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어요' 라는 말이 의심스러울 때

by 담유작가

나의 화려한 은퇴를 기념하는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앞두고,

복용중인 약을 넉넉히 처방 받게 위해 병원에 들렀다.


일을 하다 갑자기 머리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어 병원으로 뛰어갔던 날이 있었다.

그때 혈압이 167. 그날 이후로 나는 꾸준히 혈압약을 복용해왔다.


일을 정리하고 나서는 약 용량을 조금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의사와 상의해 40mg 먹던 약을 20mg으로 줄이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따로 건강관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혈압은 계속 안정적이었다.


오늘 약을 타러 가서 잰 혈압은 110에 73.

오늘은 약을 먹지 않고 갔는데도 꽤 마음에 드는 수치였다.


약을 처방 받고 나오자마자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약 넉넉히 처방 받으러 병원 갔거든요.

약 때문이겠지만 오늘은 아직 약 안먹었는데 최고혈압110.

학원은 사실 돈 생각하면 아까운데, 건강엔 진짜 치명타였던 듯”


남편은 이렇게 답했다.

“잘했어요. 건강이 최우선인걸.”


그 메시지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말이 정말 남편의 진심일까, 하고.


대출금이며 생활비며, 기름값이며, 살다 보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

며칠 전에 남편에게 돈을 좀 달라고 했더니

“왜 나한테 그래?”하며 새된 반응이 돌아왔다.


시댁에 있던 날이었지만 시어머니가 들으시든 말든 결국 나는 소리를 질러버렸다.

“내가 지금 돈 버냐? 땅 파면 돈 나와?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어머니가 들으실까 봐 놀란 남편은 재빠르게 돈을 입금했다.


나도 안다. 외벌이로 사는 게 얼마나 팍팍한지.

아이의 교육비만큼은 절대 아끼지 말자는 생각을 가진 나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에 아이의 학원부터 줄였다.

그리고 나서부터 슬슬 남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분양 받은 아파트의 계약금을 남편에게 보냈고,

중도금도 일부나마 보태려고 나름 허리띠를 조이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반응은 섭섭함을 넘어 화가 치밀어 오르게 했다.

남편의 마음 속에서는 사지육신 멀쩡한 내가 집에서 노는 걸로 보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결혼 후 내내 맞벌이로 살았으니 언젠가는 이런 시간이 올 거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고작 다섯 달 만에 이렇게 다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괜히 팔자타령이 튀어나온다.


됐다. 달 살기만 끝나면 다시 무슨 일이든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야 땅에 떨어진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다 자영업자로 마감한 나라서,

뭐든 아이디어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흔 다섯 살 먹은 아줌마를 받아주는 곳도 없을 테고,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움직여야 할 테니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지.


결국 나를 발전시키는 건 남편의 짜증과 나의 눈칫밥이다.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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