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지하다 (1)
나는 동성애, 혹은 그외 성소수자들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 친구나 지인 중에 성소수자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성소수자인 것도 아니다. 내가 성소수자를 접한 건 뉴스와 웹소설, 웹툰이 전부다.
내 부모님은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신 분들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적 웬 문란한 인간이 술자리에서 아버지한테 치근덕거렸던 기억 때문에 성소수자 말만 꺼내도 불쾌해하시고, 어머니는 성소수자란 질병이라고 단언하신다. 특히 어머니의 경우, 성소수자를 모조리 ‘아픈 사람’이라고 보고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내가 성소수자라면, 내 어머니처럼 나를 불쌍하게 보는 것보다 차라리 이해 못 하겠다고 거리를 두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 같다.
내 부모님 두 분 다 건실하고 존경 받을 만한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할 때, 이런 두 분의 시각이 특별히 차별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두 분을 기준으로 한국 일반 대중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겠거니, 하고 가늠하고 있다. 그리고 나 같은 경우 나름 신세대에 속한 편이고 공부도 많이 했으니 부모님보다 동성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긴 하지만, 부모님과 나의 차이란 아주 가느다란 실금만할 뿐 여전히 무지에 갇혀있다는 건 똑같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연애를 안 해봤다는 이유로 나한테 연애 문제를 털어놓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고 내 가족들도 이처럼 성소수자에 대하여 배척하니, 내가 성소수자를 이해한다고 하면 기만이고 잘난 척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그들’이라는 말로 나와 성소수자 사이에 딱딱한 선을 그을 게 아니라, 감히 성소수자란 이유 하나로 사람을 미워한 적은 없노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봤을 때, 어떤 이유를 대며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큼 피곤하고 소모적인 일은 없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직장에서든, 학교에서든, 되도록 사람의 좋은 면만 보려고 하고 나쁜 면은 흐린 눈을 뜨고 못 본 척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흐린 눈을 뚫고 나의 뇌리에 무지를, 잘난 척을, 우쭐함을, 열등함을 박아넣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2배로 밉다. 미운 자질을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밉고, 나로 하여금 마음을 써서 미움이란 활동을 하게 만든 것이 밉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성소수자를 미워한다면, 그건 그 사람이 성소수자라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그 사람이 무지하거나, 잘난 척하거나, 우쭐하거나, 열등하기 때문에 미운 거다.
그런데, 성소수자라는 특질을 무지와 잘난 척과 우쭐함과 열등함에 결부시키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본 적 없지만, 미국에서 간혹 동성애자임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이 있다. 그들은 현 사회 질서에 대해 무지하고, 자기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자랑하고(혹은 그걸 오픈할 만큼 스스로 자신감에 넘쳐 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쭐해하며, 동시에 지독한 열등감을 폭발시키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 1000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도 1000가지라는 말이 있듯이, 1000명의 동성애자가 있다면 자기가 동성애자임을 나타내는 방식도 1000가지가 넘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중 한 두 가지, 혹은 서너 가지의 방식을 미워한다고 해서 내가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사람인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내가 동성애를 차별하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당한다면 놀라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내가 차별과 그에 부속품처럼 따라오는 박해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 역사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 공유하는 감정이지 않을까 싶다. 저 유명한 한강 작가는 일찍이 제주 4.3 사태라던가, 5월 광주 항쟁에 대해 쓰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디까지 잔악무도해질 수 있는지 서술한 바 있다. 나는 그런 무도함이 또 한 번 한국인의 손에서 한국인을 향해 자행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한 번 일어나는 건 어쩌다 한 번이지만, 두 번 일어난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만 매번 피해자를 바꿔서 발생할 뿐이다. 그 자유로운 미국에서도 1980년대에는 “동성애자를 직장에서 해고해도 죄가 아니다”라는 법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동성애란 불법이었기 때문에 경찰이 체포해 갈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한국은 이미 무수한 폭력 사태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겪은 나라다. 굳이 동성애를 가지고 또 한 번 비슷한 사태를 벌일 이유가 있을까? 미래에 또 이런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조마조마해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라고, 누군가는 비판할지도 모른다. 아니, ‘비판’이라는 점잖은 용어를 쓰면 다행이겠지. 나를 조롱하거나 가볍게 악의 없이 놀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손 놓고 있다가 일어난 게 바로 세계 2차 대전이고, 유대인 학살이고, 4.3사태고, 5월 광주 항쟁이고, 12월 계엄 사태였다. 그 어느 것도 예고편을 틀어주고 웅장한 BGM을 깔아주면서 “자, 이제부터 준비하세요. 조만간 믿을 수 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하고 방송하지 않았다.
최근 동성애 관련 축제나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이에 대한 반대 운동도 점점 거세지고 있는 추세라고 들었다. 그들 중 하나라도 피를 뿌리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누구 하나 다치지 않기를, 다들 팻말을 내려놓고 점잖게 앉아, 교양 있는 목소리로 서로의 입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헤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따지자면 우리는 서로 남남이다. 저 사람이 이성애자이건, 동성애자이건 내일 내가 돌연사하지 않는 한 태양은 뜨고 진다. 그런데 굳이 원치 않는 관심을 불처럼 퍼부으면서 그 불이 타인의 존재를 싸그리 태워버리길 바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서로가 자기 할 일에만 충실해도 모자랄 판에 상대방이 없어지길 바랄 만큼 서로에게 관심을 준다는 사실이 말이다. 왜 우리는 남남이면서 서로를 남남처럼 대할 수 없는지, 깊이 생각할수록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지해서다, 무지해서 그렇다, 무지에서 깨어나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염불 외우듯이 그렇게 중얼거린다지만, 사실 그 말이 썩 공감이 되진 않는다. 팻말을 들고 나가서 시위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다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너는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싸움만 불러일으키겠지. 그들에게는 다른 말이 필요하다. ‘너는 무지해서 그렇다’가 아니라, ‘네가 알아야 할 이야기가 더 있다’라는 말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