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다 뜻한 바가 있어 승진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내가 다니는 직장의 승진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가산 점수를 획득하여 경쟁하는 방법과 승진시험에 응시하는 방법이 있다. 가산 점수로 승진하려면 점수를 많이 따놓아야 하는데, 난 그런 점수가 없었기에 승진시험을 치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승진시험은 전공과 논술 두 과목을 치러야 했다. 전공 시험은 두꺼운 전공책 두 권을 거의 외우다시피 해야 했고, 논술은 관련 이슈를 논(論)해야 하는 것으로 낯설고 준비하기도 너무 어려웠다. 경쟁률 또한 높았다. 시험 준비 기간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공부보다도 '날고 긴다는 응시자들 속에 별것 아닌 내가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왕 도전하기로 한 것. 이를 악물고 공부하였다.
1,000원 넘어가는 볼펜에는 대개 손잡이에 고무가 감겨 있는데, 그 고무의 색다른 유용성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나 같은 경험을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글씨를 쓰고 또 쓰면 가운뎃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 그 물집이 터져서 굳은살이 박인다. 물집이 생기기 시작할 때, 이 고무가 가운뎃손가락의 아픔을 완화해 준다. 굳은살이 박인 후에도 딱딱한 볼펜으로 쓰면 가운뎃손가락이 아프지만, 고무가 있으면 훨씬 덜 아프다.
난 독서실을 주로 애용했는데 그 독서실은 유흥가 한가운데 있었다. 저녁때 공부를 할라치면 삼겹살 냄새, 통닭 냄새 등의 맛있는 냄새가 독서실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창밖을 내다보면 회식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즐겁게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맥주에 통닭 생각이 간절하였지만 어떻게든 참고 시험이 끝나면 꼭 먹겠다고 다짐하였다.
저녁을 먹으면 배가 불러 자꾸 잠이 왔다. 그래서 졸음을 막기 위해 김밥 2줄 정도로 때웠다. 허기가 지면 편의점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편의점 봉지 아메리카노는 정말 썼다. 1,000원 했었는데, 맛은 없었지만, 허기와 졸음을 쫓아내는 데는 그만이었다.
시험에 먼저 합격한 선배가 나에게 해 준 이야기가 있었다. 그분은 고시원에서 공부했었는데, 어느 주말에 부인이 유부초밥을 해 가지고 고시원에 왔단다. 그런데 부인에게 고맙기보다는 야속했다고 한다. 유부초밥 먹는 시간 때문에 공부하는 시간을 빼앗겨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고 했다. 부인에게 차마 말은 못 하고 유부초밥을 먹었단다. "너도 그렇게 공부해야 한다!"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리고 시험은 어떻게든 한 번에 붙어야지 떨어지면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크다고 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내가 하는 노력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 시험을 치렀고 발표날이 되었다. 지인들과 집안사람들은 합격 전화가 왔냐고 몇 번을 물어왔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대개 합격하면 합격 발표 시각보다 좀 이르게 알려 준다는 말이 있었는데, 내 전화기의 벨은 울리지 않았다. '이젠 글렀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확히 발표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고. "합격을 축하합니다. "라며 담당자가 합격을 통지해 주었다.
지나간 고난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아득히 사라지며, 정말 말로 다 하지 못할 희열이 느껴졌다. 최종 경쟁률은 12:1이었다. 정말 내가 합격한 것이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편의점에서 먹은 커피 탓인지 위장은 다 버려져 있었지만, 꿈같은 성취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손에 물집이 잡히게 공부하고, 졸릴까 봐 저녁엔 김밥 2개로 때우고, 새벽녘엔 편의점에서 1,000원짜리 봉지로 된 진한 커피로 잠을 쫓던 그때가 벌써 8년 전이다. 가끔 그때의 그 열정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