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로 읽은, 아이들 구조와 돌봄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으면서 '소유'와 '존재'의 개념이 제 삶의 단면을 비추는 것 같아서 짤막하게 서평 겸 반성과 회고의 글 써봅니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까치
처음에는 단지 더 많은 생명을 살리고 싶었다. 길 위에 놓인 작은 몸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내가 데려오면 적어도 그 아이 하나는 덜 불행해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묻게 되었다. 나는 생명을 돌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생명을 통해 나 자신의 의미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구한다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책임보다 숫자가 먼저 떠오르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사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가지려' 하고 있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소유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 하지만, 그 방식은 결코 충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은 끝이 없고, 오히려 불안을 증식시킨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더 데려오고 싶었던 마음 속에는 생명을 향한 연민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던 조급함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것을.
멈추게 된 건 우연히 본 유튜브 영상 때문이었다. 구조 활동을 하는 캣맘 채널이었는데,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아픈 아이들이 한 공간에 밀집되고, 병이 퍼지고, 병원비가 쌓이고, 결국 생존에 필수적인 사료와 모래까지 후원을 요청하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물음이 왔다. 책임지지 못하는 구조가 과연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던 것이었나. 내가 구조하며 바랐던 건 내 만족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행복한 삶 아니었나. 그때 처음으로, 더 데려오는 것을 멈추었다.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존재들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함께 숨 쉬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 아이들의 하루를 온전히 지켜보는 일. 그때 알았다.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 많이 붙잡는 일이 아니라, 한 존재를 끝까지 살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 순간, 관계는 소유에서 존재로 조용히 옮겨갔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방식은 개인의 태도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태적이고, 참여민주적이며, 비물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자 지배 없는 공존의 원리다. 소유의 방식이 끝없는 축적과 경쟁으로 인간과 세계를 함께 소모시킨다면, 존재의 방식은 관계와 참여를 중심에 두고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프롬이 이 책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 구조 모두의 전환을 함께 말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존재 방식으로 사는 것은 더 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식만이 인간과 세계를 함께 살게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경험에 이름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구조를 멈추던 그 순간에 내가 느꼈던 것, 숫자 대신 한 아이의 하루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의 감각 ,그것이 프롬이 말한 존재 방식이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