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놓고 두집살림> 백도빈 배우자 사용설명서
하릴없이 유튜브 쇼츠에 빠져
1분마다 핸드폰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올리기를 수십 회, 비로소 멈출 수 있게 되었다.
방영중인지도 몰랐던 <대놓고 두집살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었다.
정시아의 남편인 배우 백도빈 씨가 쓴 담백하고 짤막한 편지 내용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아내는 다소 수다쟁이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2. 덤벙거리는 부분이 있으니 복잡한 일은 시키지 않는 편이 일하시는 데 추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감정 기복이 심해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4. 다리, 팔 근력이 부족해 지구력이 필요한 일은 지양하시는 게 이롭습니다.
ㅡ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출연자들은 별 내용 아니라고 깔깔대며 웃었지만, 아내인 정시아 씨는 눈물을 보이며 감동을 받았다.
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의 문장력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말은 자칫 무례해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위의 편지는 각 문장의 뒷부분을 긍정적으로 풀어 씀으로써 더욱 공손하고 품격있는 글이 되었다.
그리고 직접적인 부정표현은 지양하고, 명사로 만듦으로써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했다.
단순 비교를 위해 일부 수정해 보자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1. 아내는 다소 수다쟁이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아내는 말이 많습니다.
2. 덤벙거리는 부분이 있으니 복잡한 일은 시키지 않는 편이 일하시는 데 추진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 복잡한 일은 시키지 말아주세요.
3. 감정 기복이 심해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 너그러이 헤아려주시길 바랍니다.
-> 감정 기복이 심한 편입니다.
4. 다리, 팔 근력이 부족해 지구력이 필요한 일은 지양하시는 게 이롭습니다.
-> 지구력이 필요한 일은 시키지 말아주세요.
아마 하고 싶은 말은 이러했을 것이다.
다만 편지를 읽을 방송국 PD 내지 프로그램을 시청할 시청자까지 고려한 문체라 생각하면, 백도빈 씨 내면의 깊이는 결코 짧은 시간 안에 다져진 게 아니라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이름이 익숙해 검색을 해보니 내가 족히 십수 회는 봤을 영화 <타짜>에 출연한 기록이 있었다.
바로 곽철용(김응수)의 부하로, 고니(조승우)와 신경전을 벌였던 역할이었다.
알지 모를 내적 친밀감이 들면서도,
길게 알고 지냈던 사람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된 것 같아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글과 말에서 나오는 힘은 굉장히 대단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