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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삶 그리고 삶이라는 여행

영화 사이드 웨이를 보고

by 다윈이야기

2017. 7. 31


호주는 1년에 2번 한 해를 정리한다.

가족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12월, 그리고 회계사와 책상 앞에서 정리하는 7월. 처음에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던 EOFY(End of Finance Year) 같은 요상한 단어에도 적응해가고, 여기저기 택스 리턴 팝업스토어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니 퍼스에 온지도 어느덧 일 년이 흘렀음을 실감한다. 지난 시간들을 곱씹으며 떠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영화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영화 <사이드 웨이(2005)>를 보았다.


좀 낡았지만 좋은 영화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고 영화 <디센던트(2012)> 이후 매우 좋아하던 감독이기에 개인적으로는 맛 좋은 와인처럼 묵혀두고 있었던 영화 중 하나다. 이미 검증된 훌륭한 와인을 따지 못하고 기다리는 와인 애호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포도주와 달리 이야기가 혼자서 익어가는 것은 아닐 테니 그저 퍼스에 와서 보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억지스러운 운명론이지만 영화는 퍼스를 닮아 있다. 결혼을 앞둔 잭(토마스 헤이든 처치)과 그의 절친 마일스(폴 지아마티)의 일주일간의 로드 트립을 그리고 있는 영화는 그 배경과 따스한 분위기가 퍼스의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스완밸리를 떠오르게 하는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의 한적한 자연이 무척이나 친숙하고, 해지는 와이너리에서 저녁을 함께 하는 주인공들의 뒷모습은 지난여름 마가렛리버에서 보았던 노을을 떠오르게 한다.


영화의 내용도 배경의 온기가 그대로 녹아있어 그 자체로 작고 평화로운 포도 농장을 다녀온 듯한 기분을 만들어 준다. 와인 투어를 겸한 총각 파티라는 영화의 줄거리가 언뜻 막 나갈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비슷한 소재로 유명한 코미디 영화 <행오버>에 비교하자면 한 없이 점잖고 심심하다. 다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퍼스의 심심함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이드 웨이>는 무척 아름다운 영화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영화 속에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등장했다면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희생되는 엑스트라 자리를 차지하기에도 버거웠을 것으로 보인다. 반평생을 살았지만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이혼남 영어교사 마일스와 오래전 명성에 기대어 사는 한 물 간 배우 잭은 그렇게 평범함이란 아우라로 둘러 쌓인 남자들이다.


여행 속에서 만나 그 둘과 위험한 관계를 시작하는 여인 스테파니(산드라 오)와 마야(버지니아 매드슨) 역시 성공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엮어가는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담백한 연출력 덕분에 <사이드 웨이>는 지루하지 않은 영화가 된다.


영화는 '성공'이라는 인생의 고속도로에서 이미 벗어난 이들을 굳이 채찍질하지 않는다. 불필요한 주변부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저 편견 없이 인물을 그리고자 하는 담백한 프레임의 의도가 읽힌다. 마치 세상에는 각자의 여러 갈래 길이 있으며 정해진 목적지는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의도된 필름의 빈티지한 색과 질감은 눈을 편안하게 만들고, 더불어 용기를 이야기하기 위해 꼭 빌딩을 때려 부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특히 겉모습부터 사뭇 다른 두 주인공의 흥미로운 조합은 <사이드 웨이>를 빛나게 해 준 일등 공신이다. 불안정한 정신과 제멋대로인 삶의 방식,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인 두 인물은 각자의 개성으로 영화 보는 맛을 높여준다. 시종일관 남자다운 단순함으로 매력을 뽐내던 잭은 탄탄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결정적인 위기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아이 같은 순수함으로 웃음 짓게 만든다.


듬성듬성 남은 머리와 정돈되지 않은 수염, 툭 튀어나온 아저씨 똥배를 자랑하는 마일스는 연신 유약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극적으로 폭발하는 의외성으로 영화에 재미를 더한다. 가치관과 생활패턴이 정반대에 놓여있는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와인을, 이성을, 인생을 사랑한다.


너는 문학, 와인 등은 아주 좋아하면서 왜 나의 성욕은 이해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 - 잭의 극 중 대사 -


물론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문학과 영화, 와인은 이해하면서 자신의 성욕은 왜 이해하지 못하냐고 묻는 잭의 말에 마일스는 그래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 잭을 바라보는 마일스의 시선을 카메라가 종종 지긋이 비추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그가 마음을 열기 바라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살이란 때론 납득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결국 누구나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 만나게 된다.


재혼한 전처의 임신 소식을 들은 인생 최악의 날에 가장 특별한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던 와인 1961년 산 슈발 블랑을 꺼내 마시는 마일스가 슬프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결단 속에서 그가 조금씩 변할 것이란 사실이 어렴풋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잭과 마일스가 함께한 지난 일주일의 여행이 ‘일탈’이었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학교로 돌아간 마일스의 모습은 그의 ‘일상’일 것이다. 그는 마야의 집 계단을 다시 오르며 일탈을 자신의 일상 속으로 가져오려 한다. 새로운 경험을 자신의 진짜 일상으로 가져와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만들어 가는 것.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워했던 마일스는 그렇게 여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와인은 변화무쌍하죠,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 맛이 제각각이잖아요.
생명력을 가졌기에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죠. - 마야의 극 중 대사 -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비슷하다. 자신이 그리던 인생의 고속도로에서 잠시 벗어나더라도 다른 길(sideway)이 가능하다는 사실 속에서 위로를 찾는 것. 그것이 집이 있음에도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아닐까.


퍼스에서 보낸 지난 1년은 개인적으로 분명 일탈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모든 경험들을 안고 갈 수는 없겠지만, 눈을 감으면 등 뒤로 전해 오는 퍼스의 따스함과 형언할 수 없이 파랗던 하늘과 바다는 앞으로 만날 수많은 갈림길에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 확신한다. 분명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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