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어머님의 우라질
내가 시집온 지 5년째 되던 해 있었던 일이다.
시어머니는 오래 사시던 상도동 집이 재개발로 팔리자 지은 지 얼마 안 된 빌라로 곧 이사하셨다.
전 상도동집은 남편이 아기 때부터 살던 한옥집이었고 그 후로는 없었던 집들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처음 하시게 되었다. 친척분들이 모이지만, 사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모두가 시가 사람들이었다.
남편에겐 고모들, 고모부 되는, 전부 다해서 네 분이었다. 아직 아기가 없던 나는 며느리들 중 간택? 되어 그날 온종일 부엌시중에 또 오시는 손님들로부터 전화가 오면 큰길로 마중 나가 차에 태워 오르내르기를 3번 했다.
어머니 역시 며칠 전부터 당신 나름 몸과 마음이 수고스러웠을 터 그 와중에 동네 아귀찜집에서 일하시는 분까지 모셔와 조리법을 나한테 익히게 하셨다. 생각보다 간단해서 별문제는 없었다.
부산하게 몸을 움직이시면서 어머니는 그만 소금통을 살짝 쏟으시고는 바닥에 걸레질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허허... 호호... 깔깔... 웃으시더니 문화생활하려니 힘드네 호호호호....”
평생 한옥집에서 사신 터라 아파트 같은 실내생활이 낯설고 신경이 쓰이신다는 어머님만의 자조적인 말투가 느껴졌다.
어머니의 지난 삶도 그러했으리라. 그렇게 버티셨으리라 생각한다.
어머니는 유난히 피부가 희고 우유처럼 뽀야셨다.
이마도 단정하시고 코도 잘생기셨다. 어머니가 낳으신 6남매의 코를 보면 다 벌렁코 모양인데 우리 남편만 어머니 코와 비슷하게 반듯했다.
1932년생이시고 그 시절 있는 집에서 태어나신 어머니는 내가 시집온 첫해 추석 아침 차례상에 오를 식혜에 꽃모양 대추를 동동 띄우시며 말씀하셨다. “친정에서 부모님한테 배울 건 다 배워왔어... 이것저것... 시집와서 써먹을 일이 없어서... 안 하고 살았지... ” 저민 대추가 접혀서 몇 번 칼질에 꽃모양이 되는 걸 보고 감탄한 나에게, 또 이제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어머니 마음이셨을게다. 친정에서 오롯이 배운 것을 해볼 새도 없이 지나간 세월 속에 그간의 집안 사정도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목소리가 잔잔하고 평소 큰소리 내어 자신의 의견을 내놓는 분이 아니셨다.
명절날 다 같이 앉아서 너나 할 것 없이 떠드는 속에서 조용히 계시다가 모두 박장대소하면 지금껏 다 알아들으신 것처럼 크게 따라 웃으셨다. 거기다가 남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하시는 분이라 화내시는 건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큰 아주버님과 내가 있던 자리에서 다른 사람 얘기로 조금 언성이 높아지신 적이 있긴 했는데, 사실 그 정도면 평소 내 목소리 톤이다. 아주 나중에야 그게 크게 노하신 거라는 걸 알고 적잖이 놀랐다.
녹녹하지 않은 세월을 등에 지신 어머니한테 억세고 고약한 노인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냥 부드럽고 말캉한, 슴슴한 떡 맛처럼 어머니는 그런 분이었다. 주변 아는 이들, 자식들, 며느리들, 손주들이든 간에 걔 중의 모자란 됨됨이를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하시며 그 사람 수준에 맞추어 상대했고 또 나름 뭐든 잘한 일이 있으면 용하다 하고 칭찬하셨다. 사람 마음 상하게 하여 당신 주변에 뒷말이 돌아다니게 하는 일은 없게 하셨다.
아무튼 큰고모 내외분과 둘째 고모, 막내 고모님이 순서대로 도착하셨고 이내 음식들이 부지런히 차려져 한상이 되었다. 잡채, 아귀찜, 밑반찬들, 그리고 어머니의 북어찜-아직도 그 맛을 떠올릴 수 있다. 간이 세지 않은 어머니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북어찜은 은은하니 고소하고 감칠맛까지 더해져 항상 입맛이 당겼다.
손맛 좀 있는 친정엄마도 가끔 “너희 어머니 북어찜이 참 맛있는데... 어찌하시는지 해봐도 그 맛이 안나...”
언젠가 여쭈어보니 비결이랄 것도 없다는 듯이 선선히 말씀하셨다. “난 여기다가 포도즙을 넣어, 설탕 안 넣고...”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 그것은 그분의 성정에서 오는 손맛이었다. 마음에 뭘 채우고 사시는 분이 아니었다. 넘침도 없고 부족한 듯 무심히 섭섭하게 사시는 분이 내는 맛이라고나 할까.
언젠가 티브이에서 진짜 손 맛이 있다고 들었다.
집밥이 맛있는 이유를 어느 학자가 말했다. 자식들에게 남편한테 맛있게 먹이겠다는 그 정성이 손 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마치 호르몬처럼...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나는 자주 믿는다.
암튼 북어찜에 이어 상 옆 바닥에는 삼겹살이 구이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고 있었는데, 좀 의외이긴 했다. 보통 불고기나 갈비찜이 상에 올라가지 싶은데 말이다.
이것저것 나르고 있는 나에게 고모님들이 돌아가며 내게 말씀하셨다.
막내 고모님이 “이거 아귀찜 말린 거로 한 거지?” 둘째 고모님이 “생물 아닌데...” 큰 고모님이 “우린 말린 아구는 못 먹는다, 안 먹어. 질겨서 이걸 어이구... 음...”
어머니는 주방에 서서 잠시 보시는 듯하더니 곧 몸을 돌리셨다. 아구는 주방장 아줌마가 식당에서 파는 것을 손질해 왔던 것으로 씻는 것부터 내가 만졌다. 말린 아구는 본 적 없지만 물컹한 생물은 맞았다.
살짝 당황도 하고 긴장도 하면서 이게 말로만 듣던 고모님들 횡포? 인가 싶었다. 사실 이 자리는 고모님들이 어머니께 집들이하라고 떼들을 써서 생긴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막내고모님이,
“얘, 아가, 소고기는 없나 봐... 난 돼지 고긴 안 먹어.. 아니 그렇단 얘기야. 뭐 그렇다고...” 내가 “아, 네, 고모님 잠시만요, 어머니~ ” 하고 주방 쪽을 향해 내가 부르자 고모님들이 “얘, 아나, 아냐, 그냥 둬, 아니야” 하시며 손사래들을 치셨다. 동시에 내가 “어머니, 고모님이 소고기 찾으시는데요, 없으면 사 올까요?” 난 짐짓 거실까지 들리게 말했다.
어머니 왈... “뭐? 소고기? 소고기를 찾어? 이런 우라질... 주는 대로 처먹을 것이지...” 작지 않은 음성이었다.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귀가 먹지 않은 다음에야 모두 들었을 터다.
왓!!! 이건 무슨 소리??? 어. 머. 니. 가. 우라질이라고 말씀했다.
시집와서 처음 들어봤다. 처. 먹. 은 또 어떻고... 난 거실 쪽을 흘깃했다가, 어머니 얼굴을 살폈다가, 눈알이 연신 왔다, 갔다 했다. 거실의 고모님들 기색부터 보아하니 다들 들으신 게 분명했다. 일순간 정적을 난 이미 느꼈기 때문이다. 얼른 종종거리고 거실로 나와 “나가서 좀 사 올까요?”하고 묻고 고모님들 눈치를 봤다. 큰고모님이 “아냐, 아가, 괜찮다 괜찮아,...” 하셨다. 이어 둘째 고모님은 가만히 계셨고 치매가 살짝 시작된,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퇴직하신 큰 고모부는 조용히 식사만 하고 계셨다. 서먹한지 막내고모님은 어머니께 이번에 참기름은 짰냐, 있으면 한 병 달라, 또 상 위에 나물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언니 나 이것 좀 주우, 가져가게 응?” 하시며 늘 하던 모양 응석을 부렸다.
어머니는 분명 의도적으로 말씀하셨던 처럼 보이진 않았다. 정말 무심코 나온 말 같은데 그동안 켜켜이 쌓인 그 뭔가가 실린 듯... 그 뭔가는 안 봐도 뻔하다. 남편이 7살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후로 시부모에, 시집 안 간 고모들 뒷바라지로 홀로 사신 어머니였다.
남편과 연애시절 당시 국회의원들 허튼짓에 티브이고 신문이고 연일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둘 다 버스에서 신문 보다가 막 내렸을 때 남편이 말했다.
“이런... 어휴... 총 있으면 다 쏴버려야 돼... 우라질... 중얼중얼...” 그때 난 우라질이 욕도 아닌 것이 암튼 예스럽다고 생각했다. 이어 그 단어가 좀 우습다고 내가 말했다. 잠자코 듣더니 그이가 하는 말이,
“우라질은 우리 엄니가 하시는 최고의 욕이야...”
그렇구나, 했는데 수년 후 어머니의 그 최고의 욕을 집들이 현장에서 내가 처음 들었다. 그 후 어머니의 그 우라질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20년여 동안 들어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함께 있었을 때는... 결국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어머니의 우라질이었다.
“어머니, 거기서 편안하시죠?”
이런, 우라질...이라고 내뱉을 일 없는 그곳에서 내내 평안하시길... 어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그리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