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교과서에 실린 '노벨 문학상 수상작'에서 감동받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영화들을 편견 없이 본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다.
위대한 감독이 가진 문법과 주제의식, 개인사, 시대상, 뒷이야기 등등 머릿속에 어설프게 자리한 잡념들이 감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이라는 이름의 위대함 덕분에 우리는 히치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 힘들다.
역사 속 1958년으로 날아가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접하는 것이 가장 순수한 감상에 가깝겠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 해도 당대의 시각으로 작품을 보는 것이 유일한 정답은 아닐 것이다. 결국 '감상'이라는 행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평가란 시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 개봉 당시 여론과 사르트르의 혹평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시대와 함께 작품에 대한 평은 달라지고 또 바뀐다. 그저 좋은 작품은 언젠가 인정받기 마련이라 믿고, 자신이 놓인 시대의 눈에 충실하게 작품을 본다면 성실한 관객의 최소 조건은 만족하는 셈이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가치를 찾는 위대한 이들을 종종 만나지만, 그들조차 항상 옳지는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을 뿐이다. 당시 사르트르의 눈에 <시민 케인>은 정말 망작으로 보였을 것이다.
오늘날 관객의 눈에 <현기증>은 지루하고, 형식적인 연기가 불편한 작품이다. 영화는 '나선'과 '현기증'의 이미지를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고 유령과도 같은 여인에게 사로잡힌 남성의 강박 혹은 정신분열을 그린다. 그 밑바닥에 깔린 트라우마, 네크로필리아, 편집증, 고소공포증 등은 정신분석학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지만, 친절한 접근법이 아니다.
결국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멜랑콜리함은 그냥 쿨하지 못한 허세처럼 치부되기 십상이다. 당시에는 그 자체로 혁신이었던 '솔 바스'의 오프닝과 트랙 아웃 줌인 기법도 다양한 영상 기법에 익숙한 지금의 눈으로는 어딘가 미완성처럼 느껴진다.
결국 영화에 남아 있는 강렬한 힘은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야기하는 '불안'과 '그에 대한 이미지들'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대를 넘어 <현기증>을 여전히 위대한 작품으로 만든다.
이야기 전반에 흐르는 긴장감은 시대를 초월해 피부로 와 닿고, 결말이 선사하는 충격은 현대 스릴러의 반전보다 깊이 있고 강렬하다. 인물이 겪는 불안과 강박을 연기가 아닌 영화적 이미지, 즉 연출을 통해 전달하려는 감독의 오랜 야망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히치콕이라는 이름을 빼면 '스릴러'라는 장르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찬사가 결코 과한 수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 작품이다.
히치콕은 영화사의 검증된 맛집이다.
오랜 맛집이 유명한 이유는 시설이 낙후되고 인테리어가 구식이어도 음식 맛이 끝내주기 때문이다. 음식 맛이 변하지 않는 이상 가게를 찾는 이들은 여전할 것이고 만족감도 그와 같을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들 역시 영화사의 검증된 맛집이다. 스릴러 레스토랑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유행한다 해도 그의 영화에서 메뉴를 훔쳐왔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며느리도 모른다는 맛의 진짜 비밀은 아직 그의 영화에만 남아 있다. 시대와 기술의 한계가 위대한 감독을 만나 빚어낸 특유의 손맛은 레시피만 따라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온전히 감독의 예술로서 영화가 평가받기 더욱 어려워진 오늘날, 그의 작품이 가진 고유한 가치는 계속 빛을 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