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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물젤리 Feb 22. 2023

순례길은 어디라도 힘들다

네 살 미남이 가정 보육 하던 날

"할머니네 어린이집 왔네?"

현관문을 막 들어오는 녀석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럼 낮잠도 자야 해요?"


2XS 사이즈인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든 낮잠을 재워보려고 어린이집 스케줄대로 해보려다 단칼에 거부당했다. 이미 눈치가 백 단이다.


코로나로 또 한 번의 가정보육이 시작된 날이었다.

어린이 집에서는 잘만 잔다는 낮잠이 집에서는 남의 일이다.

그래서 나름 머리를  써서 짜낸 전략이었는데 너무 쉽게 노출이 됐다.

누군가 옆에 꼭 붙어서 같이 놀아 줘야 하는 녀석이  짧은 휴식을 쉽게 내어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낮잠 싫다며 눈물까지 찔끔거렸다.


미니 자동차가 담겨있는 바구니 두 개를 끌고 오더니 와르르르 침대 위에 쏟아붓는다.

침대 모서리부터 중장비차 자동차 토머스 기차 소방차 경찰차 종류별로 나란히 줄을 세우더니 주차장이 넓어서 자리가 비었다며 블록으로 침대 빈 곳을 가득 채운다.


중장비차는 직접 주차할 테니 자동차는 나더러 맡으라며 구역 지정을 해준다. 주차 관리로 바쁘다는 핑계로 블록통을 가져오는 일, 진입금지 표시판을 가져오는 일도 내 일이 됐다.

내가 잠시라도 쉬는 꼴을 그냥 두고는 못 보는 놀부심뽀로 나를 괴롭혔다.


날이 조금 풀리자 겉옷을 챙겨 입히고 집 근처 아파트 공사장으로 나갔다.

덤프트럭 포클레인트럭에 크레인까지 볼 수 있는 이곳은 유모차 시절부터 미남이의 성지이다.



장가방을 깔고 앉아 한참을 구경하던 미남이가 주춤주춤 일어서며 엉덩이를 털었다.

"할머니 이제 지하철 공사장 가요"


십 분 정도 갈어 내려가면 지하철 공사장이다.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우리 동네 근처는 온통 녀석의 성지가 됐다.

작정하고 성지순례에 나설 모양이다.


처음 만난 공사장에서 잠시 머물더니 배가 고프다며 미남이가 좋아하는  옥수수를 쪄서 파는 포장마차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절반을 쪼개 손에 쥐어주니 데크에 앉아 말끔히 먹고 또 한참을 걸었다.

"많이 걸을 때는 음료수를 마시는 거죠"

내 손을 잡이 끌고 편의점에 들러 음료 한 팩과 젤리 한 봉지를 샀다.


추운 날을 말하는 건지 득템 한 날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날은 밖에 의자에서 먹는 거죠"

 편의점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발을 까딱까딱거리면서 젤리랑 음료수를 먹어 치웠다.


고 또 걸어 두 군데 공사장을 지나 시장통에 도착했다.

나에게 돈이라도 맡겨둔 아이처럼 이번에는 뻔뻔하게 뻥튀기를 사내란다.

옥수수랑 뻥튀기가 든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 미남이 손을 꼭 붙들고 복잡한 시장통을 통과할 즈음 이번에는 요구르트 파는 곳에서 딱 멈춰 섰다.

걷는 길마다 미남이에게는 참새방앗간 나에게는 온통 장애물 통과 구간이다.

빨대 꽂은 요구르트를 은행 입구 계단에 앉아서 쪽 소리 나도록 빨아먹더니 빈 통을 나에게 휙 내민다.


주변을 한 바퀴 쓱 스캔하는가 싶더니 뒤에 있는 저곳이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다. 돈을 맡겨두기도 하고 없으면 빌려주기도 하는 은행이라고 했다.

순간 돈 없어서 장난감 크레인 못 사준다고 하면 은행 가서 빌려서 사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충분히 그럴 놈이다.


은행구경 가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행은 계단을 올라 2층에 있고 그날은 하필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온통 우리 둘에게 집중되는 시선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눈길을 피하며 쭈뼛쭈뼛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점장보다 간절하게 어서 손님이 오길 기다리며 시선 줄곳도 마땅치 않아 잠시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고요를 깨는 녀석의 목소리가 은행 안에 울려 퍼졌다.


"에이, 여기 별것도 없구만, 그냥 가요 할머니!!!!"


시킬 때곧잘 빼먹는 인사를 하필 이런 순간에는 잘도 챙겼다. 녀석 따라 나도 엉거주춤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은행을 빠져나오는 뒤통수가 사정없이 화끈거리고 거추장스럽던 마스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시장을 벗어나고 큰길 따라 계속 걸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낮잠 안 자도 좋고 이불에 녀석을 누이고 거실을 뱅글뱅글 돌며 끌고 다녀도 좋으니 걷기를 좀 멈추고 싶었다.


"이제 집에 갈까?"


"아니요, 끝까지 가야죠 오~~"


공사장 한 군데를 또 지났는데 가관이다.


"할머니 힘든데 좀 업어주면 안 될까요?"


한 손에는 순례품 담긴 가방을 들고 등에 업힌 녀석에게 말했다.

내일 오면 안 되냐고.

" 싫어요 , 저기 끝까지 가요,,"

끝도 없는 공사장인데 놀이터에서 놀 때처럼 가로등이 켜져야만 순순히 고집을 꺾을 생각인가 싶어 막막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지 엄마가 10년 넘도록 파랑 풍선 흔들며 덕질하던 가수 노래가 갑자기 떠올랐다.

 <이 미친×, 설마 이 노래로 태교를 한 거야?>


마트에 가서 가지고 싶은 장난감 골라도 된다는 조건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거기에 집까지 업어 모시겠다는 카드를 제시해 겨우 2차 협상에 성공했다.


출발을 집 아래로 한참을 걸어서 내려갔는데 동네를 한바퀴 돌고 위쪽으로  한참을 걷는 바람에 돌아오는 길도 다행히 내리막 길이다.


마트를 가려고 코너로 도는데 동네 작은 공사장에 포클레인 두대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등뒤에 있던 녀석에게서 급브레이크 제동이 걸리고 산책길 벤치에 녀석을 앉혔다.


혹사한 허리를 주무르다 그때서야 가을이 품에 들어왔다. 구름이 머무는 가을 하늘, 수채화 물감을 입은 듯한  단풍잎들.


나도 녀석을 닮았는지 혼자보기 아까워 포클레인 홀릭 중인 녀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미남아 저기 구름 봐봐. 여기 단풍잎도 너무 이쁘지?"

"우와 예쁘다"

시선을 포클레인에 고정한  말했다.






마트에 들렀다.

약속에 없던 마이쮸를 집어 들었다.

"이거 사도 돼요?"

"장난감 대신 이거 살라고?"


감으나 뜨나 구분도 안 되는 눈으로  나에게 겸연쩍은 눈웃음을 보내더니 마트 구석 진열장으로 가서  뭔가를 붙들고 끙끙댔다.


"할머니, 도와주세요"

몸을 숙여 끙끙대는 녀석의 손을 본 순간

, 허걱.

녀석이 붙들고 있는 건 주유소 놀이 세트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깊숙한 진열장 구석에 박힌 저 장난감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녀석이 계산대 위에 장난감 상자를 올려두니 결제를 기다리는 나에게 비싼 건데 구매를 할 거냐고 직원이  물었다.

장난감을 끌어안은 미남이는 집까지 업어주겠다는 약속을 잊고 마트를 나오자 소머즈가 돼서 달렸다.


퇴근해 온 미남이 엄마는 사달라는 거 다 사주지 말라며 인터넷서 사면 절반 가격이라고 날 타박했다.



몸도 지갑도 정신도 탈탈 털린 날 저녁식탁이다.

새로 산 장난감을 풀어서 녀석이 시키는 대로 저는 기사님 나는 주유소 사장노릇을 흉내 내다

잠깐 티브이를 켜주고 급하게 끓인 미역국을 그릇에  담고 있는데


"이모. 방학날짜 투표하래"

"1번은 29일부터 2번은 23일부터 휴일포함 9일인데 이모는 언제가 좋아?"


순간 국자 위에서 미역국이 조금 출렁댄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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