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 미숙이(자매) 정숙이 맹숙이(자매) 양심이 양이(자매) 순희 순심이(자매)
내가 자란 동네 또래 여자 아이들 이름을 나열한 거고 나는 언니 이름 끝자리에 숙을 조금 변환시켜 순으로 끝나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랐다.
황토색 털을 가진 시골에서 키우는 개는 대부분 누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 집에서 누렁아 밥 묵어라~~ 저만치 떨어진 윗집에서도 누렁아 시끄럿!! 돌담 한 줄 경계에 있는 아랫집에서도 누렁아 누렁아 부르는 소리가 담을 타고 넘는다.
중학교 때는 같은 이름 세 명이 한 반이었다. 평생 달고 살 이름인데 성의나 고민 따위 티끌만치도 없이 지어진 내 이름은 인간계의 누렁이였다.
인절미에 콩가루 묻히듯 내 이름에 새 눈물만큼의 성의만 발랐어도 고등학교 짝꿍 영란이 같은 이름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키 순서로 난 2번 영순이로 불렸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툭 튀어나온 광대보다 내 이름이 더 부끄러웠다.
오십 넘은 나이가 돼서도 끝내 나처럼 이름에 정을 못 붙이던 친구는 얼마 전 개명을 했다. 20만 원으로 세련되고 여성여성한 이름을 얻었다. 우리 나이대에 그런 분위기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내 친구처럼 작명소를 다녀온 사람들이다.
이제는 국어선생님이 다정하게 내 이름 불러줄 일도 없고 이름 앞에 거추장스럽게 일 번 이번 붙여서 불릴 일도 없게 됐으니 굳이 번거로운 일 만들 필요도 없어 작명소에 같이 가자던 친구를 혼자 보냈다.
자존감까지 깎아먹는 내 이름이 그렇게 싫었던 내가 불과 며칠 전 녀석의 이름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누렁이 같은 이름 말고 이 정도는 돼야 이름인 거라고 하늘에서 아버지 보란 듯 번쩍번쩍하게 짓고 싶었다.
브런치를 시작하고자 마음먹었다.
딱히 정해진 주제 없이 일상을 담는 글들이 될 것이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당연히 합격을 전제로, 요즘 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이 녀석과 함께하는 일이다 보니 브런치 주인공은 당연히 녀석이 될 터였다.
브런치를 원톱으로 이끌어나갈 녀석의 이름을 우선 짓기로 했다.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가 작명소에서 잘 지어온 이름이 있는데 브런치 하겠다고 또 작명소를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롯이 혼자 영끌을 해보기로 했다.
나처럼 숨기고 싶은 이름이 아니라 기꺼이 드러내도 좋을 이름을 꼭 찾겠노라 나름 비장했다.
태명인 찰떡이부터 말 많은 아이니 종달새로 할까.
혀 짧은 소리로 이름은 이농준이라고 하던 기억이 떠올라 농준이로 할까 노는데 너무 진심이라 놀보라 할까.
엄마랑 다니면 아빠 닮았나 보네 아빠 손을 잡은 날은 엄마 닮았나 보네 멋대로 추측들을 하고 가족이 함께 외출하면 누굴 닮았어? 백과사전을 뒤져도 답이 없는 난해한 질문들을 한다.
목욕을 막 마친 말간 녀석의 얼굴에 토닥토닥 로션을 발라주며 조카는 말한다.
"진짜 용 됐다, 진짜 이뻐졌지 이모?"
월급을 늦게 이체하고 부당한 업무를 강요하는 것만이 갑질은 아니다.
희망사항을 사실로 둔갑시켜 억지로 원하는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갑질이다. 근래에 내 고용주인 조카는 이렇게 갑질을 하곤 한다.
삶을 빛나게 하는 건 희망으로 가꿀 내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 브런치 주인공 이름에는 희망을 싹싹 쓸어 담기로 했다. 엄마의 희망 아빠의 희망 나의 희망 그리고 철들면 간절할 녀석의 희망을.
그래서 미남이란 이름이 내 장고 끝에 탄생했다.
미남이라 정하고 나니 녀석에게 너무 비현실적인 이름이라 적당한 성을 얹어 희망사항과 현실과의 괴리를 좁히기로 했다.
<성은 안이요 이름은 미남이>
브런치 가문 사대 독자도 아니고 잉크 묻혀 호적에 올릴 이름도 아닌데 우리 아버지가 내 이름 지으며 하셨을 고민의 오만갑절은 더하고 탄생한 이름인 만큼
안미남군? 우리 잘해봅시다!!!!
이 새벽, 좋은 꿈 꾸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