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 6

EP 6. 누나

by 철쭉
아홉 살 생일에 갑자기 나타난 엄마.

나는 왜 그날 엄마의 질문에

아빠가 더 좋다고 대답해 버렸을까.

사실 엄마가 훨씬 더 좋은데.

왜 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왜 날 그렇게 보내버렸었냐고

물어보지 못했을까.

왜 다시 가지 말라고 붙잡지 않았을까.


근심 없을 아홉 살 어린 소년의 머릿속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후회만이 가득했다.








이후 집안사정은 완전히 악화되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위해 여기저기

돈을 끌어다 썼는데, 폭싹 망해버렸고

빚쟁이 몇몇이 우리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은 주소지를 옮겼는데,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와 누나는

법적으로 주소지에 해당되는 초등학교에

다녀야 되는 것이 의무였기에

계속해서 전학을 다녀야만 했다.


나는 6년의 초등학생 시절동안

다섯 학교를 다녔다.

아직 살면서 이 시절 나보다 많이

전학을 다닌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부모는 꼭꼭 숨어버리면 찾기 어렵지만

학생은 학교에 나가야 하니,

빚쟁이들은 누나와 내가 다니는 학교를

알아내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집이 어딘지 미행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2학년 이후로 누나와 나는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는데,

친척집, 아버지의 친구집,

다니던 학교에서 친해진 친구집에

얹혀살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거처를 계속해서 옮기는,

정말 떠돌이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몸도 마음도 둘 곳 없던 가엾던 그 시절,

내 유일한 기댈 곳은

이 시절을 함께 하고 있는 '누나'였다.









내가 4학년 때 누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던 것은,

이러한 최악의 환경 속에서 자랐는데도

전교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누나는 공부를 잘했다. 미스터리했다.



2년 정도 살았던 지역에서 새어머니의 이모가

더 이상 우리를 맡아줄 수 없다고 하여,

본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디 살 곳이 없는

황망한 처지가 되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 중학교에서 전교 1,2등을 다투었던

누나의 선의의 라이벌이자 가장 친한 친구의

부모님이 우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당분간

우리를 맡아주시기로 하여 그 집에

들어가 1년 정도를 얹혀살게 되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고마운 어른들이었다.




그분들께는 세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나 있는 가족이었는데,

항상 웃음이 넘치는 화목한 집안이었다.

식사시간에도, 저녁에 다 같이 안방에 모여

드라마를 보는 시간에도 항상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그 속에 누나와 나도 함께 있었다.



그 집에 있었던 시간 동안,

혹시 우리가 위축될까 봐 누나 친구의 부모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들을 대하는 모습과

아무런 차별 없이 대해주셨다.

아니, 항상 오히려 티 나게

누나와 나를 자식들보다

더 챙겨주려 노력하시는 모습이셨다.






그 사려 깊은 마음은 너무나 감사했지만,

우리 집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아닌,

내 남매들이 아닌

이 행복한 가정에 껴있는 누나와 나는,

안타깝게도 항상

스스로 마음이 불편한 이방인들이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남 부러울 것 하나 없는

화목한 가정의 전교 1등 친구 집.

그리고 그 집에 얹혀살아야만 했던

부모도 없고 집도 없는 불쌍한 떠돌이 2등 누나.





" 누나,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





"... 3년,

3년만 참으면 가족들과 다 같이 살 수 있어.

그러니 우리 힘들어도 좀만 더 참자. "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누나는 내가 물으면 항상 3년만 참자고 했었다.

3년만 참으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라고.

더 이상 옮겨 다니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그 당시 누나가 대답한 3년이란 시간은

대체 어떤 의미였을지 한 번씩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나에게 중학생인 누나는

이 힘든 시간이 금세 끝날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겠지만,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단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3년이란 대답은 인정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리고 제발 끝났으면 하는 희망이 반반씩 섞인.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던 것 같다.



좋은 대답이라 최고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 상황이 당장 끝날 것이라는 헛된 바람도,

또 이 상황이 너무나 길 것이라는 절망감

둘 중 어떤 것도 심어주지 않는,

어린 동생을 위해 누나로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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