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민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청원 답변이 왜 이러냐며 항의하는 민원인께 둘러대는 말을 만드느라 한참 진땀을 뺐다. MBTI가 's'인 나로서는 생각할 시간을 줘야 제대로 된 답변을 하는데, 박박 성질을 내시는 민원인에게 허둥지둥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다 혼쭐만 난다. 그나마 나는 중앙부처에 근무해서 대면 민원은 없어서 망정이지, 민원인이 찾아오는 상상을 하면... 생각만 해도 의원면직이다.
사실 중앙부처에도 종종 찾아오는 민원인이 있다. 엄연히 민원실도 존재하고. 나에게 민원실 전화번호는 저승사자 직통번호다. 민원실에서 걸려오는 내려오라는 전화에,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방문인데, 그냥 돌려보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빌어봐도 소용없다. 내 눈앞에 등장한 민원인들은 역정을 내시거나, 우시거나, 내가 도와줄 수 없는 재량밖의 것들을 요청하시는데, 나야말로 울고 싶다. 내가 울상이 되어 민원실로 불려 내려갈 때마다, 청원경찰분도 걱정이 되는지 민원실 근처를 서성이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시는데, 내가 봐도 나는 참 찜 쪄먹기 쉬운 공무원으로 보이겠구나 싶다.
재작년부터 기존의 국민신문고에 이어 청원 24라는 시스템이 생긴 뒤로 민원 업무는 하나 더 추가되었다. 들어오는 내용을 봐서는 국민신문고랑 다를 바가 없는데, 처리 절차는 더 복잡하니 실무자 입장에서는 어리둥절이다. 민원인 입장에서는 본인의 의견을 피력할 플랫폼이 하나 더 늘었으니 좋을지 모르겠다. 어디에 제기하던 같은 담당자에게 배부된다는 사실을 캠페인 같은 걸로 알려야 하나 싶다. 전 부처에 민원을 넣으신 분 덕분에 하루에 하나씩 나한테 똑같은 민원이 배부되어 짜증 났던 경험이 있다. 나는 '1'이 떠있는 걸 못 견디는 강박이 있어서 들어오는 민원은 야근을 해서라도 처리했는데, 그 경험 이후에는 숫자가 쌓여도 견디는 인내력을 얻었다(동일한 민원은 병합해서 처리를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내가 담당하는 업무에 이슈가 생겨 한 달 사이에 수백 건의 민원을 처리했었다. 대동소이한 내용의 신문고 민원을 처리하자니, 내가 아닌 AI가 하는 것이 더 적합하고 빠른 답변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와중에는 담당자를 고발하겠다는 식 또는 욕설이 섞인 협박민원도 있었다. 공무원도 서비스직이라 민원은 숙명이라지만 누가 봐도 담당자 괴롭히는 내용을 보자 하니 괴롭기만 하다. 물론, 실제로 민원인에게 고발을 당해 법원을 왔다갔다한 주무관님의 조언을 들어, 답변은 납작 엎드려서 내가 잘못했으니 노여움을 푸시라는 내용으로 작성했다. 물론, 내가 진 거 같은 기분에 무척이나 괴로웠다. 일터에 올 때는 자존심 주머니를 사무실 문에 걸어 놓고 오는 거라고 했는데, 직장동료와의 관계를 넘어서 민원인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내가 물러터져서 그렇지, 싸움꾼으로 성장한 동기들도 많은데, 더 괴롭힘을 당해봐야 내가 싸움꾼으로 성장할까 싶다.
요새 공무원들이 안 좋은 선택을 많이 하다 보니, 기사화도 많이 되고, 공무원을 보호하는 쪽으로 민원 제도가 변화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체감은 안되지만. 내가 민원 처리자가 되니, 사소한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담당자의 고충이 생각나 조심스럽다. 이 일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담당자에게 극강의 고통을 줄지 알아서 오히려 그걸 잘 활용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민원인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담당자의 불필요한 소진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되면 좋겠다. 이 요청마저도 민원 제도 담당자에게는 민원이라 죄송한 마음이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