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3부작 (1/3)

"자립할 것"

by Focumble

'미움받을 용기'는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가 수립한 '개인심리학'의 개론서에 가깝다. 저자인 기시미 이치로는 그리스 철학을 전공하고 이후 아들러 심리학을 공부해 일본 아들러 심리학계의 대부가 되었다. 저자의 전공이 그리스 철학이어서 그런지, 본 책은 현인과 제자의 대화 형태로 아들러 심리학을 표현한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은, 사람은 행복하기를 결정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들러는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다음의 목표를 제시한다:

1. 자립할 것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 것


1. 자립의 과정 : 과제 분리 - 자기 수용 - 타자 신뢰 - 타자 공헌 - 공동체 감각

기본 가정 : 인간은 변할 수 있다.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 내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과정 : 일의 과제 해결 - 교우의 과제 해결 - 사랑의 과제 해결

기본 가정 : 인간의 모든 고민과 행복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 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



(** 위의 개념들은 모두 책에서 설명하고 있으나, 위와 같이 분류한 것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견해임)


이번 글은 1. 자립의 과정에 대한 내용이고,

다음 글은 2.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사는 과정,

그리고 마지막 글은 아들러 심리학의 "교육"에 대해 논의하겠다.



1. 자립의 개념


아들러 심리학에서 '자립'은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것', 또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 등으로 표현된다.


모든 사람의 시작은 신생아이고, 신생아는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은 누구나 '사랑을 받기 위한 생활양식(태도)'을 선택하고, 이는 자기 중심성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시작은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자립, 즉 자기 중심성에서 탈피한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을 추구하던 생활양식(태도)으로부터 벗어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미 또한 뒤에서 더 논의하도록 하겠다.



2. 기본 가정 : 인간은 변할 수 있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 나를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은 매우 친숙하다. 아들러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데, 과거의 사건은 지금의 나에게 아무 영향이 없으며, 다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핑계가 될 뿐이라고 단언한다.


학창 시절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는 은둔형 외톨이를 예로 들어 보자. 아들러는 왕따의 경험이 그 사람을 은둔형 외톨이로 만든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처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왕따의 경험을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트라우마나 과거가 지금을 결정한다면, 우리에겐 변화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아들러는 인간은 변할 수 있고, 따라서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결정론"은 폐기되어야 했고, 그 대안으로 아들러는 "목적론"을 제시했다. 그 목적은 선악과 관계가 없는데, 불행한 사람은 불행이 "목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은 폭력이 "목적"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그 목적이 개인에게 (무의식적으로라도) 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편하다는 이유로 이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선택의 방식을 아들러는 "생활양식"이라고 표현한다. 폭력적인, 분노/짜증이 많은, 식탐이 많은, 우울한, 건강하지 못한, 스스로를 싫어하는... 등등의 생활양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를 버리겠다는 결심, 즉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용기"를 통해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변하지 않는 이유 역시 "결정론"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듯, 인간은 누구나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를 자유자재로 다시 사용한다. 즉, 내 "지금"이 과거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이야기는 '나쁜 그 사람' 또는 '불쌍한 나'의 이야기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인데 말이다.



3. 자립의 과정

1) 과제의 분리

자립은 과제의 분리로 시작한다. 과제의 분리는 어떤 문제 발생 시 '누구의 과제인가'를 고민하는 것으로,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부모들은 종종 아이에게 "밥을 잘 먹어야 키가 크지" 또는 "공부해야 나중에 좋은 대학 가고 성공한 삶을 살지"라고 이야기한다. 그 부모의 내면에는 키가 작은 아이, 그리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내 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밥을 먹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그 아이의 과제이다. 과제를 분리하되, 아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장 결정적인 과제의 분리는 '나'에 대해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분리이다. 이 대목에서 책 제목 '미움받을 용기'가 등장한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나아가 그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반면에 사랑받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쉽게 타인의 기대를 삶의 이정표로 삼는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욕망으로, 칸트는 이것을 "경향성"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언급한 신생아의 자기 중심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향대로, 충동대로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내게 최선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타인의 과제로 분리시켜야 한다. 타인의 평가를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는 대가를 치러야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다. 즉 진정한 자유는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고, 이 '미움받을 용기'는 자유의 시작, 행복을 결정하는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2) 자기 수용

자기 수용은 "하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변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자기 수용이며, 아들러는 이를 '긍정적 포기' 또는 '평범해질 용기'라고 불렀다.


인간은 모두 특별한 존재가 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앞서 이야기한 칸트의 경향성과도 일맥상통한다. 특별한 존재란 특정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도록 하겠다). 평범해질 용기는 무능한 것과 다르게, 우월성 과시가 필요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비교를 통해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건전한 비교의식, 열등감은 타인이 아니라 '이전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나'를 기준으로 변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자기 수용이다.



3) 타자 신뢰

과제의 분리와 자기 수용이 이루어졌다면,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이때 신용과 신뢰의 구분이 필요하다. 신용이란 누군가를 믿을 때 그 조건을 믿는 것이다. 신용카드를 생각하면 쉽다. 상환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만큼의 사용 한도를 허락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뢰는 조건 없는 믿음이다. 그 사람을 믿는 나를 믿는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사람이 내 신뢰를 배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 사람의 과제이며,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건 없는 믿음, 신뢰를 주는 것뿐이다.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을 때, 내 주변의 모든 관계는 "친구"가 된다. 물론 이 때도 "믿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며, 용기를 낸다면 그 어떤 상대라도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신뢰할 수 있다.



4) 타자 공헌

타자 공헌은 아들러 심리학의 "길잡이 별"로 소개될 정도로 중요한 개념이다. 우선 아들러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한다.


아들러는 행복이란 "스스로 가치 있음을 느낌"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또는 "나는 누구에게 도움이 된다", 즉 '타자 공헌'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자 공헌'과 유사한 느낌을 타인의 인정, 즉 받는 사랑을 통해서도 받을 수 있으나, 앞서 논의한 대로 이것은 타인의 과제이므로 자유 없는 행복 추구라고 할 수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자면, 내가 실제로 타인에게 유익한 존재인가의 판단 역시 타인의 과제이다. 결국 실제로 공동체에 유익한가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 감각, 즉 "공헌감"이 곧 "행복"이다. 나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면, 누구든 자유를 선택하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내가 과거에 이룬 것, 내가 미래에 이룰 것을 통해서 '공헌감'을 얻으려는 생각 또한 옳지 않다. 아들러는 인생 최대의 거짓말로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인생은 과거와 미래에 희미한 빛을 비추며 무언가를 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내가 지금까지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내 삶은 의미가 없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인가? "지금"에 충실히 산 결과가 지금 거기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삶은 언제든 완결된 행복한 삶이다.



5) 공동체 감각

타자 공헌, 즉 공동체 내 나의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함에 있어 '공동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동체 개념에서 공헌감은 '소속감'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공동체 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그 공동체 내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속감'이 인간의 기본적 행복 추구라고 할 때, "타인이 나를 어떻게 특별히 보느냐"를 통해 소속감 (공동체 내 특별한 지위 획득)을 얻는 것은 나 이외에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 생활양식, 즉 자립하지 못한, 자유롭지 못한 생활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공동체의 일원, 전체의 일부이다.


공동체는 가족, 학교, 직장 등 관계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러한 작은 공동체들은 파괴되기 마련이다. 작은 공동체 내 소속감이 파괴되었을 때, 더 큰 공동체의 소속감이 필요하다. 국가, 인류, 나아가 지구와 우주 내에서도 나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고 아들러는 이야기한다. 이때 타자 신뢰, 즉 모든 타인을 친구로 여기는 것은 "내가 있을 곳은 여기"로 느끼는 데 큰 역할을 한다.



4. 자립 이후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고 한다. 즉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를 느낄 때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용기, 타인의 반응과 상관없이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미움받을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이는 더 큰 공헌감, 소속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순환을 위해, 처음에 그 고리 내로 뛰어드는,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과제 분리와 자기 수용을 통해,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게 스스로 가치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을 조건에 상관없이 신뢰하며, 이를 통해 큰 공동체 내 공헌하고 있다는 공헌감을 갖는 것이 행복이다. 이는 "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받을 것이다"는 성경의 내용과도 연관되어 있다(책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개념은 알겠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길잡이 별은 "타자 공헌"이다. 지금 나의 불만들의 원인을 분석하지 말고,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 일반적인 인생의 의미는 없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타자 공헌을 목표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움받으며 자유롭게, 지금 여기에 집중해 완결된 찰나를 즐기며 의미를 부여하자. 나의 세계는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





이번 글은 "자립" - 개인의 측면에서 행복에 도달하는 단계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다음 글은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 관계의 측면에서 행복에 도달하는 단계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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