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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니 Feb 09. 2024

우기의 치앙마이

사바이, 사바이

 이전에 한국도 이제 장마대신 우기라는 말을 써야 하지 않냐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장마와 우기의 차이가 뭔지 궁금해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 보았다.

장마 : 여름철에 여러 날을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나 날씨. 또는 그 비.

우기 : 일 년 중 비가 많이 오는 시기.

아무래도 장마는 ‘여름 철에 연속해서 내리는 비’이고, 우기는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의 차이인 것 같은데 홀로 짐작해보자면 장마는 비 자체에 포커스가 되어있고, 우기는 시기에 집중을 한 단어인 듯하다. 치앙마이에서 며칠 지내본 결과, 한국은 장마가 맞고, 태국은 우기다. 여기는 현재까지 비가 오지 않는 날이 거의 없다.



  태국은 7월부터 시작해 8월, 9월 까지도 우기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기인 여행지는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치앙마이는 건기인 11월~2월까지가 성수기다. 7월 초 갓 입국했을 당시만 해도 날씨는 좋았다. 밤에도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었으며, 안경을 끼면 가끔 별자리 비스무리 한 별들의 무리도 보였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아침이다. 시원한 통창 뷰 하나만 보고 예약한 숙소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보이는 울창한 나무들과 파란 하늘, 그리고 하얀 뭉게구름을 볼 수 있다. 이것 하나만으로 치앙마이에 와야 하는 이유를 대기에 충분했다.



 멋진 뷰를 보고 일어났을 때는 오늘이 내 생에 가장 완벽한 하루가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잡던 나는 이제 몸을 비틀어 창문을 바라보곤 한다. 핸드폰 보다 더 멋진 화면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날아다니는 새들과 나무를 타는 청설모를 눈으로 좇으면 현실인지 꿈인지 분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 든다. 가끔은 그대로 누워서 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건 맛보기의 행복뿐이었다. 8월이 시작되니 치앙마이는 본격적으로 우기의 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회색 잿빛의 하늘이 먼저 보인다. 비가 내리려나 생각을 하면 곧 내 생각을 읽는 듯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비가 쏟아진다. 그 비는 짧으면 몇 십분, 길면 오후 종일까지 내린다. 비가 내리는 양이 어마무시해 밖에 나가기도 겁이 날 정도다. 한 방울이라도 맞으면 마치 팔이나 다리가 뚫릴 것처럼 거세게 내린다. 이런 날에는 한국에서 직수입해 온 안 좋은 습관이 발동된다. 바로 배달 어플로 커피와 음식을 주문하기. 밖에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가 생긴다.



 비가 와도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날도 있다. 가령 숙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방 청소를 해주는 날 같은 경우다. 이런 날에는 아침 10시에는 방에서 나가야 하는데 항상 같은 고민을 한다. 택시를 불러서 저 멀리 올드 시티 쪽 식당을 갔다 카페에서 죽을 칠까, 아니면 숙소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에서 배를 채운 후 옆 카페에서 한두 시간 죽을 칠까. 결론은 멀리 나가기도 싫어 최소한의 거리에 위치해있는 식당과 카페로 향한다. 여기서 몇 시간만 버티다가 청소가 끝나면 바로 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기의 치앙마이는 애석하게도 나의 여행 욕구를 감소시킨다. 홀로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삭한 김치전과 막걸리가 생각난다. 한국이 가장 그리운 날은 바로 비 오는 날인 듯하다.



 사바이 사바이, 태국어로 천천히, 편안하게 라는 뜻이다. 이 말은 어딜 가나 있고, 요가 수업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다. 비가 자주 내리는 요즘은 나도 저절로 사바이 사바이가 된다. 안그래도 게으른 나에게 우기의 치앙마이는 더 느릿한 나로 만들어준다. 할 일이 없는 나는 자연스레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꺼내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빗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한다. 책속의 화자에 빠져 그의 세계 속으로 잠시 다른 여행을 다녀온다. 비와 책은 어쩌면 최고의 조합 일지도 모르겠다. 우렁차게 내리는 빗 속에서 다시 사바이, 사바이. 걱정과 근심조차 세찬 빗소리에 조용히 잠겨지는 치앙마이의 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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