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코코 Apr 01. 2024

라면을 매우 좋아하던 마산 친구

마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내 친구는 유독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사용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사는 사람들은 사투리를 안 쓰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친구는 사투리 사용하는 자기 말투를 절대로 고칠 생각이 없었다. 한글로 쓴 책을 읽을 때는 물론이고, 영어 원서를 읽거나 심지어 노래를 부를 때에도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들어간다. 마산 친구가 노래방에서 사투리로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웃기면서 재밌었다. 자기는 사투리로 노래한다고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가 혼자 노래에 취해서 부르고 있으면, 우리는 노래를 듣다가 경상도 사투리로 노래 부르는 게 너무 웃겨서, 미친 듯이 깔깔대면서 시간가는줄 몰랐다. 음절 마디에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면 도저히 안 웃고는 못 배긴다. 우리가 오랜만에 노래방에 가는 날은 친구의 노래를 듣고 싶은 날이었다. 친구는 마이크를 잡고 기분 좋게 웃으면서 "니들이 원하는 대로 오늘도 마이 부르겠다. 노래값은 내일 점심에 라면이면 된다."라고 멘트를 시작했다.  마산 친구가 마이크를 잡으면 우리는 신났고 모든 근심도 다 날아갔다.

    

대부분 라면을 좋아하지만, 친구는 유별나게 라면을 좋아한다. 대학 생활하면서 라면만 먹어도 행복하게 지냈다. 우리에게는 라면 가게에서 사 먹는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엄마에게 도시락으로 밥만 싸달라고 부탁해서 친구들과 학교 근처 라면집에서 라면에 밥 말아먹으면서 우리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하고, 나라 걱정도 하였다. 마산 친구는 우리가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러 가는 날, 빙그레 웃는 얼굴로 기분 좋게 “라면이 최고지!”라고 말하고 앞장서서 라면집으로 갔다.     


누군가 용돈을 좀 많이 받은 날은, 우리 점심 메뉴는 중국집 짬뽕으로 바뀌었다. 대학 시절에 짬뽕을 먹는 날은 우리에게 가장 호사스러운 날이다. 그런데 마산 친구는 열심히 짬뽕을 먹으면서도 자기는 라면이 더 맛있다고 떠들었다. 우리는 그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친구는 점심식사로 라면보다 더 맛있는 음식은 없다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마치 라면은 우리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듯했다.

  

마산 친구는 신입생 때부터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인천에서 통학하는 나에게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자주 말했다. 시험기간에는 통학 시간이 왕복 3시간이 넘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그랬지만, 그 당시에는 밤 12시 통행금지가 있던 때라서 서울에서 놀다가 늦으면 서울 친구들 집으로 자러 가곤 하였다. 하지만 친구의 하숙집은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다. 친구 집도 나만큼 가난해서 하숙비를 아끼려고, 다른 과의 학생과 한 방에서 같이 생활했다. 그러면 하숙비가 절반으로 줄어든다. 마산 도심 근교에서 농사지으며 학비를 보내느라 허덕이는 그의 부모님은, 돈이 떨어지면 소도 팔고 땅도 팔아서 아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런 부모님을 보면서 그는 돈을 철저히 아끼고 살았다. 어쩌다 내가 그의 하숙집 좁은 방에서 3명이 붙어서 자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불편했다. 그런데 그것만큼 곤란했던 일은, 내가 같이 잔 다음 날 아침에 하숙집 아줌마가 나에게도 아침밥을 챙겨줄 것인지, 안 줄 것인지를 놓고 친구와 마주 앉아 한숨을 쉬면서 눈치를 보는 일이다. 여학생 같으면 그까짓 아침밥 정도는 아예 굶거나 근처에서 먹을거리를 조금 사서 대충 때우겠지만, 순진하고 융통성조차 없었던 우리는 아줌마가 해주는 아침밥을 반드시 먹어야만 하루를 든든하게 시작할 수 있다고 머리에 박여있었다. 만약 아침밥을 안 먹으면 점심시간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우리의 하루 시작에서 아침 식사는 엄청 중요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그날 아침에 하숙집 아줌마는 나에게도 아침밥을 챙겨주었다. 더구나 모든 하숙생에게 다 같이 해주는 계란프라이 특별식을 나에게도 주셨다. 그날 먹은 아침밥은 맛도 있었고 푸짐했다. 나와 친구는 그런 일로도 기분이 좋았다. 친구는 나에게 아침밥을 먹여주고 크게 웃으면서 자랑스러워했고 나에게 귓속말로 “이틀 전에 내가 하숙비를 드렸거덩. 아줌마가 그게 고마웠던 기라. 히히”라고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 시절 우리의 머릿속에는, 하숙집 아침밥은 먹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친구가 그토록 좋아하는 라면을 아침 식사로 먹어야겠다는 생각조차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만 했던 우리는 돈을 내야 하는 라면집보다, 잠시 따뜻한 방 안에서 기다리면 라면보다 훨씬 더 맛있는 하얀 쌀밥이 가득 올려진 큰 밥상을, 우리 방안으로 아줌마가 들고 들어올 예정이기에 다른 생각은 떠오를 수 없었다. 내 기억에는 하숙집에서 나오는 아침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만약 밥이나 반찬이 마음에 안 들면 학생들은 다른 집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친구는 군대를 다녀와 3학년에 복학해서 돈을 더 아끼려고 학교 근처에서 혼자 자취했는데, 겨울 방학 내내 그토록 좋아하는 라면만 먹고살았다. 처음에는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살다가, 날씨가 추워서 설거지하기가 귀찮아지니까, 컵라면으로 바꿔서 먹기 시작했다. “컵라면은 커피포트에 물만 끓여서 부어서 라면을 먹고, 모두 다 쓰레기통에 버리면 깨끗하니까 설거지도 할 필요 없고 엄청 편해.”라고 우리에게 말하면서 씩 웃었다. 그때는 컵라면이 귀할 때였다.   


겨울 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친구가 우리 집으로 전화를 했다. 엄마에게 얘기해서 김치를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친구는 얼마 전부터 김치가 다 떨어져 라면만 먹고 있어서, 김치가 너무 먹고 싶다고 거의 울 듯이 말했다. 내가 전화를 끊고 나서 친구가 부탁하는 얘기를 엄마에게 말하니, 큰 통에 한가득 김치를 넣어 주면서 얼른 갖다주라고 했다.  나는 곧바로 김치가 가득 담긴 큰 통을 들고 자취 집으로 출발했다.     


자취 집에 도착해서 보니, 친구는 이불속에서 마치 병자처럼 누워있었고, 방 한쪽 구석에는 라면 봉지와 먹고 남은 컵라면의 쓰레기가 마치 패총 무덤처럼, 산처럼 높이 쌓여있었다. 겨울 방학 내내 라면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살았는데, 방학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김치마저 다 떨어지고 컵라면만으로 오랜 시간을 버틴 것이다. 온갖 라면 봉투와 컵라면 쓰레기들을 방안에 그대로 쌓아서 버려둔 채.  


마치 다 죽어가는 환자처럼 누워서 힘들어하던 친구는, 내가 들고 온 큰 김치통을 보자마자, “김치에 라면 먹자!”라고 나에게 소리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 소리에 내가 라면을 끓이겠다고 해도 “넌 손님이니까, 그냥 앉아있어. 라면은 내가 도사야.”라고 말하면서 재빨리 라면을 4개 끓였다. 우리는 끓는 물에 김치와 라면을 같이 넣고 끓여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이불속에만 누워만 있던 친구는 김치에 라면을 맛있게 먹고 나서, 예전처럼 학교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갔다. 라면은 우리에게 가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고 라면을 무척 사랑하는 마산 친구는 그 혹독한 겨울을 보내면서 ‘라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