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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물젤리 Feb 18. 2023

소크라테스를 배반한 아이

주제가를 선물로 받은 아이

미남이 네 번째 생일이다ㆍ 생일든 전 주에는  엄마 아빠랑 에버랜드를 다녀왔고 외삼촌과 외할머니에게 금일봉과 선물을 두둑하게 받아왔다.

전날에는 같은 동네에 사시는 친할머니집을 방문했다. 영상으로 본바로는 3단 떡케이크 앞에서 생일축하 노래를 라이브로 직접 불러 자축을 했고 금일봉을 받아왔다ㆍ


우리 집에는 미남이가 눈독 들였던 이모 인형과 똑같은 죠르디 인형이랑 미니 캠핑카가 주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ㆍ


우리 딸들은 할머니 집에서 촬영한 자축 생파 영상을 보고

, 저게 노래냐 웅변이냐  심각하다 정말,

, 어쩔 수가 없다 안 되는 건 일찍 포기해야지,

이렇게 의견 일치된 카톡을 보내왔다ㆍ


"엄마랑 둘이 노래 교실에라도 다니지 그래?"

둘이 합창한 것도 아니고 미남이 혼자 들뜬 생파 자축인데 뜬금없이 날 소환했다.


내가 미남이랑 동요를 부르면 우리 딸이 그랬다ㆍ

미남이한테 노래는 불러주지 말라고.  미남이가 노래를 책 읽는 걸로 알면 어떡할 거냐고 말이다ㆍ


이런 타박에도 반박할수 없는 이유, 섭섭하지 않은  이유는 난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중학교 때 매년  반 별 합창대회가 있었다ㆍ 한동안 음악시간에 우리 반 경연곡인 울산아가씨를 배웠고 그날은 자리에 일어나서 최종점검을 받는 시간이었다ㆍ난 나름 열심히 불렀는데 날더러 건성으로 한다며 음악 선생님이 오른손에 늘 끼고 다니던 몽둥이로 손바닥을 때렸다ㆍ대상인지 최우수상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반이 합창대회 일등을 했다ㆍ


고등학교 때도 합창대회가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빈 시간에 노래지도를 하셨다ㆍ

한 학급에 60번까지 있던 시절이었고 난 자리가 뒷줄이라 앞에 계신 선생님과 거리가 꽤 멀었다ㆍ

갑자기 선생님이 연습을 멈추고 내 이름을 부르셨다ㆍ

사십 대 미혼 여선생님으로 고상하고 교양미가 뚝뚝 흐르던 선생님은 별안간 나보고 연습하기 싫으면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ㆍ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옆반 총각 선생님도  마침 우리 연습하는 걸 보러 와 계셨다ㆍ


울컥 터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는데 노래연습이 다시 시작되자 봇물 터지듯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ㆍ이런 모습을 들킬까 봐 몰래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 콧물 범벅을 연신 손으로 쓸어 바지에 닦고 또 닦아냈다.


지금도 맹세컨대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난 썩 즐겁지는 않았어도 지겨울 만큼 연습이 싫지 않았고  대충 부르지도 않았었다ㆍ

그날 종례를 끝내고 선생님은 나에게 오셔서 사과를 하셨다ㆍ그때는 시상권 안에는 들지 못했다ㆍ


큰딸 유치원 때  어버이날 행사날이었다ㆍ학부모 한 명만  추첨을 해서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ㆍ 마트 행사 경품추첨에서는  콩기름 한병도 안되면서 꼭 이럴 때는 걸려든다ㆍ요지경 속이다ㆍ


한참인기 있던 김종환 노래를 불렀다ㆍ<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어 있어도>

초반도 안 지났는데 엄마들은 웃느라 난리가 났고  반주가 멈췄다ㆍ큰 웃음 줘서 고맙다는 원장님의 칭찬을 듬뿍 받았고 대신 친구가 불러달라며 마이크를 내 친구에게 넘겼다ㆍ


그리고 얼마간의 세월 동안 노래 때문에 당한 굴욕이 몇 번 더 있었다ㆍ


그리고 큰딸 4학년 때 딸이 반장이 되는 바람에 반 대표  엄마가 됐다ㆍ

소풍을 마치고 각 반 대표 엄마들 몇 명이 뒤풀이로 노래방에 갔다ㆍ노래에 자신 있는 한 엄마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고 조금 빼던 엄마들도 한곡씩 돌아가며 불렀다.  

마이크가 커다란 폭탄 같았다ㆍ 난 노래 트라우마로 곧 터질지도 모를 폭탄을 든 것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제일 잘하는 노래가 아니라(잘하는 노래가 없으므로) 수백 번을 들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노래 <후회>를 불렀다ㆍ그 당시 난 조성모 극성팬으로 팬클럽 마리아 회원이었다ㆍ


툭하면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곤 해~~~ 그러다 보면은 어김없이 눈물이 흘러 오래전에 넌 이미 내 곁을~~~


만남이 짧아 서로 낯설고 어색했던 사이들이었다.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목소리는 악보에 없는 휴대폰 진동음을 베이스로 깔았고 엄마들은 손뼉 치며 흥을 끌어내는 일 대신 애먼 소파를 붙들고 힘들어했다.

노래를 중간쯤 불렀을 때는 손과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내 노래가 장송곡도 아닌데 아이고아이고 곡을 했다ㆍ

마이크를 껐다.

급기야 한 엄마는 아, 아, 아이고 곡소리가 몇 번 끊겼다 이어지나 싶더니 긴 파마머리로 바닥청소를 하고 있었다ㆍ

한참뒤에 간신히 의자에 앉으며 한 손으로 배가 너무 아프다고 배마사지를 하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았다ㆍ


그 멤버는 한동안 만날 때마다 날 보면 웃음이 난다고 했다ㆍ노래 부르는데 박자도 음도 이상한 데다 입도 안 벌리고 표정도 없고 게다가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떨기까지 하냐며 나를 진동 마네킹이라고 했다.


노래방이 유행하던 시절인 데다 노래 부심이 있는 멤버가 있어 종종 노래방을 가자고 했고 난 가급적 핑계를 대고 빠져나갔다. 어쩌다 끌려가 웃기는 것도 능력이라며 마이크를 줄 때마다 이 고비만 넘기자 하는 마음으로 반주 없이 어렸을 때 배웠던 꼬까신도 부르고 고향의 봄도 불렀다ㆍ


노래방 출입 횟수가 느는 만큼 점점 곡소리가 줄고 파마머리로 바닥 쓰는 일도 없어졌다ㆍ수정 보완된 내 노래실력 덕분이면 좋겠지만 그건 아니고 노래방 동무들의 귀가 내 노래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미쳤다 생각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J에게를 목청껏 뽑은 날 한 엄마가 그나마 이걸 18번으로 삼으라며 기를 살려줬다ㆍ기를 받은 김에 오늘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불러야 되나 보다고 잘난 체를 했더니 웃기는 소리 말라며 내가 할 소리는 아니라는 핀잔을 들었다.


~~~~~~~~~~~~~~~~~~~~~~~~~~~~~~~~~~~~~~~


미남이는 시끄러운 아이다. 지나치게 말이 많다.

소나기처럼 질문을 쏟아 낸다.

난 미남이 말에 대답을 하는 건데 미남이 엄마는 내쪽에서 먼저 말을 시킨다고 했다ㆍ그러니 미남이 시끄러운 건 내 탓이라고 했다. 이해한다. 누구든 탓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 이모, 그게 노래야?,,

미남이랑 노래를 부를 때마다 듣는 소리다. 그 정도면 많이 심각하다고도 했다. 아마도 미남이의 테러블한 노래실력이 분명 내 탓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ㆍ내 노래는 참하디 참한 독서 스타일이고 미남이는 악을 꽥꽥 질러 목청만 크면 노래인 줄 아는 거친 웅변 스타일이다ㆍ그러니 진지하게 내 탓이라고 치고 들어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요즘 미남이는 창작동요제부터 뚫으려는지 틈만 나면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ㆍ

그네를 타다가도 덤프트럭은 크지요 ~~ 했다가 뜬금없이

꽃비~는 멋지지요~~~~

 늘 똑같은 음정 박자에 노랫말만 대충 바꿔서 주제 없는 4분의 4박자 노래를 흥얼거린다.

,, 할머니, 저 노래 잘하죠?,, 하면서 말이다.

잘 못 들었다고 했다가는 왜 안 들었냐고 난리난리를 피울 거 기 때문에 세상 둘도 없는 가수로 치켜세웠다가 한 번 더 불러달라고 했다ㆍ

"몰라요 까먹었어요"


하루에도 몇 곡 씩을 만들어 내는데 죄다 한번 부르고 나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회용으로 생을 마감한다.

깊은 음악성보다 다작을 추구하는 것이 미남이 작품 세계이다.


늘 미남이 창작곡만 듣다가 생일기념으로 특별히 내가 미남이 주제가를 만들어줄 참이었다ㆍ미남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자연스럽게 4분의 4박자 단조로운 곡이 만들어졌다.


미남이는 착하지요 미남이는 잘생겼지요

미남이는 의젓하지요 미남이는 밥도 잘 먹죠

미남이는 노래도 잘하죠 미남이는 춤도 잘 추죠


곡을 완성하고 나니 아직 정하지 못한 노래 제목이  저절로 떠올랐다.


<거짓말>



그리고 생일 저녁날 우리 집.


풍선이 매달린 선물상자를 앞에 두고 미남이는 저 생일축하 노래를 직접 불렀다. 나는 답가로 낮에 만든 자작곡 거짓말을 불렀다.


미남이는 <나 이런 사람이야~~~> 표정으로 축하 노래를 듣고는 아주 흡족하다는듯 진한 눈웃음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은지 손바닥 부르터져라 박수를 쳐댔다.


저승에서 소크라테스가 내려다 보고는 살아생전 헛수고만 했다며 주먹으로 퍽퍽 가슴을 쳤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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