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태어난 여인

6화 은아 언니네 아줌마

by 개똥이엄마

우리 집이 폭삭 망한 후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던 아파트 단지 상가에 갔다.

1층 상가에 책대여점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지하로 바뀌어 있었다.

그곳에서 책을 고르다가 은아언니를 만났다. 얼굴 본 지가 한참 된지라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언니 얼굴이 많이 어두웠다. 언니가 같이 자기 친정으로 가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 하고 책방을 나서는데,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언니 친정과 같은 단지에 살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사하고 몇 년 뒤, 분당으로 이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암튼 오랜만에 언니 친정집으로 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입구에 신발이 가득 놓여 있었다. 힐끗 보니 거실에 사람들이 군데군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곧 안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거기 역시 서너 명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에 은아아줌마가 누워 있었다.

‘아, 맞다. 아줌마가 편찮으시지... 잘 됐다. 그렇잖아도 인사 한번 드려야 했었는데’

아줌마 곁으로 다가가 앉아 아줌마~ 하고 부르며 손을 잡아드렸다.

어쩐 일인지 시무룩하시다.

내가 왔으니 반기며 일어나 앉으실 만도 한데, 영 기운도, 말씀 한마디가 없으시다.

‘빨리 나으세요, 일어나셔야죠...’ 역시 대답이 없으셨다.

아줌마 손등에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 **야, 은아아줌마가 돌아가셨다, 새벽에... 지금 아빠랑 병원에 왔어, 옆에 은아있는데 바꿔줄게...”

시계를 보니 오전 9시가 조금 안 돼있었다. 학원 출근이 오후라 그날도 전화만 없었으면 12시까지는 자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꿈이었어... 돌아가셨구나... 열흘 전쯤 엄마, 아빠, 오빠까지 병문안을 드리고 왔었는데...

난 가보지도 못하고...’

은아 아줌마가 다녀가신 모양이다.

내 꿈속에서 그렇게, 나하고 인사를 하시고 간 것 같다.

돌아가시기 1년 전쯤 결혼식 날짜를 잡고 얼마뒤 아줌마 전화를 받았다.

“**야, 내가 네 결혼식에는 꼭 간다. 목발을 짚던, 휠체어를 타서라도 꼭 갈 테니까...”

늘 그랬듯이 호탕하게 웃던, 아줌마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게 마지막이 돼버렸다.

어느 날 일요일 아침, 와장창 소리에 아빠가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고 그다음 내가 문 앞에서 보니, 장독대 항아리 뚜껑이 몇 개 깨져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장독대 뒤편이 바로 앞집벽이었는데 그 집 창문이 떨어져 있었다. 그 집 딸로 보이는 국민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언니가 난처해하며 아빠가 얘기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다가 잘 열리지 않자 계속 세게 밀었고, 그러던 중 갑자기 왁 하고 한쪽으로 밀렸다... 마모가 된 나무 문틀에서 창문 한 짝이 이탈해 나가떨어진 것 같다... 아빠와 그 언니, 둘이서 추론한 게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뒤의 일이었고, 이렇게 두 집 인연이 시작되었다.

두 집은 같은 골목은 아니었지만 앞집, 뒷집으로 아줌마네 안방 창문에서 우리 집 좁은 마당이 내다보였다.

두 집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계단도 두 개가 나란히, 가깝게 붙어 있었다.

엄마가 아줌마집에서 늦은 밤까지 놀다가 그 집 대문을 나와 우리 집을 건너오려면 다른 집 하나를 끼고 빙 둘러와야 우리 집 대문이 보였다. 통금이 있던 시절, 자정이 넘어 집에 오다 보면 방범대원에게 가끔 걸렸다, 고 했다. 워낙 가까운 거리라 방범대원이 봐주긴 했지만 엄마는 염려스러웠던지 생각해 낸 것이 그 집 옥상 계단에서 우리 집 옥상 계단으로 넘어서 집에 오는 거였다. 그 아찔한 상황이 아빠가 숙직하고 안 들어오는 날, 연출되곤 했다.

아줌마네 아저씨는 전두환 정권 시절 군간부였는데 그때 당시 지방에 근무하셔서 집에 가끔 오셨더랬다.

어느 날 아저씨 생신이라 아빠도 동네 주민 중 1명으로 초대를 받았었는데 아빠는 다녀와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무식한 것들, 오징어 숙회 위에다가 초장을 한 접시 다 부어놓고는, 쳇 저 혼자 처먹나... ”

맞은편 앉은 어느 한 사람이 그랬나 본데 다 싸잡아서 그렇게 흉을 봤다.

하루에 열 마디도 안 하는 아빠가 얼마나 아니꼬왔으면... 계급장 달고 으스대는 꼴들이 못마땅했나 보다.

아무튼 엄마가 옥상 계단으로 넘어오는 날은 자다 깨다 뒤척였고 옥상 철계단에서 쿵, 쿵 한 발짝씩 떼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건너오다 떨어지진 않았구나, 안심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어느 더운 여름날, 방학을 며칠 앞두고 오전반 수업으로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학생이 너무 많아 4학년때까지 오전, 오후반 수업으로 나누어놨는데,

얼마나 많았으면 서울에서 전체 학생수가 가장 많은 국민학교라고 티브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방송국에서 촬영한다는 그날, 학교 측에서는 운동장에 아이들을 다 풀어놓고 뛰어다니게 했다.

오후반 아이들도 모두 등교한 후라 골목은 조용했고 뜨거운 뙤약볕 탓에 오가는 사람 없이 동네가 한산했다. 아줌마집 대문을 나오면 몇 걸음 안 되는 지점에 바위가 하나 딱 놓여있었다. 거기서 5미터쯤 더 걸으면 맞은편 집 1층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바위 아래로는 경사진 내리막길이 시작되었고, 동네 어귀의 시작점처럼 그 바위가 있었다.

언제부터, 왜 그곳에 바위가 있었는지 들은 적도 없고 물어본 적도 없다.

그전부터 난 할 일없이 그 바위옆에 자주 서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 오가는 것부터 통근 버스 내려서 퇴근하는 아빠, 나와는 다른 오후반이라 하교하는 옆집 미경이, 우산 없이 비 맞고 귀가하는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런 안 됐네... 하며 내려다보았다.

둘이 등져서 엉덩이를 맞대고 앉을 수 있을만한 면적에, 높이는 라면 상자 세 박스 쌓아놓은 정도로, 관악산 계곡 상류쯤 올라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바위였다.

여느 날처럼 할 일없이 바위옆에 서 있다가 한 발을 올려놓고 탁. 탁 구르며 노래와 함께 장단을 맞췄다.

“푸른 하늘 으~은 하수, 하~아얀 쪽배에...” 미경이와 손을 잡고 쎄쎄쎄, 하며 시작하는, 이 노래 가사에 맞추어 손동작을 한참 연습했던 시기였다.

발을 구르고 있는데 바위가 살짝 흔들렸다. 좀 더 거칠게 발로 굴려봤더니 덜컹 소리가 나서 하던 노래를 멈췄다. 바위밑을 내려다보니, 납작한 자갈 한 개 정도가 물릴 만큼의 틈이 보였다. 이번엔 더 세게 발을 굴려보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바위옆에 갈 때마다 발을 굴려 바위를 제자리에서 조금씩 조금씩 밀려나가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평평한 곳에서 경사진 내리막길 쪽으로 조금씩 밀려나자 바위가 건덩건덩 했다.

난 바위 위로 올라가 시소 타듯이 왼발, 오른발을 차례로 굴렸다. 그러자 바위는 경사진 쪽으로 기울었다가, 평평한 쪽으로 되돌아왔다, 그랬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자 바위에서 더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난 바위 위에서 내려와 발 굴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왜 그렇게 내가 열중했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하는 무식한 국민학교 저학년생이었다.

무모하고 도전적인 내 발길질에 순간 바위 밑면이 드러나면서 바위가 내리막길 쪽으로 훅 뒤집혔다.

아주 천천히 둔탁하게 쿵, 하고 소리가 났고 이내 비탈진 길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우르르 무너지는 듯한, 낮고 육중한 소리가 났다. 순간 당황한 나는 그 바위를 붙잡으려 팔을 뻗었고, 잡았어도 잡히지 않았겠지만... 몇 초나 지났을까... 내리막길 밑에서 바위는 멈추었다. 그때 아줌마집 대문이 확 열리더니 아줌마가 나타났다.

“**야, 무슨 일이니? 아니, 무슨 큰 소리가 나서 얼른 나와봤더니...

저 바위가 굴러갔니? ”

이미 언덕 밑에 굴러가 집 앞에서 사라진 바위를 가리키며 아줌마가 물었다.

“네...”

“바위가 그냥 굴러갔어? 갑자기? 네가 여기서 본거야? ”

“네...”

“어쩌다가 저 큰 바위가 굴러갔다니? ”

“세상에, 너 괜찮니? 어머나, 얘 놀랬네.” 하며 아줌마가 더 놀랬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구멍가게 아줌마도 튀어나왔다.

두 아줌마가 나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열심히 추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최 알 수 없는, 알다가도 모를 일로 두 분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유일한 목격자? 인 나에게, 너 큰일 날 뻔했다,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니... 하며

두 분 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년간 동네 터줏대감처럼 아줌마네 대문 앞에 있었던 바위는 나가떨어진 채 내리막길 밑 한가운데 며칠 있었다. 어느 날 누가 조치를 취했는지 공사장 트럭이 와서 바위는 억울하게 실려 갔다.

모든 기승전결은 나였다. 난 응큼하게 일을 저질러놓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아줌마는 간호장교 출신이었다. 아줌마네 놀러 갔을 때 은아 언니가 꺼내온 앨범에서 제복을 입고 베레모를 쓴 아줌마를 봤는데, 아주 늘씬하고 이뻤다. 딱 옛날 배우 최은희 얼굴과 닮아있었다.

아줌마는 서독에 간호사로도 수년간 근무하셨었는데 처녀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독일로 돌아갔다가, 다시 들어와서 둘째를 낳고, 또다시 그곳에 가서 일을 하셨다, 고 했다. 그 과정 속에서 아줌마 여동생이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함께 아줌마의 두 딸들을 다 키워줬다고 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은아언니가 결혼했을 때 아줌마가 너무 울어서 미용실에서 받은 화장이 다 지워졌다고... 그 옛날 떼놓고 간 어린 딸이 생각났을 거라고... 결혼식에 다녀와서 엄마가 말했다.

서독에서 그 나라 환자들의 무시가 말도 못 했다고 했다. 어떤 환자는 “야, 너네 나라에 가면 이런 것 없지? 못 먹어봤지? 이거나 처먹어라.” 하며 침상에서 과일을 던졌다, 고 했다. 그러면 꾹 참고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집어 들고 씩씩하게 당케~라고 말했단다.

암튼 아줌마 경력 덕으로 난 가끔 예방 주사를 얻어맞았다.

같은 반 친구 엄마가 약국을 했었는데 그 엄마가 백신을 가져오면 아줌마가 나, 그리고 약국집 딸들에게 주사를 놨다. 친구 여동생이 주사 앞에서 울고불고 뒷걸음질을 치면 친구와 나는 4학년답게 입술을 꾹 다물고 얌전히 주사를 맞으며 모범을 보였다.

은아언니와 놀고 있으면 어쩔 땐 가끔 아줌마도 같이 게임을 했다. 그중에 아이엠 그라운드~ 로 시작하는 게임도 배워 같이 했는데 난 처음이라 자꾸 틀렸다.

아줌마는 봐주지 않았다. 매번 걸리는 나를 장난기 있는 얼굴로 웃으면서 빡! 소리가 나도록 딱밤을 내 이마에 놨다. 가뜩이나 짱구인 이마가 벌겋게 부어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줌마는 얼얼한 딱밤맛을 나에게 최초로 보여준 여인이었다.

그래도 내가 감기라도 걸리면 훼~미리 주스를 사들고 오셨다.

그때 새로 나온 오렌지 주스였는데 아줌마 덕에 처음 마셔봤다.

다 마시자 엄마는 유리병 겉에 종이 라벨을 물에 담가 불려 벗겨내고, 깨끗이 씻어 건져놨다가 끓여서 식힌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두 집이 사는 동네도 달라지고 중학생이 되었어도 아줌마와 왕래는 여전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뒤, 학교에서 돌아오자 집 거실에 아줌마가 대자로 뻗어 누워있었다.

내가 들어온 것을 모르신 듯했다.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줌마가 큰 소리로 흐느끼며 말했다. “난 고3엄마야, 고3엄마라고...

고3 엄마는 힘들어, 너무 힘들다고... 흐흐흑...”

엄마랑 두 분이서 낮술을 한 듯싶었다. 엄마는 안방에 누워 잠이 들어있었고 아줌마 혼자 몸부림을 치던 중에 내가 들어온 것 같다.

은아언니의 언니가, 아줌마 큰딸이 고3이었다. 나중에 아줌마가 가고 엄마에게 들어보니 공부도 잘하지만 언니의 고3 신경질이 대단하다고 했다. 수험생 딸 비위 맞추랴, 도시락 2-3개씩 아침마다 준비하랴 많이 고단할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거실 티브이는 물론 발자국 소리도 못 내고 사신다, 했다.

‘고3이 무섭긴 무섭구나... 아줌마를 어지간히 볶았나 보다.’ 어릴 적 나에게 인형옷도 만들어주고 다정했던 언니였는데 상상이 안 갔다.

내 방에서 열린 방문으로 슬쩍 보니 아줌마는 정신을 차리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후 현관을 나서셨다.

집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는 듯이, 늘 그랬던 것처럼 저녁밥을 맛있게 만들어 언니들에게 주었겠지...

현재 내 아이도 고3인데 공부를 안 하는 편이라 나한테 부리는 성질은 별로 없다.

하지만 시험 앞두고 걱정만 하면서 공부 안 하는 학생처럼 내 마음이 불편하긴 하다.

고3엄마가 뭔지... 예나 지금이나...

어제는 친구와 통화했는데, “ 너 고3엄마 맞냐?”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서 쓸 때가 다가와서 마침 그 얘기를 하는데 듣다가 답답한지 나를 나무랐다.

“넌 다 알만한 애가 어쩜...”

수능 끝나고 점수 나오면 자기한테 꼭 알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는 컨설턴트에게 연결을 시켜주겠다고, 자식 둘 다 대학 보낸 목동 엄마답게 나에게 한참 훈수하고 전화를 끊었다. 학원강사경력 타이틀이 무색하게 내가 관심이 덜 한건 인정한다. 애들 공부하는걸 지긋지긋하게 봐서 그런가, 우리 아이는 그냥 내뒀다.

‘지가 지금 논거만큼 나중에 그만큼의 고생을 하겠지... 안 하면 좋겠지만...

그것 또한 아이 몫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수험생 엄마 역할에 슬쩍 비켜서 있었다.

어찌 됐든 아줌마와 언니는 그때 당시 남은 시간 동안 각자 맡은 바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고 언니는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

나중에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아줌마는 집에 와서 엄마와 얘기를 나누다가도 내가 방에서 나와 밥을 먹고 앉아 있으면 슬그머니 옆으로 와서 셔츠 주머니에 두 번 접은 만원 자리 지폐를 넣어주고는, 힘들지? 하며 웃으셨다. 용돈도 어지간히 많이 받았었다.

어릴 적부터 난 아줌마에게 받은 게 참 많다. 아줌마는 상대방이 받으면 좋아할, 그런 것들만 주셨다.

어릴 적 엄마라면 사주지 않았을 김민재 아동복도 아줌마 덕에 여러 벌 얻어 입었다.

내가 아줌마네 놀러 가 안방에 앉아있으면 “어이구, 우리 집 안방이 환하다, 환해.” 하며 웃으셨다.

아줌마가 주는 것은 다 좋아 보였다. 그 집에서 엄마 편에 오는 건 복숭아 하나라도 씨알이 굻었고 마른오징어채 볶음을 한 접시 얻어와도 비싼 새우가 들어있었다.

당시 내가 국민학교 다녔던 시절에는 촌지가 극성이었다. 흔히 치맛바람이라고 불리는, 그런 엄마들이 몇 있었다. 아이들끼리는 공공연하게 전교에 누구누구 엄마가 그렇다는, 소문을 공유하고 있었다. 난 엄마가 그런 봉투를 갖다 줄 만큼, 설마 여력이 있어도 돈이 아까워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었는데 나중에 성인이 되고 알았다.

아줌마가 선생님께 봉투 주는 기술을 알려줬다고 엄마가 말했다.

아줌마가 엄마보다 7살 위였으니 그것만 가르치진 않았으리라.

학기 초나, 아님 학년 다니는 중에 엄마들은 보통 봉투를 내미는데,

아줌마는 학년초에, 학년을 마치고 봄방학이 끝났을 때도 인사를 했고 또 졸업식에도, 그렇게 봉투를 드렸다, 했다. 엄마 성격에 차마 그렇게까지는 따라 못하고 그 긴 13년 동안 어쩌다 학교에 오면 봉투기술? 은 몇 번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것도 아줌마 봉투 액수하고는 차이가 많이 났다. 했다. 아줌마의 봉투는 그냥 기술이었다라기보다 진정성이 그래도 좀 묻어난, 고급 기술이지 않았나 싶다.

뒷간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하고 사람 마음이 달라진다고 ,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아줌마는 86 아시안게임 개회식에 초대받아 아저씨와 동반으로 갔다 오신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 우리 집에 와서 하시는 말씀이, “ 야, 비가 뭐 그렇게 쏟아지냐... 자리에 앉고 나서부터 식이 끝날 때까지 비가 오는데... 속옷 빤스까지 홀딱 다 젖고, 미용실에서 드라이한 머리가 비 맞은 생쥐꼴이 돼가지고, 우비를 죄다 나눠줬는데도 소용없더라고, 뭐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아, 구경도 잘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비만 맞고 있었다니까, 뭐 별 수 있나... 그러다가 집에 왔어... 그 자리 값이 10만 원이라던데 비만 쫄딱 맞고 왔다야... 큭큭큭... ”

그러고 한바탕 쏟아내시곤 은으로 만든 기념주화가 2개 들어있는 작은 상자를 내놓고 가셨다.

시간이 지나 내가 20대가 되고 엄마가 허리병이 생겨 수술을 하셨다.

당시 우리 집은 5층짜리 아파트 4층에 살고 있었는데 엄마 허리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했다.

30분 거리에 있는 아줌마네 아파트 단지로 집을 알아봤고 아줌마네와 같은 단지로 곧 이사했다.

어느 날 아줌마가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또 나에게 얘기하나를 들려주셨다.

“야, 어제 셔틀버스 타고 백화점에 갔는데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여자들이 갑자기 우르르 뛰기 시작하는 거야, 무슨 일이지,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얼떨결에 나도 같이 뛰었어,

그러고 백화점 안에 들어갔더니 이제 또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막 뛰어가는 거야, 그래서 나도 열심히 따라가서 탔지. 내가 에스컬레이터 계단 위에 서있는 여자들을 쭈욱 보니까 죄다 젊은 엄마들이야,

야... 이거 뭐가 있긴 있나 보다, 하면서 지하 1층에 내려갔더니 거기서부터 여자들이 또 뛰는 거야, 나도 질세라 뛰어갔지, 이젠 알아야겠더라고, 도대체 뭐가 있길래 아침부터 난린가... 아, 글쎄 가보니까

배추가 이만큼이나 쌓여있더라고... 웬 배추를 백화점에서 말이야, 참 나원, 하루 특가로 그 시간에 한정판매 한다고 하니까 이 여자들이 그렇게 뛴 거야... ” 아줌마도 배추 두 통을 500원에 주고 양손에 들고서 정작 볼일은 못 본 채 집에 왔다, 하셨다.

“요새 젊은 엄마들이 그렇게 알뜰해... 그렇게들 독하게 살아... 세상에, 대단들 해...”

아줌마가 말했던 그 젊은 엄마들은 지금쯤이면 다들 나이가 60대, 70대 초반이 되어있지들 싶다.

엄마들은 참 열심히들 살았다. 젊던 나이가 많든 간에...

그 무렵부터 시작해서 아줌마는 수년간을 두 딸들의 유년시절, 당신의 부재에 대한 죄스러움을 손자, 손녀들에게 전부 쏟아부었다.

첫 외손녀를 아예 처음부터 데려다 키우셨다. 친정 근처로 신혼집을 마련했던 은아언니는 퇴근해서 친정에 와 아기와 함께 자고 싶어 했지만 아줌마는 얼른 너네 집 가서 남편 받들라고... 오지도 못하게, 또 와도 저녁만 먹이고 얼른 쫓았다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했던 아줌마는 이유식부터 간식까지 손수 해먹이며 물에서 금방 씻어 건진 것처럼 손녀딸을 곱게 키워놨다. 몇 년 더 지나 큰 딸이 아들 둘을 연년생으로 낳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아줌마는 그 아이들도 데려다 키웠다.

첫 외손녀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 되자 아줌마가 탈이 났다. 허리고 뭐고 몸이 성하질 않았다.

수술도 몇 차례 하셨고 종국엔 잘 걷지도 못하게 되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수술이라도 해본다 했다.

하지만 막상 열어보니 수술을 할 수없을 정도로 허리뼈가 녹아 있었다고 의사가 말했단다. 손도 못 대고 그대로 다시 봉합했지만 아줌마는 마취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셨다.

60대 중반이 조금 안된 나이였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날 땐 환자의 의지 또한 필요하다고 알고 있다.

완수하지 못한, 할 일을 다했다 생각하셨나... 미련 없이 삶의 끈을 놓아버리셨다.

건강하고 매사에 주관이 또렷한,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야지, 생각하며 가깝게 지낼 어른이었다.

그런 분이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는 아줌마가 손주 새끼들 키우다 진이 다 빠져서... 몸이 다 부서져서 일찍 죽었다, 고 말했다.

그런 아줌마 손에서 자란 아이들 셋이 장례식장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까불고 있었다.

그 뒤로 난 4, 5년이 지나서 아이를 낳았는데 온전히 내가 키웠다.

엄마도 나도, 맘만 먹으면 엄마가 내 아이를 봐줄 수도, 또 내가 엄마에게 아이를 맡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친정엄마들의 삶이 자식들의 자식들 양육으로 귀결되는 것을, 혹시나 그것이 원망의 씨앗이 되어 후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자 하나 업어 키우지 않은 엄마도 허리 수술을 몇 번 했다.

주부의 퇴직 없는 도돌이표 생활이 걷지 못해야, 죽어야 끝난다.

요새 이 대환장 더위에 복날이라고 찹쌀을 씻어 불리고, 닭 두 마리를 사다 쳐 삶고 있는 나에게, ‘난 그렇게 안 살 거야, 난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열심히 다짐했던 나에게, 조소를 보낸다.

맘대로 살기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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