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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남자 나쁜여자라는 환상

<500일의 썸머>를 다시 보다

by 다윈이야기

곱씹어보면 이 영화에는 썸머가 과연 나쁜 X인지 아닌지에 관한 지루한 논쟁이 항시 따라붙는다. 개인적으로는 톰의 찌질함에 마음이 쓰이다가도 썸머의 쿨함에 홀딱 반해서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모단걸 만세!


사실 허무하게도 결론은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데... 아마 극장에서 늦게 들어가느라 자막을 놓쳤던 것이 분명하다. 다시 보기의 묘미란 이런 걸까.


본 영화는 픽션입니다.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더라도 완전히 우연입니다. 특히 너 말이야 '제니 벡맨' 나쁜X


매우 분명하게 <500일의 썸머>는 시나리오 작가가 사랑했던 한 '나쁜 여자'에게 헌정하는 영화이고, 자연스럽게(?) 걸 크러쉬 무비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오래전 캘리포니아를 여행할 때 영화 촬영지를 찾는 이들이 제법 많아서 놀라기도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만난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물론 썸머가 나쁜 여자라고 해서 이 영화가 여성을 위한 이야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주이 디샤넬'의 인생작답게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썸머에게 있지만, 극의 시선은 시종일관 톰(조셉 고든 레빗)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썸머는 특별한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론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였고, 톰은 자신에게만 특별한 한 사람을 찾아 헤매는 여정을 그려간다.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혹은 그 너머의 모던패밀리가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에게 충실한 단 하나를 찾아 헤맨다. '하나'라고 단서를 붙이고 바라보면, 그것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진짜 특별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희미해진다. 결국 <500일의 썸머>는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하나뿐인 존재를 찾아 헤매는 모든 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불변의 그리고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는 감성이 영화의 낮은 곳을 따라 흐른다. 그렇지만 사랑의 감정은 정량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에 우리가 잠시 동의한다면, 톰의 입장처럼 선택과 약속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마지막 만남에서 보여준 썸머의 진지함은 그녀도 달라졌음을 살며시 비춘다.


사랑에서 만큼은 누구나 한 사람을 위한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그 약속의 부족한 장력을 우리는 종종 나쁜 남자 나쁜 여자라는 환상으로 채우는 것은 아닐까. 사랑의 특별함이란 역시 '넓이' 보다는 '깊이'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지저분한 질문이 깊은 잠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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