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이라 편하지?"
애가 외동이야? 외동이면 자기 시간 많겠다~
부러워, 편하겠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둘,셋을 안 키워봤지만 주변의 다둥이 엄마들을 보면 첫째 등교,둘째 등원,셋째 등원, 오후엔 하교하원...늘 바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이 하나만 픽업하는 수고로움 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편하다는 것은 틀렸다.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늦게 보낸 편이다. 대학원 수업에서 관계와 애착에 대한 이론에 깊이 공감했고, '불안정 애착'의 어른으로 자란 내가 내 아이는 '안정형 애착'으로 키우고 싶어, 나대로는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불안이 높은 나의 시간을 수용하고 수련하며 아이와 함께하는 나날 중, 어느 날 지인에게서 "일 안하고 집에서 애 하나만 보고 있어서 편하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맥락 상 나에게 상처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고, 그 만큼 일하는 것이 힘들다는 한탄임을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다. 내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인데 내가 인생을 잘 못 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그날부터 하루에 한두번은 울컥 울컥 눈물이 쏟아지는 시간이 생겼다.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품고 있는 것은 둘 다 힘들어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로소 어린이집을 보냈고, 나의 시간이 1-2시간씩 생기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 다르 듯, 모든 엄마의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유독 엄마일 때는 사지선다의 보기 속에서 어떤 엄마인지 결정되는 것 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사정과 성격과 기질이 다를터인데, 엄마로써 갖춰야되는 자질 몇가지에 갇혀서 숱한 오해와 죄책감이 생긴다. 나는 "일 안하고 애 하나만 키우는 편한 엄마" 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이 억울했다. 나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이를 돌봐 줄 친정엄마가 없다. 또한 나를 엄마대신 키워주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며 죽음에 대해 늘 사유했고, 기질적으로 불안감이 높은 편이다. 이런 내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주고 싶어서 흐르는 물을 거스르는 노력을 하고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애가 하나라서 편한 것이 절대 아니다.
'자식을 낳는 순간부터 행복한 족쇄에 묶이더라'는 과거 어떤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비로소 아이를 낳고나서야 '행복한 족쇄'의 의미가 가슴 깊이 박혔고 그보다 더 자녀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이제는 외동이 편하겠다는 말에 대답하고 싶다.
자식이 하나건 둘이건, 우리 모두 족쇄에 갇혀있는 건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