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전체의 관점에서 : 빅뱅으로 우주 탄생 직후에 생명체가 등장하여 아주 잠시 동안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는 아무 관심도 없었고, 생명체는 곧바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대중 과학 전도사'로 불리는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와 인간에 대한 고찰을 풀어낸 책이다. 우주의 시작과 종말을 과학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1.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잉크 한 방울이 물 잔 전체에 퍼지듯 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한다는 법칙이다. 확산은 엔트로피 증가의 좋은 예시이지만, 조금 확장하자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세상 모든 일의 "방향성"을 설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물 잔 전체로 퍼진 잉크는 시간이 흐른다고 다시 한 방울로 모이지는 않는다. 많이 먹으면 체중이 늘고, 로켓이 불을 지면으로 뿜으면 위로 날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그 사건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방을 정리하는 사건과 같이, 가끔은 무질서도가 감소하는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방이 정돈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엔트로피가 감소한 것일까? 감소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법칙이라 할 수 없다. 어머니께서 방을 정리하시는 과정에는 어머니께서 점심에 드신 현미밥이 호흡을 통해 ATP로 합성되었고, 이를 통해 팔과 다리 근육이 수축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어머니 몸에서 증가시킨 엔트로피가 방의 감소한 엔트로피보다 많기 때문에 우주의 전체 엔트로피는 증가했다. 엔트로피 증가는 단일 사건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계(system)의 엔트로피 감소와 증가의 총합이 늘 +라는 개념이다.
생명은 또 다른 엔트로피 감소의 대표적인 사례다. 세포,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세포 내 핵/리소좀/리보솜 등등이 모여 각 조직, 장기와 인체를 이룬다. 각 구조들은 너무도 질서정연하고,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 생명의 질서정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먹고 마시고 호흡해야 하며, 이는 신체의 엔트로피는 낮출지언정 전체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하는 방향이다. 생명의 탄생 과정이나 유지 방법에도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생명체란 기본적으로 주변의 에너지를 흡수해 스스로의 엔트로피는 낮추고, 주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생체 기계이다.
물리학 법칙들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사건의 방향성을 설명하는 만큼, 시간의 개념이 포함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엔트로피는 "확률"의 문제이다. 잉크가 모여서 유지될 확률보다 퍼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사건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시간이 무한하다면, 아주 낮은 확률의 일도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물 잔 속 잉크는 확률적으로 잔 전체에 퍼지는 것이 가장 높은 엔트로피 상태를 갖게 되는 것인데, 시간이 무한하다면 한 번쯤 다시 한 방울의 잉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엔트로피 감소의 비용을 "시간"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2.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역학
과학자들은 세계를 세 영역으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뉴턴역학이 지배하는 보통 크기의 영역과, 별 이나 우주를 다루는 아주 큰 영역, 그리고 양성자나 전자 등을 다루는 아주 작은 영역이 그 세 영역이다. 관측 장비나 실험 장비가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의 세상은 뉴턴역학으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했다. F=ma로, 물건을 던지고 받고 밀고 당기는 모든 운동이 수학적으로 설명 가능했다.
태양과 지구, 은하 등의 아주 거대한 물체들의 움직임을 설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냈다. 물질이 아주 많은 영역에서는 중력이 엔트로피를 좌우한다. 거대하게 모인 물질들은 중심부로 떨어지면서 중심부의 온도를 높였고, 핵융합이 일어날 만큼 온도가 높아지면 빛을 주변으로 방사하는 별이 되기도 했다. 별이 회전함에 따라 가벼운 가스는 멀리 날아가 뭉쳤고 (목성, 토성), 무거운 물질들은 별 가까이에서 나름의 중력으로 뭉쳤다(지구).
아주 작은 영역에서도 관측과 실험이 진행되었다. 물질을 이루는 아주 작은 단위인 전자와 원자핵이 발견되었는데 전자 한 개가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확률적 존재"가 알려지면서 양자역학의 포문도 열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이 실험을 통해 사실로 증명되면서 아주 작은 영역에서의 역학 또한 점차 발전하고 있다.
3. 의식의 과학적 설명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이 아주 큰 세계와 미시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불러왔다면, 과학자들은 "의식"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혁명적 발상("지적 혁명")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마음이 느끼는 감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자신이 인간임을 느끼는 내면의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아직까지 없다. 컴퓨터와 카메라를 통해 "노란색"은 구분할 수 있지만, "노란색이 주는 느낌"은 어떤 방향으로 구현이 안 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Hard problem, 어려운 문제'로 부르기도 한다. (반대 개념인 Easy problem은 기억이 저장되고, 자극에 반응하고, 행동이 결정되는 것을 규명하는 문제로 어느 정도 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설명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 Hard problem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고, 전통적인 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언젠가 설명 가능할 것으로 주장하는 의견도 있으며, 아예 새로운 시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다양한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의식을 설명하는 이론 중 "마음의 이론, Theory of Mind"을 잠시 설명하자면, 우리 뇌는 빠른 반응을 위해 외형이나 데이터를 단순화시켜 받아들이는 경향을 갖도록 진화했는데 (시각 중추가 색의 경계만을 인식하고 나머지는 뇌가 알아서 채운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첫인상의 중요성과도 연결된다.) 이런 단순화가 "자신의 마음"에도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어떤 느낌을 갖게 될 때까지의 디테일을 무시하도록 우리 뇌는 진화했는데, 우리가 이것을 의식으로 느낀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것 같은 정신 모형이 육체를 초월한 마음의 존재를 부각시킨다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의 분야에서도 "의식"이 거론될 때가 있는데, 유명한 "관측의 문제, Measurement problem"에서다. 양자역학적으로 모든 입자는 확률적으로 존재하는데, 이런 확률은 관측 시 붕괴된다.(우리 의식은 하나만의 결과를 인지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주된 설명은 광자/외부 자극 등의 상호작용이 확률을 없애는 것이지만, 우리의 의식이 확률 중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삭제한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의견의 매력 포인트는, 이를 반증하기 위해서도 의식이 개입될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반박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4. 자유의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Uncertaintyprinciple"는 작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확정될 수 없다는 원리로, 명칭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인 색깔과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하는 듯하여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곳에 (잘못)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고전역학 못지않게 결정론적이다. 가능한 List가 다양해졌을 뿐, 확률이 의식에 따라 변할 수는 없다. "의지"를 통해 전자가 어떤 공간에 존재할 확률을 50:50에서 40:60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무생물과 다르게 주어진 자유가 있는데, 바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위해 행동하고, 그 감정에 반응하는 자유이다. 나의 행동(입자의 거동)은 자유의지와 무관하지만, 나의 특별한 입자 배열은 나만의 독특한 방식(자유)이 될 수 있다.
자유에 대해 자연과 상관없는 어떤 궁극적인 기원이 있다는 생각보다는, 물리학 법칙 내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이 있다는 관점 변화가 필요하다.
5. 이야기와 종교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런 특징이 진화의 결과라는 의견도 있고, 진화의 부산물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야기를 통한 간접경험은 인류가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강력한 이야기들은 "신화'라는 이름으로 묶였고, 여전히 종교의 기원 자체는 아리송하지만, 생존 경쟁에서 최후 승리를 거둔 두뇌는 종교를 포용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종교가 적응력을 높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개인의 관점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무력함을 불러일으키고 의지나 행동 면에서 부정적 영향을 준다는 것은 여러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결과론적이지만 인류는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쪽으로 진화해 왔고 그 결과 이 세상은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이야기와 지침으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여기에 종교의 교리가 더해져 믿음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생존"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두뇌는 복잡한 처리 과정을 거쳐 다양한 믿음을 양산해 왔지만, 그 믿음이 항상 진실과 일치하는 쪽으로 진화하지는 않았다. 진실보다 생존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종교를 사전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은유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감정적/사회적/문화적으로 큰 이익이 있다.
6. 아름다움과 상상력
아름다움의 추구에 대해 다윈은 진화론적 설명을 고수했다. 공작새의 꼬리가 아름다울수록 "성 선택"에 유리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의견으로는 각 감각기관들이 진화하면서 발달의 Junkfood로 시각이나 청각의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이론도 있고, 사회성의 확장이 사피엔스를 최종 승자로 만든 것이 자명한 만큼 사회성의 확장에 예술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예술에 감동한 경험은 죽음, 탄생을 대할 때의 감정만큼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에, 예술이 내면의 진실을 다룬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Yip Harburg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를 생각하고, 음악적 선율을 들으면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러나 노래를 들으면 '생각을 느낀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예술이 단지 어떤 입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 등을 표현하는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 예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7. 지속성과 무상함
우주의 팽창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언젠가 암흑물질의 척력이 물질의 중력을 압도하는 시기가 되면, 공간이 쪼개지는 "The Big Rip"을 예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공간의 확장 속도가 빛보다 빨라지는 시간이 되면, 밤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를 "우주 지평선"이라고 표현한다. 지금 보이는 별들, 하늘은 원시 인류의 낭만으로 남을 것이다. 우주가 팽창할수록 천문학은 퇴보한다.
우주의 미래를 예측해 보자면, 힉스장 값의 변화(모든 질량, 전하, 물질의 특성이 바뀌고 세상이 재정의 될 것), 암흑 물질의 값 변화 (+로 서로 밀어내던 암흑 물질의 값이 -로 변화하여 Big Bang과 반대되는 Big Crunch가 일어남. 그리고 다시 Big bang이 일어난다는 순환 우주론) 등을 그 끝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멀티버스로 우리에게 익숙한 '무한 다중우주론'도 있다. 공간이 무한하다면 당연히 동일한 우주가 또 있을 것이고,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연을 여러 번 겪은 우주도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확률이 그렇게 낮은 것은 아니었다고 여기는 날이 올까?)
그리고 나아가서 볼츠만 두뇌(낮은 확률로 엔트로피가 감소하여 우연히 형성된 두뇌)를 고민하게 된다. 내가 이런 볼츠만 두뇌가 아니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어떤 낮은 확률로 발생한 것이 나라면,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는 생각하는 것 같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 같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8. 존재의 고귀함
우리는 생존을 넘어 우주의 탄생과 종말을 서술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무심한 자연을 초월하려는 것 자체가 가치와 의미가 있다.
필사(必死)가 의미를 갖는다는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영원을 추구한다. 나의 하루가 '1년 후 죽는 것' vs '1년 후 모든 인류가 멸종하는 것' 각각의 조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지 생각해 보라. 우리 삶에서 어떤 것이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기본 전제를 요한다. 미래에 인류가 존재해야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의 가치는 주변 사람들의 이해에서 오며, 그들의 마음에만 존재한다.
빅뱅으로 우주 탄생 직후에 생명체가 등장하여 아주 잠시 동안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생명체는 곧바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감상
이 글을 작성하는 6월 초, 대한민국의 여름에는 생명이 넘친다.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늘이나 보도블록 틈 사이에서도 들풀이 자란다. 나무나 풀이 우거진 곳에서는 햇빛을 한 뼘이라도 더 받겠다는 욕심인지 나뭇잎과 가지들이 팔을 내뻗고 있다. 논에서는 밤마다 개구리 소리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울려 퍼지고, 코로나 제한이 풀린 만큼 사람이 갈 수 있는 모든 곳에 인파가 넘친다. 이처럼 징그러울 정도로 생생한 생명이 우주 입장에서 찰나의 반짝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삶의 의미가 후손과 주변 사람의 존재 덕분이라는 것으로 작가는 결론짓는다.
신, 자유의지, 의식, 영혼 등의 존재가 점차 부정당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없는 것이 되는 세상이다. 조만간 뇌의 작동 방식 또한 양자역학적으로 설명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말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날이 올까?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정말 입자의 무더기였을 뿐이었고 우리의 느낌, 감정, 생각 모두가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아닌, 입자의 상호작용일까? 생명이 모두 설명 가능해져도, 여전히 생명은 가치가 있을까?
한편으로는 작가가 참 행복한 삶을 살았나 보다 생각되기도 한다. 내 삶을 묵직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순간순간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 절망 등을 느끼는 것이 삶 아니던가. 우주, 은하가 있고 전자, 원자가 있듯이 시간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도 궁금하지만, 길어야 100년 내외인 내 삶의 하루하루 또한 너무 값지다. 내 뇌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도, 나의 감사할 수 있음과 사랑할 수 있음은 내게 너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