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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Sep 25. 2021

47년생 엄마 #2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1장 유년 시절(5~7세)     


아버지    


 내 나이 다섯 살 때쯤이었다. 어머니는 그 당시 보따리 비단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장사해 번 돈으로 청송 읍내에다 조그만 집을 샀다. 그 집에서 우리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 언니, 나 이렇게 셋이서 살았다. 어머니가 보따리 장사하러 나가면 언니랑 나랑 둘이 집을 지키면서 어머니가 돈 많이 벌어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 시절에는 차도 없어 어머니는 비단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 다니면서 장사를 했다. 줄곧 촌으로 다니면서 비단을 쌀로, 다른 곡식으로 바꾸었다. 그 당시는 6.25 전쟁 난지 얼마 안 돼서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우리 두 자매는 어머니가 며칠 동안 안 돌아오시면 어려서 음식도 잘 못 해 먹으니까 주로 생쌀을 많이 씹어 먹었다.

독립 운동하러 떠난 친아버지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셨다. 어릴 때 들었던 아버지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경찰이었다. 어머니와 결혼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청송에서 함께 사셨다. 나의 친가 쪽에는 딸이 셋, 아들이 셋 모두 육 남매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이라 할아버지가 많이 귀여워해서 같이 사셨다. 친할머니는 막내며느리인 어머니도 엄청나게 예뻐하셨다고 한다. 외가 쪽도 딸 다섯에 아들 하나로 육 남매다. 어머니는 셋째 딸인데 딸 중에서 가장 공부를 잘해서 그 시절에 한자도 잘 읽으셨다. 또 길쌈도 잘하고 뭐든지 척척 잘했다. 어머니가 길쌈을 하고 있으면 동네 처녀들이 와서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공부를 가르쳐 주느라 일을 못 하면 공부를 마친 동네 처녀 여럿이 모여서 길쌈하는 걸 후딱 끝내줬다. 큰어머니 두 분은 글을 모르는데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편지 써달라고 하면 써주고 사람들이 결혼하면 사돈에게 편지도 다 써주었다. 친할머니는 야무지고 똑똑한 막내며느리를 가장 끔찍이 여겼다고 한다. 그 당시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는 둘 다 결혼해서 한동네에 살았다. 친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시면서 동네에서 잘 사는 분이셨다. 첫째 큰아버지가 친할아버지에게 한방 의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직장도 잘 다녔고 어머니는 시부모님 잘 모시고 살면서 딸 둘을 낳았다. 돈도 모아서 밭 열 마지기도 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경찰직을 그만두고 나왔다. 아버지가 경찰이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죄 없는 한국 사람들을 데려다가 때리고, 전기로 지지고, 고춧가루를 코에다 집어넣고 하는 고문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가끔 일본 사람들 몰래 우리나라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일본 사람들 밑에서 경찰은 할 수가 없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도와주다 친구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만주에 독립운동을 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 그 친구는 만주로 먼저 가서 연락할 테니 너는 뒤따라 오라고 했다. 친구로부터 한참 동안 연락이 없어 당분간 청송 도평 면서기로 취직을 해 호적계에서 일하셨다. 그러던 중 만주에 자리를 잡았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만주로 떠나려고 했지만 차비가 없었다. 얼마 전 밭 열 마지기 샀고 경찰을 그만두고 몇 달을 그냥 쉬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형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 형은 돈을 빌려주려도 해도 돈은 없으니 정말 만주에 가고 싶거든 송아지 한 마리라도 팔아 가지고 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형이 준 송아지를 팔아 차비를 마련했다. 아버지 혼자 떠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간다고 했다. 그 당시 내 위로 언니가 둘이 있었는데 언니들은 외갓집에 맡겨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주로 떠났다.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는 도중,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차 안에서 일본 경찰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받는 데 뭔가 수상한 낌새를 맡은 일본 경찰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경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서에서 두 분은 다시 조사를 받았다. 어머니는 일본 경찰이 물었을 때 처음 한 말을 그대로, 열 번을 물어도 바꾸지 않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자라서 조사를 심하게 하고 일본 경찰들이 무조건 때리면서 조사를 하니 그만 말이 엇나가서 전기로 지지고, 고춧가루를 코에 집어넣는 고문을 당했다. 너무 많이 맞아 기절한 아버지를 만주 벌판에 버렸다. 아버지를 버린 날 해방이 되어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이상자가 되어 버렸다.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는 그 후로 정신이 돌아오면 집에 찾아왔다. 하지만 정신이 나가면 맨발로 돌아다니며 두루마기를 덮어쓰고,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에 가면 무얼 먹고 사는지 열흘도 있다 오고, 한 달도 있다가 산에서 내려왔다. 배가 아주 고프면 산에서 가까운 집을 찾아가서 밥 좀 달라고 구걸해서 밥을 먹었다. 아버지가 아픈 사람이니 사람들이 이해해주면 좋으련만 밥 준 사람이 둘째 큰아버지에게 와서 싫은 소리를 했다.

  “동생이 어젯밤 우리 집에 들어와서 밥 달라고 해서 밥을 줬네. 우리도 먹고 살 양식이 없는데 자네 동생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하니 안 줄 수도 없고 그러니 앞으로 동생 단속 좀 잘하게.”

둘째 큰아버지는 이런 소리를 듣고 아버지를 죽으라면서 보기만 하면 두들겨 팼다. 아버지는 형이 무서워 더 산속에 들어가 숨어서 나오지 않으니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또 둘째 큰아버지는 아버지만 보면 만주 갈 때 차비로 준 송아지를 갖고 오라고 하면서 마구 두들겨 팼다. 아버지는 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배가 고프면 거지들처럼 동네에 밥을 얻어먹고 다녔다. 


  어머니를 예뻐하시던 친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새 할머니를 모셔오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대신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큰어머니는 친할머니가 계실 때는 우리 어머니에게 꼼짝을 못 하시다가 친할머니가 안 계시니까 어머니를 그렇게 구박을 했다.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땐 할머니가 우리 어머니를 막내며느리라고 그렇게 사랑해주시고, 어머니가 공부를 잘해 편지 쓸 일이 있으면 편지도 대신 써 주고 그랬는데 이제 와서 큰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우리 어머니가 그런 편한 일만 했다고 어머니를 미워했다. 


  아버지가 온전치 못하니 어머니는 시댁에서 쓰던 방에서 쫓겨나 조그마한 골방 하나를 얻었다. 큰어머니가 골방을 얻어주었는데 그 방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둘이 자기도 너무나 작은 방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돈도 벌어 오지 않고 미쳐서 그러고 다니니 언니 둘하고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할 수 없이 큰집으로 들어가 집안일도 해주고 아버지가 결혼할 때 받은 열 마지기 밭농사를 지었다. 경상북도는 논이 별로 없다. 아버지 고향은 청송 도평 누린 동이라는 곳으로 아주 산중이라 쌀 구경은 못하고 큰집에서 조밥을 바가지에다 조금 떠주면 그걸 갖고 와서 네 식구가 먹었다. 밥은 항상 모자라 배고픔을 면치 못했다.

“시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우리가 이렇게 배를 곯지는 않을 텐데 시어머니가 안 계시니 이런 설움을 겪는구나!” 하시면서 어머니는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그리워했다.      


 가을이 되었다. 아버지가 경찰 하면서 밭 열 마지기 사놓은 땅에 추수하려고 하니 둘째 큰 아버지 내외가 서로 짜고 추수를 다해 가서 곡식을 큰집 곳간에 넣어두고는 어머니더러 큰집에서 일하고 배급을 타서 먹으라고 했다. 어머니는 둘째 큰아버지에게 따졌다.

“왜 그래야 하나요?”

“만주 갈 때 송아지 한 마리 주었으니 지금이라도 그 소를 갖고 오면 땅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땅을 못 주지.”

“동생이 저렇게 병이 들어서 돈도 벌지 못하고 있는데 동생 병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동생만 보면 죽으라고 때리더니 그 속셈이었군요. 땅을 뺏으려고 송아지를 주고 이제는 동생이 병이 들어온 걸 오히려 좋아하는군요. 내가 일 년 동안 배고픔을 참아가며 그 많은 식구 밥을 다 해주고, 그 큰살림하면서 틈나는 대로 밭농사 지었어요. 추수도 못하게 하면 우리 식구는 굶어 죽으라는 건가요?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네요.”

어머니는 더 이상 큰집에서 식모살이하면서 살기가 싫어졌다.


외가로 들어가다    


 일 년 동안 큰집 집안일하고 농사일하는 동안 큰집에서는 그 대가를 주긴 했다. 아침, 저녁 두 끼를 주는데 바가지에다 꽁 조밥을 너무 조금 줘 언니 둘은 빼빼 말랐다. 그러다가 둘째 언니가 병들어 죽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있다가는 ‘딸 하나 남은 것마저 죽이겠구나’ 하면서 큰언니를 데리고 외갓집으로 갔다. 우리 외갓집은 청송 송생이라는 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갔다가 딸까지 데리고 친정에 있으려니 눈치가 보였다. 먹고 살기 위해 어머니는 언니를 외갓집에 떼어 두고 의성 읍내에 있는 포목점에 식모살이를 갔다. 

  

  어머니는 길쌈도 잘하지만 바느질도 잘했다. 한복이나 두루마기, 도포 같은 옷도 잘 만들었다. 포목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데 자꾸 배가 불러왔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들어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먹고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지금 아기를 낳아 기를 형편이 안돼 고민하다가 나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 시절에는 낙태시키는 병원도 없으니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뒹굴기도 했다. 별의별 짓을 다해도 애기가 떨어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열 달을 채워 나를 낳았다. 


  어머니는 혹시 아들이나 낳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는데 또 딸을 낳아 도저히 키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기가 죽으라고 이불을 폭 덮어놓고 하루 종일 일하러 나갔다. 집에 들어와서 '종일토록 젖 한번 주지 않고 이불을 덮어 두었으니 죽었을 거야' 하면서 이불을 들추었는데 아기가 눈을 새카맣게 뜨고 있어서 아기를 안고 울었다.

“내가 너를 죽이려고 온갖 짓을 해도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쓰는 너를 쳐다보니 가여운 마음이 들어서 너를 죽일 수가 없구나.” 하면서 젖을 물렸다. 어머니는 아기 젖만 먹여서 눕혀놓고 또 배가 고파 울면 먹여서 눕혀놓고 일을 했다. 아기는 생전 안아 달라는 소리도 않고 누워서만 키웠는데 저절로 일어나 앉고 저절로 기어 다녔다. 그래도 돌이 되면 걸어 다녀야 하는데 돌이 되어서야 겨우 기어 다닌 것이다.


내가 겨우 기려고 할 때, 어머니는 비단 한 보따리를 세궁 돈(품삯)으로 받고 식모살이를 끝냈다. 어머니는 나와 언니를 외갓집에 맡겨 두고 비단을 팔면서 비단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는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색시, 외숙모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내가 외숙모 머리에 똥을 싸고 다 처발라서 외숙모가 나를 그렇게 미워했다고 한다.      


다시 모인 네 식구     


  그렇게 세월이 흘러 외갓집에서 지낸 지 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어머니는 비단 보따리를 이고 촌으로 다니면서 비단을 파는데 촌사람들이 돈이 아니라 곡식을 주고 바꾸어서 옷을 해 입었다. 비단 보따리도 무거운데 비단과 바꾼 곡식은 더 무겁다. 어머니는 그 힘든 장사를 내 나이 네 살 때까지 했다. 비단 장사로 돈을 벌어 청송 읍내에다 집을 사 우리 세 식구가 외갓집에서 나왔다. 이사 가서 일 년 가까이 살면서 어머니는 계속 비단 장사를 했는데 어린 딸 둘만 집에다 두고 다니니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기만 하면 괜찮은데 먼길을 다니다 보면 저녁에 돌아오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당시 나는 네 살이고 언니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아 열두 살이다. 밥을 해 먹으려면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어야 하는데 집에 불이 날까도 걱정이고 어린아이들만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위험하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친가 큰집 식구들이 찾아와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불러서 같이 살라고 했다. 그제야 우리는 청송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보고 애들 잘 보라고 하고는 장사를 하러 나가 일주일 만에 들어올 때도 있고 열흘 만에 들어올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세월이 흘렀어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함께 살면서도 집에서 책만 보고 바깥 활동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밥을 지으려면 나무가 필요했다. 아버지는 나무가 없으면 옆집에 있는 나무를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 것 인양 가져다 썼다.

“나무가 없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올 생각은 하지 않고 집에서 허구한 날 책만 보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니 더는 그런 꼴을 볼 수가 없구나.”

어머니는 집에 돌아와 하소연을 했다. 


  어머니는 가족을 건사하느라 자꾸 몸이 약해졌다.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몸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큰집 식구들은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온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었지만 아무도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너무한 것이 아니냐, 한번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 후딱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않는데 병든 사람을 데려다가 놨으면 혹시 병이 더 나지 않았나 궁금해서라도 한번 들여다볼 수도 있지,  어떻게 한 번도 들여다보질 않는 거냐.”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큰집으로 갔다. 가서 보니 큰아버지는 경주 사방이라는 곳으로 이사 가고 없었다. 큰아버지는 한약방을 하고 있었는데 막내 동생인 우리 아버지를 위해 약도 많이 해서 먹였다. 그런데도 아버지 병은 낫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이사 간 그 집에 둘째 큰아버지가 들어와 친할아버지, 새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둘째 큰아버지와 담판을 지었다.

 “밭 열 마지기 농사를 짓고 있으니 밭 세로 일 년에 보리쌀 한 말씩이라도 주세요.”

 “만주 갈 때 차비로 준 송아지 갖고 간 것 이자까지 쳐서 다 갖고 오면 밭 열 마지기에 대한 세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한 푼도 세를 줄 수 없네.”

 “정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당신 동생을 내가 거둘 수 없으니 동생을 돌려보내겠어요.”

 “맘대로 해. 밭세로 보리 한 말은 절대로 줄 수 없네.”

 “시숙이 정 그렇게 나오면 내 이 길로 다시는 이 집 문턱을 넘지 않을 겁니다.”

어머니는 막말을 하고 그 길로 집에 와 아버지 짐을 다 싸 갖고 아버지를 큰집으로 보내버렸다. 언니나 나나 아버지와 함께 산 것이 내가 다섯 살 때 한 오 개월뿐이었다.      


의붓아버지     


 아버지를 보내고 어머니는 몹시 아프기 시작했다. 장사도 할 수 없고 집에 있는데 어떤 사기꾼이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많이 준다고 꼬였다.

 ‘지금은 몸이 아파 장사를 할 수 없는데 이자만 받아도 편히 살 수 있으니 이거라도 해야겠다.’

비단 장사 밑천을 안동 사람이 이자 많이 준다고 꾀어서 빌려주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그 사람이 보이지도 않고 이자도 안 줬다. 그 사람은 청송에서 다리 놓는 일을 하는 업자였다. 업자가 인부들 일 시키고 품삯도 주지 않고 도망을 갔다. 어머니는 아픈 몸에 안동까지 돈 받으러 갔다가 몸이 더 안 좋아졌다. 몸도 아픈데 빌려준 돈도 다 떼이고 먹고살 일이 캄캄했다. 


  어머니가 돈을 벌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청송 집을 팔기로 했다.

 “그 기와집을 살 때는 평생 살려고 생각하고 산 집인데 그 집 사고 삼 년도 못돼서 팔려고 하니 너무나 아깝다.”

 청송 기와집을 팔고 사기꾼을 찾아서 돈을 받으려고 안동으로 나왔다. 사기꾼을 찾아갔는데 사기꾼은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서 돈을 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돈 받는 것은 그만두고 기와집 판 돈으로 안동에 조그만 학고방(판잣집) 집을 두 채를 사서 한 채는 우리가 살고 다른 한 채는 세를 놓았다. 그 집에 살면서 어머니는 비단 집에서 심부름도 하고, 물건도 팔며 돈을 벌었다. 어머니는 작댁꼬챙이처럼 말랐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설사를 하니까 살이 안 찌고 자꾸 말랐다.


  어머니는 비단 집에서 일을 하다 우리 의붓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의붓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기 전에 우리 집에 와서 나한테 과자도 사주고 빵도 한 보따리씩 사다 주었다. 우리 어머니와 사귀려고 그렇게나 나를 이뻐했다. 내가 처음 의붓아버지를 만났을 때가 내 나이 여섯 살 때였다. 나는 처음에는 의붓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의붓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면 의붓아버지는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꼬드겼다.

 “아버지라고 부르면 과자도 사주고, 빵도 사줄게.”

하면서 과자도 사 오고 빵도 사와 꼭 아버지 소리를 들어야만 그것을 주었다. 정말 아버지 소리를 하기 싫은데 맛있는 빵과 과자를 얻어먹으려면 아버지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지 얼마 안 돼서 언니는 외갓집으로 보내고 어머니는 나만 데리고 안동 해화동 어게골이라는 동네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옛날에는 거의 다 초가집이다. 의붓아버지가 사는 집은 초가집이라도 아주 작은 집이었고 그 집 전체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골방 한 칸을 얻어서 살고 있었다. 처음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아무것도 없고 방구석에 조그만 단지 하나만 있었다. 내가 그 속을 들여다보니 밀가루가 단지 밑바닥에 조금 붙어있을 뿐이었다. 의붓아버지의 재산은 그게 전부였다. 


  의붓아버지는 미장일 하시는 분이었는데 하루하루 일을 해서 먹고사는 하루살이였다. 큰 방 주인은 점쟁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에 자려고 하면 밤새 귀신하고 싸우는지 헛소리를 해댄다. 또 방이 너무 작아 의붓아버지와 어머니, 나랑 셋이 누우면 꽉 차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방에서 6개월 정도 살다가 안동 집을 팔아 집 살 돈을 마련했다. 어머니는 어게 골에 사람도 살지 않는 빈집을 사 이사 갔다. 이사 가서 보니 비가 오면 비가 새서 자다가도 이불이 다 젖곤 했다.


  의붓아버지와 산 지 얼마 안 지나서 어머니는 동생을 가졌다. 임신한 뒤 어머니는 먹기만 하면 설사를 잘잘하고 배가 아프다고 했다. 결국 그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가 품팔이해서 벌어오는 돈으로는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들어 어머니는 병원에도 못 갔다. 


  우리 집 앞에는 낙동강이 흘렀는데 강가에는 길고 높은 둑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약쑥이 아주 많았다. 나는 매일 한 소쿠리씩 뜯어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어머니는 약쑥을 찧고 헝겊에 꼭 짜서 물을 만들었다. 여름내 아침저녁으로 쑥 생즙을 한 잔씩 드셨다. 겨울에는 생쑥이 없으니까 쑥을 말려다가 쑥 곰을 해서 겨우내 마시고 배 아픈 것이 다 나았다. 


  병이 나으니 어머니에게 애기가 생겨서 자꾸 배가 불러온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남동생이었다. 쑥을 하도 많이 먹고 나아서 애기가 푸르족족한 것이 애기 몸뚱아리나 얼굴이 모두 쑥색이었다. 그런 애가 클수록 쑥색이 없어지고 뽀얀 색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내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어가골길과 어가골 집이 있던 곳(2017)
어머니와 의붓아버지와 함께 가족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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