 부끄러워하며 어서 오세요, 하고 겨우 한마디 내뱉고는

“엄마 데리고 올게, 삼촌. 기다려” 소리치며 바로 내뺐다.

우리 집은 연립주택으로 가, 나, 다 동이 나란히 있었는데 바로 옆동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곳을 내달리며 난 별생각을 다했다.

‘사진 속 그 여자? 맞아, 웃는 얼굴이 똑같아, 무슨 일이지? 내가 인사를 어떻게 했더라? 하, 근데 이쁘다...

애인이야, 삼촌 애인... 와, 그럼 삼촌이 결혼을?’ 심장이 쿵쾅거렸다. 흥분해서 들뜨고 열굴에 열기도 느껴졌다.

삼촌이 한국에 오고 얼마 뒤 집에 사진 한 장을 내놓고 간 적이 있었는데 그걸 할머니와 내가 같이 보았다.

사진 속에는 어딘지 모를, 이국적인 꽃들이 울긋불긋 가득했다. 한가운데 젊은 여자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실제로 외국에서 찍었다고 했다.

“ 웃는 모습이 이쁘다, 인상이 아주 참하고, 보기 좋아...”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엄마를 불러놓고 집에 돌아오자 삼촌이 싱글벙글해서 애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내 방에 들어앉아 부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엄마는 곧 왔고 삼촌 애인에 대해 이미 아는 게 있는 듯 보였다. 주방에서 엄마가 나를 찾았고 귤 담은 쟁반을 내게 밀었다.

“커피 탈 거니까 이거 먼저 가져다 놔” 안방에 들어가자 두 사람 모두 나를 바라봤고 난 긴장하며 쟁반을 바닥에 내려놨다. “맛있게 드세요...” 엉거주춤 앉아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나오는데, 그런 모양이 우스웠던지 삼촌이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껄껄 웃었다.

그날 이후로 예비 작은엄마는 집에 자주 와서 놀다 갔다. 어느 날은 늦어서 내 방에서 자고 간 적도 있었고, 암튼 오빠나 나에게 삼촌애인은 집안의 뉴~페이스였다.

늘 보던 친척어른들이 아닌 젊고 예쁜 여자가 등장하자, 만나면 괜히 신나고 즐거웠다. 게다가 작은엄마는 잘 웃고 밝은 사람이었다. 항상 뭐든 재밌게 얘기를 잘했다.

어느 날은 오빠에게 가요 하나를 불러주고 가사를 공책에 적어주며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노고지리의 찻잔이었다.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 끝이 따뜻해 온몸의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가사가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노랫말이다.


몇 달이 지나고 삼촌과 예비작은엄마는 결혼식을 올렸다.

12월 중순, 집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사거리에 있는 신림예식장이었다.

그날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전날 친척들은 우리 집에 다들 모여 잠을 잤다.

일부 어른들은 일찍 떠났고 무슨 일이지, 나, 할머니, 작은집의 사촌동생만 뒤처졌다.

남부순환로 도로변 건물 뒤편이 바로 우리 집이었는데, 내 방 창문에서 버스정류장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창 밖 거리에는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버스고 택시고 타고 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계획은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거였다. 잠깐 뒤처지는 사이 그렇게 돼버렸다.

밖으로 나와보니 남부순환로 양방향이 그냥 빈 운동장처럼 쭉 펼쳐져있었다. 횡단보도도 중앙선도 눈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조용했다.

할머니는 한복 두루마기에 고무신, 나와 사촌동생은 장화를 신고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고 도로 한복판을 걸어서 예식장에 도착했다. 눈을 많이 맞은 지라 나는 가족사진 찍을 때 얼굴이 발그스름해서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그 해 겨울 나는 10살이었고 작은 엄마는 25살이었다.

결혼식 후, 한 달도 안 돼서 삼촌은 다시 쿠웨이트로 갔다.

혼자 살게 된 작은엄마는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살았고, 삼촌의 부재로 엄마 아빠도 자주 그곳을 왕래했다. 아빠가 작은엄마집 주방 입구에 커튼을 달아주고 우리 식구 다 같이 비빔국수를 얻어먹고 집에 온 적도 있었다.

특히 작은집의 사촌동생은 작은엄마와 한동네 살아서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난 몹시 질투가 났었다.

어느 날은 5백 원 지폐까지 챙겨 작은엄마집에 놀러 간 날 생긴 일이다.

아직 추운 겨울이었고 개학은 며칠 남았다. 근처 작은집의 사촌오빠와 남동생까지 셋이 모여 관악산 밑에 얼어붙은 계곡에서 썰매를 진탕 타고 놀았다. 일반 평평한 땅에 물을 붓고 얼려서 만든, 돈 받고 한철 문 여는 썰매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경사가 있는 데다가 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곳곳에 박혀있는 바위를 피해야 하는 스릴이 기가 막혔다.

사촌오빠, 동생, 둘 다 내가 용돈이 넉넉할 걸 알고 있었고, 집으로 가는 길에 떡볶이와 뜨끈한 어묵을 내가 사겠다,라는 약속까지 이미 한터라 형제는 내 썰매 뒤를 열심히 밀어줬다.

어둑한 동네 포장마차에 들어서니 떡볶이며 어묵, 튀김 등이 잘 전시되어 있었고, 그곳이 사촌들은 익숙한 듯 주인아줌마와 인사도 나눴다.

그때 아줌마는 도넛을 열심히 튀기고 있었는데 찹쌀 반죽 속에 팥앙금을 넣고 탁구공보다는 좀 더 큰 동글동글한 모양의 도넛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난 얼마예요?라고 다짜고짜 물었다. 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었을 작은엄마가 생각났다. 괜히 미안하고 빨리 사서 갖다 주고 싶었다. 좋아할 작은 엄마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더 급해졌다. 한 봉지에 5백 원이라 했다. 난감한 나는 내 욕심만 챙기기로 하고 사촌들에게 약속한, 떡볶이에 어묵을 같이 먹겠다는 생각은 냅다 팽개쳤다. 옆에서 다급해진 사촌오빠가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야, 떡볶이가 한 접시에 100원이고 어묵도 1개씩 다 먹고도 남는 돈인데 왜 도넛을 사, 왜?”

난 망설이다가 미안한 듯 말했다.

“아니, 작은엄마 사다 주려고... 작은엄마집 가서 같이 먹게... 나도 저 도넛 좋아한다고...”

실망한 형제가 어이없어하며 원망의 소리를 마구 했다.

‘쳇... 사촌동생 저 자식도 작은엄마라면 냉장고에 있는 과일까지 다 털어 갖다 주면서... 나한테 왜 저 난리야...’ 하지만 내가 치사빤스였던 건 맞다. 주인아줌마는 슬슬 사촌들 눈치를 봐가며, 그래도 돈을 쥐고 있는, 어린 손님인 나에게 친절히 웃으며 말했다. 설탕 뿌릴까?

욕을... 욕을 해대는 소리를 뒤로 하고 도넛이 식을까, 종종걸음으로 작은엄마 집에 돌아왔다.

예상대로 작은 엄마는 기뻐했고, 용돈을 다 털어 도넛을 사 온 나의 용기에 감탄했다.

사촌들과 있었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맛있게 먹으며 환하게 웃는, 나를 바라보는 작은엄마의 얼굴을 보며 사촌들 앞에서 좀 치사했던 내 행동은 도넛과 함께 목구멍으로 쓸어버렸다.

겨울방학이 끝났고 봄이 찾아왔다. 작은엄마도 우리 집에 자주와 있곤 했는데, 삼촌도 없이 혼자 있는 젊은 새색시를 염려하는 엄마, 아빠의 반강제적 조치였다.

집에서 허군헌날 방바닥에 붙어 있는 나에게 여전히 작은엄마는 좋은 친구였다.

어느 날은 전화 통화를 하며 거실에 서 있는 작은엄마를 보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엄마 홈드레스를 빌려 입은 작은엄마의 배가 살짝 볼록했다. 어리지만 그게 뭔지 알아챘다.

“작은엄마. 아기 가졌어? 왜 배가 나왔어?” 작은엄마가 후후 웃으며 “몰랐구나? 작은엄마 아기 가졌어”.

“와,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 꼭! ” 곧 작은엄마가 “아냐, 아들이어야지...” 하고 작게 말했다. 이해가 안 됐지만 섭섭했다.

‘왜 안되지, 난 여자 동생이 좋은데...’ 남자 사촌들만 잔뜩 있는 집안에서 그들과 선머슴처럼 노는 것도 지겨웠다. 같이 인형놀이를 하고 싶었다. 여동생과...

그 해 여름, 8월에 작고 까무잡잡한 여자 아기가 태어났다.

몇 달 모아놓은 2천 원을 들고 연립주택 정문 바로 앞에 있는 이불집으로 들어갔다.

새로 태어난 아가의 선물을 살 참이었다. 가게 주인아줌마야 이미 엄마와 많이 드나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쥔 돈이 얼만지 알고 나서 아줌마는 진열대에서 작은 턱받이를 꺼냈다.

“이거면 살 수 있어, 그 돈으로는 살 게 이것밖에 없겠는걸? ” 개나리색 바탕에 가운데 병아리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 턱받이였다. 500원을 깎아줘서 1500원을 내고 나왔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보이자 “ 이제 태어났는데 이걸 언제 하냐.. 더 커야 쓰겠는데? ”

서랍에 두었던 포장지를 꺼내 턱받이를 잘 쌌다. 토요일이 되면 가서 아가도 보고 선물도 줘야지...

설레며 며칠을 보내고 드디어 내가 바라던 여동생을 만났다. 작아서 안아보지도 못했던 그 아기가 이제 40이 넘었다. 작은 엄마가 꿨던 아기 태몽이 지금도 선명하게 생각난다. “내가 아주 커다란 감나무 밑에 있었는데 말이야, 감 하나가 어찌나 색이 곱게 매달려 있는지, 옆에 있는 삼촌한테 오빠, 나 저것 좀... 저 감 좀 따줘, 나 갖고 싶어, 하며 안달을 냈거든. 삼촌이 얼른 그 감을 뚝 따서 손에 쥐어줬는데 어찌나 묵직하고 크던지, 감탄하며 보고 또 봤어”라고 말했다. 세월이란 과거의 일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또렷한 기억들, 냄새, 맛... 아무튼 그 감 태몽 덕일까?

사촌 여동생은 오랜 유학 끝에 명문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과학자가 되었고, 지금은 제약회사 대표가 되어 있다.

멀리 타국에 있는 삼촌을 위해 엄마와 작은엄마는 출산 전 과정을 테이프에 녹음을 해서 소포로 부쳤다. 삼촌은 보지도 못한 자신의 첫 딸 이름을 지어 편지로 보냈고, 아기가 더 자라 5개월쯤 됐을 때 귀국했다.

학창 시절부터 글씨와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던 삼촌 덕에 나를 비롯해 조카들은 삼촌 화집을 보며 자랐다.

총각시절 외국에 나갔을 때, 엄마에게 형수님 보세요, 로 시작하는 편지 속 글씨는 진짜 명필이었다.

멋을 부리며 옛날 세로 쓰기를 하여 편지지 오른쪽부터 글을 써서 보낸 적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걸 가지고 다니며 연립주택 사람들에게 며칠을 자랑하고 다녔다. 삼촌은 가끔 집에 커피 가루를 왕창 보내거나, 나에게는 때가 되면 사진과 크리스마스 입체 카드를 보내주었다. 아직도 그 카드는 내 앨범에 들어있다.

한 번은 그 나라 여자들이 쓰는 두건을 잔뜩 보내왔다. 엄마가 골고루 나눠준 탓에 얼마동안 동네 아줌마들이 죄다 그 두건들을 하나씩 머리에 쓰고 다녔다.

귀국 후에 삼촌네 가족은 당산동으로 이사 가서, 그 동네에 제법 큰 고깃집을 차렸다.

가게 입구 옆 유리창에는 암소갈비 전문이라고 큼직한 글씨가 박혀있었다. 가족들 중 식당을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촌이 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어른들 중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얼마 안 가 주방장도 나가고 일하는 사람들도 없어지고 삼촌이 주방에 들어가 설렁탕을 펐다. 같은 공간에서 장사하는 부부가 할 일이 싸움밖에 없는 건가, 장사가 안 되는 탓도 있었겠지만, 삼촌 내외는 의견충돌에,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둘이 사네, 못 사네, 지경에 이르러 천안에서 작은엄마의 친정어머니까지 오셨다.

나는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식당에 할머니, 엄마, 삼촌 부부가 한밤중에 모였다, 고 들었다.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뒤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다.

그날밤 사돈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들 안 맞아 못 산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그만 살던지 무슨 구정을 내야지... 둘 다 욱 하는 성질이 똑같아서... 하는 말씀에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 글쎄,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다니까요, 내가!!! ” 엄마한테는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그렇게 노기 가득했던 모습은 처음 봤다, 했다.

딸 가진 집에서 왈가왈부할 필요 없다는, 시어머니 권한이었을까?

그렇게 치고받고, 죽여 살려, 하면서도 사이가 좋을 때는 한없이 좋았고, 또 끔찍이 서로를 위했다.

각양각색이며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들만의 서사가 존재하는 곳이 사랑이라는 지점인 것 같다. 알다가도 모를 것이 남녀사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뒤로 삼촌의 사업은 옷장사를 비롯해 뭐 이것저것 몇 년 하다가 이번엔 이라크로 떠났다.

3년을 넘는 시간 동안 작은 엄마는 딸 둘-삼촌 첫 딸이 7살이 되고 둘째 딸이 태어나 5살이 되었다- 을 데리고 친정인 천안에서 살았다. 그래도 명절 때는 어김없이 사촌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어느 해인가, 내가 고1이었을 때, 막내 삼촌이 결혼을 했고 막내 작은 엄마가 시집 온후 첫 명절, 추석을 우리 집에서 맞았을 때 일이다. 차례가 끝났고, 새 식구 환영으로 점차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아빠를 비롯해 작은아버지들이 아무래도 막내 작은엄마에게만 관심이 쏠리자 작은엄마가 살짝 서운했었나...

“어머, 제가요, 지금까지 시댁에서 제일 사랑 많이 받았었는데... 막내 동서가 시집오니까, 이제 제 시대는 갔네요. 호호호...”

잠시 후 내가 생일 때 오빠한테 선물 받은 김완선 테이프를 거실 전축 플레이어에 넣어 재생했고, 춤 잘 추는 삼촌 딸, **가 김완선 웨이브 춤을 제대로 췄다. 곧 작은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방은 멀리 있고 얘 둘 데리고 큰집 와서 이제 얌전 떨고 앉아있을 이유도 없고... 막내 동서 들어온 기념으로다가 제가 춤 한번 출게요, 에라 모르겠다~ ” 하며 엉덩이를 세차게 흔들고 지르박을 췄다. 막내작은엄마보다 오히려 작은 엄마가 화끈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그런 작은 엄마를 모두 잘한다, 잘한다, 하며 손뼉을 쳤다.

맞다. 작은 엄마는 삼촌 없이도 씩씩했다. 식구들 앞에서 늘 명랑하고 유쾌했다.

가족 모두가 작은 엄마를 좋아했고, 없으면 허전해했다. 거의 시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아빠는 작은 엄마를 제일 아꼈다.

삼촌이 몇 년 후 돌아왔고 이번에는 큰돈을 벌어와 아파트도 마련하고 큰 딸, **에게 약속한 피아노도 사주었다.

내가 20대가 되어서도 삼촌 부부는 이따금씩 사네, 안 사네를 반복했는데 작은엄마는 그때마다 우리 집에 하루나 이틀씩 머물다 가곤 했다.

그 후로 한국미술협회에서 호당 가격이 산정되기 전까지 삼촌은 작품 활동보다 돈벌이에 가까운 일을 더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안정된 살림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작고, 큰 고비들이 있을 때마다 작은엄마는 나가서 돈 버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문화센터 수영장 셔틀버스 운전기사부터, 하나로 마트 매장 직원, 알로에 화장품 판매까지...

눈앞에 닥쳐버린, 나를 시험하나 싶게... 되돌아갈 수도, 앞으로 내딛기도 짜증 나는 삶을 작은엄마는 당당하게 잘살았다. 나 같으면 그냥 바닥에 머리를 콱 박고 꼬부라진 채 자빠져있었을 텐데,,,

내가 결혼을 하고 몇 년 뒤 출산을 하자 작은엄마가 사촌동생과 케이크를 사가지고 병실에 찾아왔다.

“작은엄마가 50이 됐다고? 아니, 25살에 시집와서 말이야, 말이야, 어? 아니, 벌써, 그게 말이 돼?”

작은엄마 양쪽 뺨을 두 손바닥으로 내가 감싸며 장난하듯이 말했다.

“그래, 작은엄마 50 넘었어, 슬퍼... 되게 슬퍼...”

애 낳고 누워있는 병실에서 작은엄마는 잠시 있다가 살짝 눈물을 훔치고 갔다.

갑자기 응급수술하고 어렵게 애를 낳은 내가 안쓰러웠던 걸까... 뭐가 작은 엄마를 슬프게 했을까...

몇 년이 더 지나고 삼촌과 작은 엄마는 사촌동생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가 꽤 오래 머물면서,

며칠을 자동차로 대륙 횡단을 했다. 고생도 많았을 텐데 두 분 다운 여정이었다.

가끔 전화해 아이의 옷 사이즈를 묻곤 했다. 나한테만 물어본 게 아니었으리라.

여름 끝이 보이기 시작한 즈음, 주말 저녁, 남편과 아이까지 셋이서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하루, 이틀 상관으로 통화를 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어, 왜, 엄마?” 하고 받았는데, 엄마는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내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다그치자, 엉엉, 진짜 엉엉 울었다.

“작은엄마가 아프대... 암 이래, 폐암... 거의 말기란다.”

평온했던 저녁시간이 엉망이 되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엄마는 며칠을, 그것이 가엾어서, 아주 가여워 죽겠다... 그 소리만 하고 식사도 잘 못했다.

작은 엄마는 그전부터 엄마가 아플 때마다, “ 형님, 빨리 나아... 좀만 기다려, 내가 호강시켜 줄게, 우리 **가 곧 잘 될 거야, 그러면 내가 형님 돈 많~이 줄게... 알았지요? 호호호호” 그렇게 말했었다.

작은엄마는 자신의 넓은 정원에서 파티를 열었다. 항암치료 들어가기 전, 그래도 팔다리 멀쩡하고 정신 온전할 때 식구들 밥 해먹이고 싶다, 고 말했다.

“이렇게 이쁜데, 왜? 어디가 아프다는 거야?, 어?”

내가 삼촌집에 도착해 마당에 들어서며 현관 앞에 서 있는 작은 엄마의 얼굴을 부여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작은 엄마는 그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전에 키웠던 시베리안 허스키 개 한 마리가, 설원을 뛰어다니던 유전자가 발동했나... 하도 정원을 뛰어다녀 잔디가 다 벗겨진 흙바닥이었지만,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모두 여느 때와 같이 왁자지껄 떠들고 먹고 마셨다.

엄마가 나중에 얘기해 주었다. 그날, 정원에 다 같이 모였을 때 엄마 옆에 삼촌이 앉았었는데, 엄마 귓속에 대고 ‘형수, 5년은 살 수 있대요... 아주 다행인 것처럼 삼촌이 말했단다.

아, 5년... 난 내가 늙어서도 오래도록 작은 엄마를 볼 줄 알았다. 나눌 얘기도 할 이야기도 많은데, 고작 5년이라니... 하지만 삼촌은 그 5년도 감사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20대, 학교를 졸업한 후 전공 따라서 유치원에 취업을 했는데, 내가 너무 힘들어하자, 원하면 유학을 보내주마, 하고 아빠가 퇴직 후 약속했다.

어학원을 알아보고 돈도 벌면서 시간을 보내던 중 집이 폭삭 망했다. 아파트며 아빠 퇴직금이며 모두 날아갔다. 난 유학 대신 편입이라도 하겠다고 어렵게 공부해서 학사편입을 준비했고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그 정도는 아빠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묵묵부답이었고 엄마도 나서질 않았다. 등록금 납부기한 전 날 밤, 난 울면서 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촌도 할 말이 없는지 한숨만 내쉬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때 당시 삼촌네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가 돈을 마련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아는 선배 직장 앞으로 해서 여기저기 얻으러 다니던 중에, 거의 등록 마감시간이 다 돼버렸다.

급한 마음에 일단 은행으로 들어갔다.

좀 만 더 채우면 되는데... 어떻게 안 되는 일인가... 포기해야 하나, 망설이다가 마지막으로 작은 엄마에게 전화했다.

작은 엄마가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야, 어디야? 너 돈은 만들었니?,

작은엄마, 지금 은행인데 네 계좌 좀 불러봐, 얼마 송금하면 돼?”

몇 분 안 남기고 간신히 학교등록금을 이체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들었다.

작은 엄마도 전날 삼촌에게 얘기를 듣고 다음날 아침부터 돈을 구하러 다녔다, 한다.

“이곳저곳 돈 얘기해서 만들어가지고, 급히 은행문 들어서는데 그때 네가 딱 전화를 한 거야, 그때...”

작은 엄마는 항암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이쁜 가발을 맞춰 쓰고, 장고를 배우고, 소리도 같이 불렀다. 마니산에 가서 패러글라이딩도 탔다.

어느 날 전화를 했더니, “ 어, 산이야 지금, 등산 중이야, **야, 얼마나 다행이니, 내가 몸져누워서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하는 그런 병이면... 지금처럼 다니지도 못하고, 이게 훨씬 낫지... 할 것 다하고,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작은엄만... 호호호”

삼촌은 신약이 나오면 그게 몇 천만 원이든 간에 사서 작은 엄마에게 바쳤다.

희한하게 약 살 값이 없으면 그림이 팔렸다, 했다. 다음번엔 어쩌지, 하면 일이 들어왔다, 했다.

삼촌, 작은 엄마의 둘째 딸 **가 결혼을 했다.

사촌동생이 작은 엄마를 안고 엄청 울었다. 신랑이 연예인이라 알만한 사람들이 제법 북적였다. 연예인 얼굴 구경하랴, 아이를 앞세워 사인이라도 받을까. 고민하랴, 또 사촌 동생 쳐다보고 울다가, 뭐 그러다가 거의 디너쇼 같았던 긴 결혼식이 빨리 끝났다.

얼마뒤 작은 엄마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말했다. “형님, 내가 돈 잡아먹는 귀신이야,

약 값이 한 알에 8만 원이야, 이걸 하루에 몇십 개 먹어요... 이렇게 돈을 쓰고 앉아있으니 그냥 깨끗하게 죽는 게 나아요... 아프고 나서도 잘 먹고 잘 살았어, 이 정도면 됐지 뭐...” 몇 달 뒤, 작은 엄마가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동안 매번 심각했지만 잘 넘겼다. 하지만 이번엔 넘어가지 못했다.

내 삶의 마지막 마침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그 고독한 시간을, 누구 하고도 나눌 수 없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무슨 소리가 들릴지... 자궁 속처럼 고요했을까?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한 사람씩, 시간별로 면회가 허용된 그 짧은 시간, 내 순서가 되었고 담담히 작은 엄마를 바라봤다.

작은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들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기회라도 놓칠까 봐 서둘러 인사를 했다.

“사랑해, 애썼어요... 그동안 고마웠어... ” 작은엄마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거의 뇌사 상태였던 작은엄마가 소생하기를 바라는 가족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난 조용히 혼자 이별하고 있었다.

작은 엄마하고 추억이 남달랐던 오빠는 거의 매일 병원에 가서 지키고 있었다.

작은엄마는 보름이 안 돼서, 지금 내 나이보다 두세 살쯤 더 됐을까. 흔해빠진 60세도 안되보고 우리 곁을 그렇게 떠났다.

삼촌이 말했던 5년이 무색하게, 3년 정도 우리 곁에 있었다.

입관할 때 막내 삼촌 아들인 **는, 작은엄마가 누워있는 침대에 올라가 끌어안고 버둥거리며 엄마, 엄마, 하고 울었다. 딸만 둘이던 작은엄마가 내 작은 아들~ 하고 부르면서 어릴 적부터 끌어안은 조카였다.

“작은엄마, 있지, 애기가 막 울거나, 아님 오줌 기저귀면 내가 어찌해 볼 수 있을 텐데...

만약에 똥이면 내가, 작은 엄마~라고 안 부르고,

빠르게 “짝. 엄. 마.!!! ” 이렇게 크게 부를 테니까, 그땐 정말 급한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빨리 와야 돼, 알았지?”

”어, 어, 알았어... 그렇게 부르면 얼른 올게, ~“ 욕실에 아기 기저귀며, 주방에 젖병이며 할 일이 많아서, 작은 엄마가 나에게 아기를 맡겼을 때, 혼자 있으려니 겁이 나서 한 말이다.

“그리고 친숙모~ 하고 이렇게 천천히 부르면 급한 건 아니고 아기가 깼던지, 별일 아니고 조금 칭얼거릴 때. 그러니까 그땐 천천히 와도 돼...”

내가 만든 이름, 짝엄마, 친숙모...

할머니, 아빠와 같이 작은엄마... 나중에, 진짜 나중에 만나요.

나 좀 늦게 데려가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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