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by 시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게 조금씩 정신이 든다. 눈곱이 잔뜩 낀 눈을 번갈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주위의 색을 살핀다. 약간 노르스름하고 환한 빛이다. 아침과 점심 그 사이쯤이 분명하다. 밤새 부둥켜안은 이불들을 다시 재우고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일으킨다. 분명 밤 사이에 먹은 음식은 없는데 왜 몸은 아침에 더 무거운지 이해할 수 없다.


거실에는 적막이 가득하다. 항상 그랬다. 하지만 매일 낯설다. 적막을 깨우려 괜히 하품도 하고 화장실도 한 번 간다. 물소리를 내면서 세수를 한 번 해주고 나면 그제야 정신이 든다. 혹시 너에게 연락이 왔을까.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화면이 깜박깜박. 수시로 확인하지만 응답은 없다. 배고파진다. 어제 먹다 남은 치킨으로 아침을 먹는다. 닭고기를 질겅질겅 씹는다. 귀찮아 전자레인지에 데우지 않고 그냥 먹은 탓이다. 하지만 입안에서 냉기가 식어갈 때면 어제와 같은 맛을 내니 상관없다. 허기가 꺼질 만큼 먹고 옷을 갈아입는다. 달리기를 해야겠다. 문을 열고 나가 오늘의 한기를 반긴다. 어제보다 더한 한기다. 춥다. 분명 방에서 본 햇빛은 굉장히 밝고 따사로웠는데. 그래서 춥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겨울에는 고기압 때문에 햇빛이 더 좋은 날 더 춥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을 10년 동안 까먹지 않고 기억하지만 막상 써먹고자 하면 잊어버리고 만다. 아이러니하다. 한 번씩 바람이 분다. 내 몸은 더욱 움츠러든다. 바람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갈 때면 볼이 따끔따끔거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몸을 더욱 늘리고 고개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달리기를 할 수 있다. 달리기뿐 아니라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선크림을 바르고 오지 않은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지만 천천히 발을 굴러본다. 전에는 볼이 따끔거리더니 이번에는 귀가 잘릴 것 같다. 하지만 더 뛰다 보면 귀에 감각이 없어져서 나름 살만 해진다. 진짜 괴로워지는 건 코끝이다. 코끝이 동그랗게 아린다. 정말 추운 날에는 콧속을 누가 잡아당기는 느낌도 든다. 지금 누군가가 나를 루돌프라고 불러도 반박할 수 없다. 공원에 아무도 없어서 참 다행이다.


달리기는 참 매력적인 운동이다. 숨을 턱 끝까지 차오르게 만들어 포기하고 싶게 만든다. ‘그냥 그만 뛰지 그래?’라고 누가 귀에 속삭인다. 그러면 중간에 우뚝 서고 싶다. 하지만 한 번 뛰기 시작하면 발에 모터가 달린 듯이 멈출 수가 없고, 달리기를 하며 마시는 숨은 그 어떤 공기보다 상쾌하다. 거의 뭐 마약이다. 난 매일 그 마약을 즐긴다.


달리는 중 극한에 도달했을 때는 내가 뛰고 있는 건지, 트랙이 움직이는 건지 모른다. 터벅터벅. 소리와 함께 갖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가장 생각정리가 잘 되는 때이다. 그 때면 항상 네가 떠오른다. 내가 과거로 간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우리 아직도 잘 지내고 있을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들은 돌고 돌아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인 것 마냥 나를 옥죄인다. 죄책감이 나를 쫓아온다. 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공원을 뛴다. 다음 바퀴에서도 생각은 계속된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어떤 선택을 했어도 같은 결과일 것이라고. 순간은 돌릴 수 없다는 걸. 생각이 조금씩 풀릴 때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마지막 바퀴는 나의 최대치를 사용해 가장 빠르게 달린다. 달리기는 생각과 함께 절정으로 다다른다.


목표했던 5km를 완주하고 참아왔던 숨을 거칠게 내뱉는다. 달리기 전에는 그렇게 추웠던 날씨가 나름 따뜻하게 느껴진다. 무거웠던 몸은 한결 가벼워졌고 머릿속은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개운하다. 모든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듯 달리기의 가장 큰 묘미는 달리기가 끝난 후에 있다. 그래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 사람들은 달리기의 매력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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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던진다. 어젯밤과 오늘 먹은 치킨 칼로리에 대한 죄책감. 게으르게 행동했던 나의 몸에 대한 죄책감. 지난 시간 너를 잃어버린 죄책감.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면 몸에 붙은 작은 죄책감마저 하수구로 씻겨 내려가버린다. 이것으로 나는 죄책감에 대한 회개를 마쳤다. 다시 티 없는 모습으로 남은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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