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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윈이야기 May 04. 2021

개의 몸에는 생활계획표가 있다.

이토록 규칙적인 개

아악!!! 

또 늦었다! 이제부터 매일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산책하기로 했는데!! 

알람도 5분 간격으로 6개나 맞춰놓고 어제는 꼭 성공해보겠다고 밤 10시에 잠들었는데... 어찌나 성실히도 꼬박꼬박 다 껐는지- 일어나 보니 아침 8시다! 오늘도 '미라클한 모닝'이다. 6시에 일어나려고 열 시간을 내리 잤으니. 이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스스로도 참 한심하다. 


"제발 일어나지도 못할 거면, 숙면 방해하지 말아 줄래?" 


"... 내일부터는 정말 미라클 모닝 할 거야!" 




요즘 해가 너무 쨍쨍해서 이 시간에 산책 나갔다가는_ 다윈도 나도 제대로 더위를 먹을 것 같다. 오늘도 아침 산책은 무리다. 가만히 서서 바깥 날씨만 보고 서 있자니_ '뭐 해? 나가자!' 하고 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낑낑댄다. 잠도 깨고 밥도 먹었으니, 이제 산책할 차례라고?! 미안해 다윈, 지열 조금 식으면 나가자... 조금만 기다려 줘!  

   


다윈과 함께 지내며 우리 부부는 약속을 하나 했다. 내키는 대로, 되는대로 지냈던 지금까지의 생활방식과는 이별하고- 일정을 짜서 계획적으로 한 번 살아보자고.   


"다윈은 보통 7시쯤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 그때 아침 주고, 산책 겸 아침 훈련을 시킬 거야. 그리고 다시 낮잠 시간... 오후에는 다시 산책 가거나 놀아주고, 다시 쉬다가- 저녁은 9시, 그다음 저녁 산책!" 


처음에는 2시간 단위로 빽빽하게 시간표를 짰다. 하지만 역시 작심삼일. 현실과의 괴리를 바로 깨닫고는 훨씬 더 여유롭게 수정했다. 그러나 오전/오후 정도로 수정한 계획조차- 우리는 거의 제 때 지키지 못했다. 남편도 나도, 다윈처럼 7시에 일어나지 못했으니. 다윈은 세상 제일 감미롭게 뽀뽀하며 우리를 깨웠지만 우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심함과 실망감에 다시 잠을 청하다 보니, 새벽같이 일어나 우리를 깨우던 아가 다윈은- 어느새 우리에게 전염되어 해가 중천에 떠도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늦잠 자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들쭉날쭉했다. 어떤 날은 아침 8시, 어떤 날은 10시, 또 어떤 날은 너무 늦어서 아침 산책 패스... 그렇게 됐다. 그러니 다윈의 시간표는 일관성이 없었다. 어떤 날은 쉬라고 하고 어떤 날은 나가자고 하니- 일단 나가자니 좋지만, 나가야 할 시간에 안 나갈 때는 훨씬 더 괴롭다. 서운한 만큼 실망은 크고, 낮잠 시간이라는데 잠은 안 온다. 산책을 안 하는 것도 문제지만_ 이랬다 저랬다 하는 스케줄도 다윈에게는 스트레스다.    

 


"우리가 칸트처럼 생활하면 다윈이 엄청 행복해할 텐데.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하니까 다윈도 훨씬 편할 테고." 

  

그렇긴 하겠다 싶다. 개는 확실히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한다. 어떻게 시간표를 채우든 그대로 따라주지만_ 한 번 꾸준히 패턴을 만들어 지켜주면 편안해한다. '지금쯤이면 회사 갈 시간 아니야?' , '지금 나 낮잠 시간인데!' 하고_ 가끔 다윈이 우리에게 역으로 시간을 알려주기도 할 정도로. 갑작스레 생활계획표가 바뀌면 당황해서 에너지도 떨어진다. 그렇게 몇 가지 일과를 건너뛰기라도 하면- 특히 그중에서 산책을 건너뛴다면! 다윈은 반드시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거나, 앞 발로 내 몸을 툭툭 쳐가며 뚫어져라 노려본다. 다윈만의 이 집요한 농성은 내가 반응해줄 때까지 계속되고야 만다.     

 


이마누엘 칸트(1724 ~ 1804)

칸트는 지방 작은 항구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서만 살았고, 남들 다 가는 그 흔한 여행 한 번 다니지 않았다. 80년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1일 1식만 하고 정리정돈에 집착할 정도였으니_ 생각만 해도 재미없고 따분한 아저씨다. 매일같이 새벽 4시 반, 산책길을 나서는 그를 보고 이웃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처럼, 칸트는 단순하고 심플한 일상을 살았다. 이렇게나 한결같고 칼 같은 규율을 자신에게 먼저 들이대는 사람이기에 <순수 이성 비판>, <도덕 형이상학 원론> 같은 책을 썼을 것이다. 


다윈이 칸트와 살았다면 어땠을까. 분명 매일 똑같이 단순한 일상을 보내면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칸트가 개와 놀아주거나 목욕을 시켜주는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지만_ 칸트가 개를 키웠다면 어땠을까. 그의 지루하고 뻔한 일상에 즐거움과 생기가 되고, 독신의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랑스러운 동반자가 되었을 텐데. 칸트와 개는 서로에게 최고의 소울 메이트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를 갖지 않는다. 동물은 자의식을 갖지 못하고,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목적이란 인간이다. - 임마누엘 칸트


"이상하지 않아? 칸트는 항상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둥, 행동의 격률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하라는 둥_ 엄청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말만 했잖아. 근데 어떻게 이렇게 동물에 대해서는 수단일 뿐이라고 '비윤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냐고!" 


"책 보고 공부만 하느라_ 사랑을 못 해봐서 그런가? 뭐 그때는 무조건 인간 중심이었으니까." 


"어쩐지- 맞는 말만 하는데도 이상하게 정이 안 갔어, 그 아저씨는." 


칸트는 대표적인 근대 철학자로서 동물은 수단으로써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단정 짓는 답답한 사고방식을 고수했다. 안타깝다. 근대 계몽주의의 정점을 이루고, 철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경이로운 커리어를 이룬 칸트가_ 개 한 마리 소중히 여기는 법을 깨닫지는 못했다니!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며 행동의 순수한 동기까지 따질 정도로 '보편적 윤리'를 외쳤던 그가_ '동물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다니.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

네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인격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선량하고 윤리적인 아저씨, 칸트는 어리석다. 만물 중 인간만이 다른 인간을 수단으로 대한다. 동물은 다른 대상을 오직 목적으로만 대한다. 개도 안하는 짓을 인간은 '정언명령'이라고까지 하면서 만들어낸다. 개들이 듣기라도 한다면 웃을만큼 민망한 소리다. 동물은 자의식이 없다고 업신여기고는, 동물만도 못한 일을 인간이 한다는 걸_ 칸트는 몰랐나보다. 


그가 만약 한 마리의 개라도 품어본 적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따뜻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를 생에서 맞딱들이는 경험을 해봤다면, <미와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뿐 아니라 <동물과 숭고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라는 훨씬 더 재미있고 획기적인 저서가 나왔을 수도 있으리라. 그의 책 <영구 평화론(영원한 평화를 위하여)>에서 전쟁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더불어 더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인간의 지혜를 보여줬다면-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제안해 주었다면, 인류의 평화는 더 쉽게, 더 빨리 우리에게 찾아왔을 텐데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너무나 중시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나르시시즘에 오랫동안 집중한 나머지_ 어쩌면 더 오만하고 야만스러운 동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알람 없이도 산뜻하게 기상할 수 있는 건,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올여름을 건강하고 무사하게 보내려면, '미라클 모닝'까지는 아니더라도- 해가 떠서 땅이 뜨거워지기 전에 일어나 다윈을 산책시켜야 한다. 생각해보면 개와 함께 산다고 해서_ 시간을 많이 뺏기고, 일상에서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다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다윈과의 산책은 뺏기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는 사색의 즐거움과 관찰의 기쁨을 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시간이 없어서', '바빠서'라는 핑계 없이_ 조금만 더 깨알 지게 생활계획표를 세워_ 시간을 쓰면 된다. 시간표대로 하루하루, 부지런한 패턴을 꼬박꼬박 실천해나가면 된다. 조금 삐끗해도 괜찮다. 나의 강아지가 사랑스럽고 귀엽게, 친절하고도 집요하게 시간표를 지키고야 말도록 해줄 테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위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보여주는 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지켜주는 마음속의 도덕률이다.
- 임마누엘 칸트

나에게는 생각하면 할수록 놀라움과 경건함을 주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칸트가 말하는 자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항상 성장시켜주는 내 강아지다. 

 

개에게는 윤리학이 필요 없다. 칸트가 동물을 키워본 적이 있었다면_ 절대 인간만이 최고의 존재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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