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아주 Sep 25. 2021

47년생 엄마 #3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2장 소녀 시절(8~12세)     


힘든 일의 시작     


  나는 여덟 살뿐이었지만 집에서 할 일이 많았다. 동생도 업어서 키워야 했고 아버지가 미장일 하시는데 따라다니면서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해야 했다. 주로 무슨 일을 했냐 하면, 양동이에 물 떠다 나르기, 물로 흙을 이기기 등 어린아이가 하기에는 벅찬 일들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흙판에 진흙을 넣어 건네면 그것을 떼서 벽에 바르는 일을 했다. 나는 또 흙벽돌도 찍어 내야 했고 우리 집 옆에 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무도 해야 했다. 이렇게 아버지는 내가 한시도 놀지 못하게 일을 시켰다. 하루는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한테 투정을 부렸더니 아버지는 어느새 그걸 알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여덟 살 때부터는 집에서 돼지도 키우고 닭도 먹이고 해서 시간만 있으면 개구리를 잡아야 했다. 날만 새면 바께쓰를 들고 개구리를 잡아다가 돼지랑 닭에게 먹이로 주었다. 돼지가 두 마리, 닭 이십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당시 낙동강 도랑에 가면 개구리가 버글버글했다. 날이면 날마다 개구리를 하도 많이 잡아대니 저녁에 자려고 눈을 감으면 눈앞에 개구리들이 아롱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개구리 떼가 나를 덮쳐서 죽이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그런 징그러운 일을 시키고 집에서 조금만 쉬려고 하면 동생을 업어주라고 했다. 동생을 안 업어주면 의붓아버지가 날 때리고 땅 개간하는 곳에 데리고 가서 땅을 쪼라고 시켰다. 여덟 살짜리에게 우리 어머니와 의붓아버지는 지독 시리 일을 시키고 어쩌다 잘못하면 의붓아버지가 그렇게 나를 때렸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개구리를 잡아오면 개구리 다리를 큰 것만 골라서 껍데기를 벗기고 접시에 담아 불에 구워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개구리 고기를 많이 먹어서 의붓아버지에게 매를 많이 맞았어도 금방 회복된 것 같다. 개구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때 그 개구리 고기가 정말 맛있었다. 지금은 아무리 맛있는 고기를 먹어도 그 개구리 고기보다 더 맛있는 고기는 없다.


  아버지는 낙동강 둑에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그 밭을 개간할 때 나를 꼭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켰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강둑에 주로 호박, 감자, 들깨 같은 것들을 심고 그게 자라면 들깻잎도 따고 호박잎도 땄다. 아버지가 그걸 단으로 묶어 지게에 담아 읍내에 갖다 주면 나는 장사까지 해야 했다. 


  읍내 장에서 농사지은 것을 몇 번을 팔았는데 하루는 한 단도 팔지 못했다. 그걸 집으로 갖고 가자니 내가 너무 어려서 지고 갈 수도 없고, 해는 떨어져 어둡고, 그냥 버리고 가면 아버지한테 맞을 게 뻔하니 눈물이 자꾸 났다. 이렇게 울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오늘은 하나도 못 팔았니? 한 단에 얼마야?”

 “한 단에 오 원이에요.”

 “오 원 파는 것을 두 단에 오 원씩 줄 수 있어?”

안 주자니 해는 다 빠졌고 내가 갖고 갈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그 아주머니가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돈을 조금 받았다. 돈을 받고 집에 가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이 돈 갖고 집에 가면 아버지가 팔아오라는 돈의 반도 안 받았다고 틀림없이 매질할 거야.’

나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워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밖에 서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나오셨다.

 “너 왜 이렇게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오고 대문 밖에 서 있어? 어서 들어가자.”

나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어머니, 제가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가 저를 때릴 것 같으니까 들어가지 않을래요.”

내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어머니는 집 안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셔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벌써 자고 있다”

그제야 나는 어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갔다.      


나도 찰떡 한 입 먹어 봤으면     


  늦은 가을날이었다. 아버지는 애호박이랑 호박잎, 들깻잎을 따서 나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이제 나는 꾀가 들어 아버지에게 채소 두 다발 만들 것 갖고 한 다발만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안 만들어 주면 절대로 팔러 가지 않는다고 버텼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오늘은 값을 깎아 두 다발에 오 원씩 받아 오라고 했다. 아버지가 채소를 장에 지어다 주고 간 뒤 남들은 한 다발에 오 원씩 파는데 나는 두 다발에 오 원씩 팔았더니 금방 팔렸다. 그래서 그날은 일찍 집에 갈 수가 있었다.


  낙동강 뚝방이 얼마나 길고 긴지, 거기다가 호박을 심었으니 호박을 매일 팔아도 매일 한 짐씩 땄다. 그리고 여름내 아버지가 읍내 장에 지게로 져다 주면 호박을 팔았다. 하루는 안동 읍내 장에서 사람들이 벙어리 찰떡 집에서 찰떡을 사서 맛있게 먹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 찰떡이 너무 먹고 싶었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졸랐다.

 “내일 장에서 벙어리 찰떡 사주면 장사하러 가고 찰떡 안 사주면 안 가.”

내 말을 듣고 어머니가 의붓아버지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도 내일은 이 호박 팔아서 찰떡 사 먹읍시다.”

  다음날 신나게 호박을 팔고 찰떡을 사 갖고 와서 온 식구가 맛있게 먹었다. 지금은 그렇게 맛있는 찰떡이 없다. 안동에 가면 벙어리 찰떡이 아주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겨울이 되었다.     


학교 가고 싶어요     


  내 친구들은 학교를 가는데 나는 학교도 안 가고 집에서 동생이나 업어 키우고 있었다. 또 아버지는 내가 쉬는 것만 보면 데리고 가서 일을 시켰다. 이런 모든 일이 하기 싫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학교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너는 내가 일부러 학교에 안 보내는 거야. 나는 공부 잘해서 훌륭한 남편 만났지만, 공부 잘한다고 잘 사는 게 아니더라. 너희 큰아버지들은 네 아버지처럼 공부도 안 했고 큰어머니들은 글은 몰라도 남편들이 건강하니 가정을 잘 지키면서 잘 살더라. 네 아버지처럼 아무리 공부 잘하고 똑똑하면 무엇하냐? 나라 지키겠다고 잘못 생각해서 저렇게 병이 들으니 부모, 형제, 마누라, 자식한테도 버림받고 식구들조차 지키지 못하잖아. 그런 거 다 떠나서 밥 한술 주는 사람 없이 다 떠나잖아. 그러니 너도 공부 같은 것 할 생각 말아.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잘 사는 거야.”


  어차피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 호적이 없어서 나를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그때까지 동생들도 호적에 올리지 않고 살고 있었다. 그 시절은 6.25 전쟁 후라 호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서 정부에서는 이북 사람이라면 무조건 호적을 새로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가 면사무소에 가서 이북 사람이라고 속이고 호적을 만들어 어머니와 혼인신고를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드디어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에 가니 친구도 생기고 한글도 배우니 너무 좋았다. 그러나 이 좋은 것도 잠깐이고 한 이 개월쯤 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월사금을 갖고 오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입학은 시켜 주었지만, 회비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선생님은 공부 시간이 되면 공부를 못 하게 하고 집에 가서 회비를 갖고 오라고 하면서 쫓아냈다. 나는 아침에 학교에 간다고 하고 나왔지만 학교 가면 선생님이 공부도 못 하게 하고 쫓아내니 학교 가기가 싫어졌다. 그렇다고 집에 가면 아버지가 자꾸 일을 시키니까 집에도 가지 않고 낙동강 방청 둑에서 실컷 놀다가 학생들이 집에 가면 같이 따라서 집에 들어갔다. 그렇게 삼 개월 놀다가 결국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뒤로는 죽으나 사나 시간 있으면 동생 업고 다니면서 일을 했다. 아버지가 미장일 하러 가면 따라가서 잡일을 해야 했고, 농사일 가면 동생을 업고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도와야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는 뒷전이고 계속 일만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 년쯤 지나 또 둘째 동생이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쌀이 없어서 밥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의붓아버지는 아침에 일간 다고 하시고는 나가서 안 계셨다. 내가 어떡할지 몰라하자 어머니는 나에게 바가지를 주면서 옆집에 가서 쌀 좀 꿔오라고 하셨다. 내가 옆집에 갔더니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쌀이 없어서요. 쌀 좀 꿔주세요.”

 “참 가엾은 것....”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쌀 한 바가지를 주셨다. 나는 그걸로 쌀밥을 해서 어머니께 드렸다. 그 쌀밥이 정말 먹고 싶었다. 청송에서 언니랑 친아버지랑 살 때는 쌀밥만 먹었는데 의붓아버지 만나서는 밭농사만 지으니 매일 꽁 조밥만 먹고 호박죽 쒀서 먹었다.  


반가운 요강     


 둘째 동생이 생기니 큰 동생 돌보는 것은 늘 내 차지였고 밥도, 빨래도 내가 해야 했다. 하루는 어머니 피 빨래를 해야 해서 빨래를 한 보따리이고, 요강도 피가 묻어서 씻으려고 가지고 갔다. 낮에 가서 빨래를 다 했는데 아버지가 일 갔다 와서는 요강을 갖고 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밖에 나가 보니 요강이 없었다.

 ‘큰일 났구나. 낮에 요강을 씻어서 낙동강 가 돌 위에 얹어 놓았는데 빨래만 갖고 왔네. 그 요강이 사기요강도 아니고 나무 요강인데 누가 가져갔으려나? 혹시 누가 갖다가 엿이라도 바꿔 먹었으면 어떡하지? 그럼 난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텐데….’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할 수 없이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당장 요강 찾으러 가자고 하셨다. 그날따라 구름이 끼어 하늘에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전기도 없는데 캄캄한 밤에 냇가에 가자고 하니 정말 무서웠다. 낙동강 가에는 귀신 우는 소리도 들리고 도깨비 불도 나오고 해서 해가 지면 아무도 밖에 나오는 사람이 없다. 그날 저녁에는 유난히도 아버지가 더 무서웠다. 나는 등불을 들고 앞서고 아버지는 뒤에 따라오셨다.

 ‘만약 요강이 없으면 아버지가 나를 강물에 밀어 넣는 것 아니야? 아니면 나를 집에서 쫓아내시려나?.’

온갖 잡생각을 하면서 요강 놓은 곳에 갔더니 다행히도 요강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 요강을 안고 너무 반가워서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요강을 찾아서 그날은 무사히 잘 넘어갔다. 그날 저녁에 겪은 일이 너무 무서워서 평생 살면서 그게 잊히지 않는다.  


의붓아버지의 매질     


  의붓아버지는 아홉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거지 생활을 했다. 거지 우두머리가 시키는 대로 해야지 말을 안 들으면 무조건 맞았다. 대장이 밥 얻어 오라면 밥을 얻어와야 했고 고물 주어오라고 하면 고물도 주어야 했다. 그러다 사람도 때려서 돈도 뺏어다 주었다. 거기서 애들 패는 버릇이 들었는지 어디 갔다가 기분이 안 좋으면 이유 없이 나를 때리곤 했다. 또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말다툼하면 의붓아버지가 밥상을 마당에다 던지고 살림을 때려 부쉈다. 의붓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깡패들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화만 나면 진상을 부렸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으로 넘어왔는데도 의붓아버지는 한국에서 거지 생활을 했다. 먹고살려고 막일 일을 하면서 미장일을 배웠는데 그때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이 아픈 아버지를 때리고 땅도 뺏고 복 없는 여자 만나서 아버지가 그런 병에 걸렸다고 하는 얘기에 질려서 형제가 아예 없는 의붓아버지와 결혼한 것이다. 의붓아버지가 어머니 보는 앞에서 나를 때리면 어머니도 나를 죽으라면서 때렸다. 그러면 아버지가 슬그머니 때리는 것을 멈췄다. 나는 매번 매 맞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맞았다. 내가 그 모든 매를 맞았으니 우리 어머니가 의붓아버지랑 살았지, 어머니가 맞았더라면 어머니는 벌써 집을 나갔을 것이다. 내가 매를 많이 맞은 기간은 여덟 살 때부터 열 살 채울 때까지였다.


  하루는 아버지가 서숙 밭에 가서 새를 보라고 했다. 옛날에는 참새가 얼마나 많은지 한번 날기 시작하면 하늘이 보이지 않게 새까맣게 날았다. 그런 참새를 보라고 해서 서숙 밭에 갔다. 그런데 밭 밑쪽에서 ‘후여~’하면 밭고랑이 어찌나 긴지 새들이 밭 위쪽에 가서 뜯어먹고, 밭 위에서 ‘후여~’하면 밭 밑에 와서 뜯어먹었다. 이렇게 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새를 봤는데 저녁이 되어 아버지가 새를 얼마나 잘 봤나 검사하러 나왔다. 아버지는 밭을 살피더니 나를 오라고 했다.

“여기 서숙 밭 바닥을 봐.”

밭 바닥에는 새가 까먹은 쭉정이가 바닥에 쫙 깔려있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새 보라고 했더니 새는 보지 않고 놀기만 했지!”

그리고는 서숙 밭둑에 있는 들깨 나무를 뽑아서 내 다리에 피가 찰찰 흐르도록 때렸다. 밭에는 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다. 피가 흐르도록 맞아도 말려주는 사람이 없어 더 모질게 맞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때리고 나를 놔주었다.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집으로 오긴 왔지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 집 뒤 비가 오면 물 빠지라고 수챗구멍을 내놓은 구멍이 있다. 그 구멍으로 들어가면 바로 옆집이다. 우리 옆집은 부잣집이라 사랑채도 있고 굴뚝도 크다. 그 길로 굴뚝으로 갔다. 굴뚝을 끌어안고 자면 정말 따습다. 그때가 늦은 가을이라 저녁이면 무척 추웠다. 나는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굴뚝을 끌어안고 밤을 보내려고 했다. 문제는 들고양이들이다. 들고양이들이 와서 눈에 새파란 불을 켜가지고는 ‘아옹, 아옹’ 하며 울었다.  나한테 그 자리는 자기 자리라고 비켜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 눈을 보면 너무 무서워 참을 수가 없었지만, 아버지 매질이 더 무서워 굴뚝을 끌어안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뜬 눈으로 날을 샜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저녁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고 들어가니까 아버지가 검사를 하러 나갔다.

  “너 이리 나와 봐라.”

아버지는 솥뚜껑을 들춰 보았다.

  “왜 솥뚜껑을 안 씻었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 뺨을 때리면서 귀 언저리를 그 큰 손으로 때렸는데 갑자기 코에서 피가 펑펑 쏟아졌다. 그 길로 매를 더 안 맞으려고 도망을 갔는데 막상 집을 나오고 보니 어디 갈 데도 없고 코피를 흘리면서 또 옆집 굴뚝에서 밤을 보냈다. 눈이 시퍼런 고양이와 싸워가면서 밤을 지새웠다. 굴뚝에서 자는데 코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한쪽 귀가 막혀버렸다. 그 뒤로 머리도 아프고 한쪽 귀가 먹어서 그때부터 그쪽으로는 아예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언니


  언니는 줄곧 외갓집에서 살다가 가끔 우리 집에 다녀가기는 했지만 의붓아버지 눈치에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니가 열일곱 살 때 집에 잠깐 들르러 왔는데 어머니가 선을 보라고 했다. 언니는 선 한번 보고 바로 결혼을 해서 외갓집에 알리지도 않고 시댁으로 갔다. 우리 집은 경상북도 안동이고 언니 시댁은 충청도였다. 어머니는 그 먼 땅으로 언니를 시집을 보내면서 언니에게 아무것도 안 해주고 보내버려 시집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언니는 이불도 없어서 시어머니랑 한 이불속에서 자고, 갈아입을 옷도 없어서 시어머니 옷을 주면 갈아입고 빨래를 해서 자기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언니가 시집에 가보니 시댁이 너무 가난한 집이라 다른 집들이 시래기를 거름 한다고 버린 것을 주워 다가 삶아서 죽을 쒀 먹고살고 있더라고 했다. 언니는 장남 맏며느리라 집안일도 많은데 시어머니 시집살이로 엄청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정도 알아보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언니를 그런 집에 시집을 보낸 것이다. 언니가 첫 친정을 와서 내 손을 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나라를 못 만나 너랑 나랑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병들어 생활력이 없으니 너랑 나랑 어딜 가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네.... 태복아, 고생스럽더라고 꿋꿋하게 이겨내고 잘 살고 있어.”

언니는 이렇게 말하고는 다음 날 시댁으로 떠났다.


  형부는 군인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다가 제대를 한 후 집에 잠시 있다가 취직을 하겠다면서 우리 집에 잠시 머물렀다. 형부가 우리 집에 있던 3개월 동안, 형부가 집에 오기만 하면 아버지가 형부 보는 앞에서 나를 때렸다. 형부가 말려도 소용없고 막무가내로 때리니 형부는 할 수 없이 집으로 가면서 이렇게 위로했다.

“처제, 미안해. 내가 있으니까 처제가 장인한테 꾸지람도 더 많이 듣고 매도 더 많이 맞는 것 같아. 이제 그만 집으로 갈게. 내가 집에 가서 돈 많이 벌어 처제 꼭 데리러 올게.”

이렇게 말하고는 형부는 우리 집을 떠났다.


물 기르기     


  내 나이 열 살, 늦은 봄에 날이 너무 가물어서 우물에 물이 잘 나지 않았다. 우리 동네에는 한 오십 가구 정도 되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 우물에서 먹을 물을 길어갔다. 우물이 말라 빨리 물을 길을 수가 없으니 아버지가 나에게 큰 독 하나를 보여주면서 비가 올 때까지 하루에 한 독씩 채워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그만 옹기 단지 하나를 주었는데 그 단지로 물을 길어다 채우라고 했다. 낮에는 우물가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물을 길어가려면 하루 종일 줄을 서도 한 단지 찰까 말까 했다. 그래서 한밤중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 새벽 세시쯤 일어나서 그 옹기 단지에 물을 반절씩 담아 이고 날랐다. 낮에는 다른 사람들이 독을 머리에 얹어주어 한 단지씩이고 올 수 있지만 밤에는 나 혼자라 물독을 들어 내 머리에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절씩 이고 나르니 큰 독에 물이 쉽게 차지 않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느라 진이 빠졌다.


  어머니가 밭에 나가 부추도 베고 호박, 깻잎 따는 동안 나는 장보는 일을 다 해 놓고 어머니가 들어오실 때까지 동생 둘을 보면서 집 청소, 설거지 등 모든 일을 완전하게 다해 놓아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면 또 아버지랑 장에 가서 물건을 팔아가지고 온다. 그 일을 하면서 돼지, 닭도 먹인다. 이렇게 하니 처음 이 집에 이사 올 때보다는 많이 부자가 됐다. 여름에는 농사를 지어 팔아 잘 먹고 지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돈도 없고 아버지가 일도 안 가니 잔소리만 듣는다. 겨울에 먹을 것이 부족하니 아버지는 나에게 조그만 옹기를 주면서 안동 읍내 가서 아래기를 받아 오라고 시켰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 안 다니는 애는 나 하나뿐이니 그 시간에 아래기 받으러 가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다. 갈 때는 옹기가 비었으니 갈 만한데 아래기도 물이라서 이고 오려면 그렇게 무겁다. 옹기를 이고 오는 길이 멀고 멀다. 그 당시는 장갑도 없고 맨손으로 옹기를 이고 오려면 손은 또 얼마나 시려운지 모른다. 그러면 아래기 이고 오면서 중얼중얼 노래를 부른다.

“새야, 새야, 참새야. 니가 우리 서숙을 그렇게 안 까먹었으면, 이렇게 추운데 장갑도 없는데 손 시리게, 참새 너 때문에 내가 양식이 모자라 이렇게 아래기 받으러 다니잖아. 제발 다가오는 여름에는 우리 밭에는 오지 마라. 참새야.”

아래기를 가지고 오면 어머니는 아래기에다가 물을 넣고 양을 불려서 먹는다. 아래기 끓는 물에 사카린을 타서 그런지 한 그릇 먹으면 아래기물이 꿀맛 같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개구리 잡다 동생 잡을 뻔하다


  우리 집에는 이제 돼지가 다섯 마리가 되었다. 아버지는 돼지 먹이로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했다. 집 앞 낙동강 가 천방 둑에 개구리가 엄청 많았다. 금방 잡아도 한 양동이가 꽉 찼다. 내가 개구리를 잡아 가지고 오면 아버지는 개구리 다리는 큰 걸로 골라 다듬어서 석쇠에다 구워주셨다. 식구들은 그것을 먹고 개구리 대가리는 돼지와 닭에게 주었다. 개구리 잡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좋은 데 개구리를 잡을 때 무서운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뱀이다. 당시는 개구리도 많았지만 뱀도 엄청 많아서 개구리를 잡다가 큰 뱀이 나를 보고 따라오기도 했다. 뱀을 보면 무서워서 막 도망쳤다.


  하루는 둘째 동생을 업고 있는데 어머니가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하셨다. 이른 가을이었는데 포대기가 솜 포대기라 무척 무거웠다. 동생을 업고, 무거운 포대기를 두르고, 양동이를 들고, 막대기 하나 들고, 논둑 가에서 개구리를 잡는데 개구리를 잡다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업혀 있던 동생이 도랑에 빠졌다. 내가 깜짝 놀라 얼른 물에서 동생을 건져냈다. 건져내기는 했지만 아기 옷이 다 젖었다. 나는 동생 옷을 홀딱 벗겨 꼭 짜서 둑에다 널어놓고 어느 정도 마른 후에 옷을 입혀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뒤로 동생이 아프기 시작했다. 동생이 너무 많이 아파서 다 죽게 되었다. 집에 바로 와서 어머니한테 사실대로 말을 했으면 동생이 안 아팠을지도 모른다. 그때가 가을이라 찬바람도 부는데 포대기는 했지만 동생을 홀딱 벗겨서 업고 다니고 물에 빠졌을 때 물도 먹고 해서 동생이 병이 난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을 하면 아버지가 또 때릴까 봐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나가고 집에 없으면 동생한테 가서 머리도 쓰다듬어주고 제발 죽지 말고 살아 달라고 울면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너무나 살아달라고 애원을 해서 그런지 차츰차츰 나았다. 동생은 한 열흘쯤 아프다가 서서히 일어났다. 동생이 나아 정말로 내 마음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가 나에게 너무한 것 같다. 솜 포대기에 동생까지 업고 있는데 개구리 잡아 오라고 하니 열 살 여자애한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다.


친아버지와의 만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붓아버지 따라 밭에 나가고 돼지 다섯 마리 먹이로 개구리 잡으러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이모가 우리 집에 왔다. 나는 학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일만 하니까 이모 따라 외갓집에 가겠다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그 먼데를 어떻게 다녀오려고 그러니.”

어머니가 말렸지만 계속 내가 떼를 쓰니 어머니는 허락하셨다. 외갓집은 청송 솔평이라는 곳이다. 이모와 나는 차를 타지 않고 거기까지 걸어서 갔다. 청송까지 가는데 금소 셋째 이모네에서 하룻밤 자고 산길에 산길을 걸었다. 외갓집 간다고 이모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청송까지 몇 날 며칠을 걸었다. 


  그 당시는 차도 별로 없고 주로 걸어서 많이 다녔다. 외갓집은 언니가 시집가기 전까지 지내던 곳이다. 외갓집은 대궐같이 큰 기와집이었다. 부자여서 머슴도 여러 명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외할머니가 지나가면 마님, 마님 하면서 크게 인사를 했다. 외할머니는 주왕산 절에 다니셨는데 스님들까지 외할머니를 잘 모셨다. 외할머니가 주왕산 절에 시주를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우리 어머니가 재가한 뒤로 다시는 어머니를 안 본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무척 다정하게 대해 주셨다. 사촌들도 많았는데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외할머니네 부잣집에 살면서도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계속 아기만 봤다고 했다. 공부까지 신경 써주는 부모가 없으니 결혼할 때까지 언니는 공부도 못하고 일만 한 것이다. 사촌들이 학교에 가면 언니는 얼마나 부러웠을까.


 외할머니와 얘기해보니 외할머니는 언니를 그렇게 시집보낸 어머니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떻게 내가 키운 애를 상의 한마디 없이 시집보낼 수가 있어?”

내가 생각해도 어머니는 좀 너무했다. 외갓집에서 지내는 동안 잘 먹고 잘 지내다 집에 왔다.


  겨울이 오니 좀 한가해져 또 외갓집에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마침 이모가 오셔서 이모를 따라 또 외갓집에 갔다. 나를 데리고 간 이모는 최고 큰 이모였다. 이모는 원래 다섯 명인데 둘째 이모는 돌아가셨다고 했다. 외갓집에 갔더니 막내 이모부가 와 계셨다. 막내 이모부가 나에게 물었다.

  “너 친아버지 안 보고 싶으냐?”

  “이모부, 나 친아버지 너무 보고 싶어요. 친아버지한테 데려다주세요.”

나는 얼른 이렇게 말하고 친아버지한테 데려다 달라고 계속 졸랐다. 막내 이모부는 부남이라는 곳에서 살고 우리 친아버지는 도평 유수내라는 곳에서 살고 있는데 두 곳이 별로 멀지 않다고 했다. 막내 이모부는 내가 자꾸 아버지한테 데려다 달라고 조르니 외할머니에게 말했다.

  “얘가 자꾸 아버지한테 데려다 달라는데 어쩌면 좋아요.”

  “그러면 데려다줘라.”

외할머니는 탐탁지 않아했지만 허락하셨다.


  막내 이모부를 따라 친아버지 집에 찾아갔다. 나를 본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너무나 반가워하셨다. 아버지가 계신 집은 원래 큰아버지가 살던 집인데 큰아버지는 경주 사방이라는 데로 이사 가고 둘째 큰아버지가 큰집으로 들어와서 큰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 친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했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새 장가를 들어서 새 할머니가 계셨다. 둘째 큰아버지는 딸이 넷이고 아들이 둘, 모두 육 남매를 슬하에 두고 계셨다. 그러니 아버지, 둘째 큰아버지, 둘째 큰어머니, 새 할머니까지 둘째 큰아버지네 식구가 모두 열 명이었다. 

  

  아버지는 매일 이 식구들을 위해 나무를 해오고, 소죽을 끓였다. 한마디로 형네 집 머슴인 것이다. 그날 저녁 아버지 곁에서 잠을 자는데 너무 추워서 일어나 보니 아버지는 이불도 없이 그냥 주무시고 계셨다. 그걸 볼 때 내 나이 열 살이었지만 아버지가 너무 불쌍했다. 어디 이불이 있으면 갖다 드리고 싶었다. 


  이튿날 이불 찾으러 큰집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둘째 큰아버지 식구들이 덮는 이불뿐이었다. 찾다 보니 새 할머니 방에 안 덮는 이불이 한 채 있었다. 그 이불은 특별한 손님이나 오면 내놓으려고 마련한 예비 이불인 것 같았다. 만약 새 할머니가 아니고 우리 친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모처럼 다니러 온 막내 손녀에게 그 이불을 덮어주지 않았을까.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친할머니께서 우리 친아버지를 막내아들이라고 최고 사랑했다는데 모처럼 온 막내 손녀에게 동지섣달에 이불도 없이 잠을 재운 걸 보니 의붓아버지나 의붓할머니나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겨울에 올 때는 아버지께 꼭 이불을 해다 드려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아버지, 나 이제 어머니한테 갈래요. 외갓집에 데려다주세요.”

아버지는 자꾸 아버지하고 살자고 하셨다. 나도 의붓아버지 밑에서 매 맞고 사느니 친아버지 하고 살고 싶었다. 그런데 둘째 큰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뭘 잘못했다 하면 나 보는데서 아버지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걸 보면서 하루도 거기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를 졸라 큰집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걸어서 외갓집에 가는데 그날이 도평 장날이었다. 장날이라 장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아버지는 나를 세워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했다.

  “얘가 내 딸이에요. 얘가 내 딸이에요.”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많이 울었다. 우리 어머니가 조금만 참고 살았더라면 맨날 이유도 없이 때리는 의붓아버지가 아니라 저런 아버지 밑에서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를 떼놓고 죽어도 가기 싫은 의붓아버지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하니 어린 나이라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다음 겨울에는 꼭 아버지 이불 사 올게요.’

다짐에 다짐을 했다. 아버지는 외갓집에 나를 데려다주고 쓸쓸히 가셨다.      


아버지의 이불     


 열한 살 봄이 왔다.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을 때였다. 하루는 친구가 저녁때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말을 했더니 내가 일 잘하면 저녁에 보내준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할까요?”

내가 묻자 아버지는 보리밭을 매라고 했다.

저녁에 놀러 갈 욕심에 넓고 넓은 밭을 부지런히 맸다. 보리밭을 다 매고 저녁에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늦게 오지 말고 일찍 들어 온나.”

 ‘예’ 하고 놀러 갔는데 다 놀고 나서 집에 오려는데 내 신발이 없었다. 다른 친구들 신발은 모두 있는데 내 신발만 없었다. 그전에도 아버지가 늦게 왔다고 내 신발을 가져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오라고 했는데 늦었다고 그새 신발을 가져가셨나 보다.’

할 수 없이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집에 왔다. 집에 와보니 대문이 잠겨 있었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문 밖에서 밤을 샜다.


  하루는 밥 먹은 설거지를 하고 방에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들어보시고는 솥 가에도 잘 닦지 안 닦았다고 호통을 치면서 매질을 했다.

  ‘아버지는 새로 설거지를 하라고 말로 하면 잘할 텐데 꼭 매질부터 한단 말이야. 이참에 우리 친아버지한테 가서 살아야겠다.’


다음날 나는 어머니 몰래 모아 둔 돈으로 이불 가심을 사 친구네 집에 맡겨 두고 어머니한테 외갓집에 보내 달라고 했다. 때마침 이모님이 오셔서 이불 가심을 들고 외갓집에 갔다. 외갓집에 며칠 있다가 친아버지 댁에 가는 버스를 탔다. 아버지는 큰집에 도착한 나를 보고는 정말 좋아하셨다. 나는 둘째 큰어머니에게 이불 가심 갖고 간 것을 내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이불도 없이 주무시는 것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파 그러니 꼭 이불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내가 말하는 것을 보고 계시던 둘째 큰아버지가 미안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내가 네 엄마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빌었으면 네 어머니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머니하고 살기 힘들면 네 아버지하고 우리랑 같이 살자.”

나도 아버지가 나를 너무 사랑해주시니까 친아버지 곁에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또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둘째 큰아버지가 내 앞에서 아버지를 때렸다. 그걸 보니 하루도 그 집에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어째서 맞고만 살아나하나....’

외갓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성당에 다니다     


  세월이 지나 열두 살이 되었다. 이른 봄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또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너무 속이 상해서 이모네 집에나 가야겠다고 집을 나섰다. 이모네 집은 우리 집에서 사십 리를 가야 했다. 아침 열 시쯤 집을 나서서 한 십 오리쯤 가다 보니 성당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건물이 성당인 줄도 모르고 들어갔는데 건물 밑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 동상이 있어서 그곳에 올라가 만져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성모님 석고상이었다. 먼 길을 걸었더니 피곤해서 성모님 석고상 옆 돌에 앉아서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깨서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이모네 집에 가면 해가 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 가자니 아버지가 무서웠다.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성모 석고상 앞에서 자꾸 왔다 갔다 하는데 아래위로 머리까지 새까맣게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물었다.

  “얘야, 너는 아침에도 본 것 같은데 지금 오후가 됐는데도 왜 집에 가지 않고 성모님 성전 옆에서 왔다 갔다 하니?”

대답하기 곤란해서 그냥 석고상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사람은 누구세요?”

  “여기는 성당이라는 교회고 이 분은 성모님이란다. 너 여기 처음 왔니? 집이 어디야? 부모님은 뭐 하시는 분들이지?”

수녀님은 나에 대해 꼼꼼히 물어보셨고 나는 있는 그대로 다 말을 했다.

  “너 배고프겠다. 우리 집에 가자. 밥 해줄게.”

수녀님은 내 말을 잘 들어주시고 성당 안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하얀 쌀밥을 주셨다. 쌀밥을 먹어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쌀밥이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수녀님은 나더러 이모님 댁은 다음에 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집에 가면 우리 아버지한테 혼날 텐데요.”

  “아니야. 오늘 집에 가면 절대로 안 혼날 거야.”

수녀님이 이렇게 말씀하셔서 나는 집으로 가기로 했다. 수녀님은 성당에 나오려면 몇 시에 나오라고 하며 미사 시간표를 주셨다. 


  시간표를 받고 집에 가면서 꼭 다시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여태 부모님 사랑도 못 받고 살았는데 잠깐 본 수녀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는 걸 보니 아무리 멀어도 성당에 다녀야겠다.’

집에 와보니 아버지는 아침에 나를 혼내고 나가서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하루 종일 어디를 쏘다니냐면서 혼냈다. 혼내거나 말거나 이불 덮어쓰고 잤다.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새벽 네 시쯤 되었고 밖은 아직도 캄캄했다. 시간표에 아침 여섯 시 미사가 있었는데 성당이 멀어서 적어도 네 시에는 집을 나서야 아침 미사를 볼 수 있었다. 부지런히 걸어 성당에 갔더니 수녀님은 내 손을 잡고 정말로 반가워하셨다. 미사가 끝나고 수녀님이 나를 불렀다.

  “집까지 가려면 배고플 텐데 밥 먹고 가거라.”

수녀님이 주신 하얀 쌀밥을 잘 먹고 집에 가려하니 수녀님은 문답 책이라고 하면서 조그만 책 한 권을 주셨다.

  “수녀님, 저는 글을 몰라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너, 학교에 안 다니니?”

  “네....”

  “그럼 내가 글을 가르쳐 줄게.”

수녀님은 나에게 기역, 니은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 수녀님 이름은 클라라였다. 


  그 후 하루에 한 번씩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침 여섯 시 미사를 보고 수녀님과 공부를 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오면 아침 열 시쯤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집에 너무 늦게 온다면서 성당을 못 가게 막았다. 하는 수 없이 수녀님한테 가서 아버지가 성당에 못 가게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수녀님이 우리 집까지 찾아와 아버지, 어머니께 잘 말해서 성당을 다닐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 당시는 성당에서 밀가루와 우유를 배급해주기 때문에 그걸 타오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허락해주신 것이다. 성당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고 친구도 생기고 조금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열두 살 이른 봄부터 성당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 8월 15일에 영세를 받았다.    

영세 기념(12살)


전도하기     


  하루는 클라라 수녀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내 성당 본명은 카타리나다. 

  “카타리나야, 친구가 많이 있으면 좋겠지? 너한테 친구들 많이 만들어 줄게. 내말을 잘 들어봐. 밀가루를 줄 테니 갖고 갈 수 있겠니?”

  “주기만 하면 갖고 갈 수 있어요.”

자신 있게 대답했지만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밀가루를 어떻게 갖고 올지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리어카를 갖고 가서 싣고 오라고 했다. 리어카를 갖고 성당에 가서 수녀님께 밀가루를 실어 달라고 했다. 

  “네가 이걸 끌고 갈 수 있겠니?”

수녀님은 어린 내가 무거운 것을 끌고 먼 길을 갈 게 걱정스러우신 것 같았다. 옛날에는 밀가루 한포대가 한 40kg 쯤 되었다. 밀가루 포대가 무거워 들 수는 없어도 리어카에 실어주면 끌고 갈 수는 있었다. 수녀님은 사람을 시켜 밀가루 두 포대와 깡통 우유 두 개를 실어주면서 밀가루 한 포대와 우유 한 캔은 너희가 먹고 남은 것은 빵을 쪄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친구들을 성당에 초대할 욕심에 열심히 리어카를 끌고 집에 갔다. 


  어머니한테 수녀님이 시키신 대로 말하고 빵을 쪄달라고 했다. 어머니가 사카린이랑 술을 사오라고 해서 사다 드렸더니 밀가루, 우유, 사카린, 술, 소금을 넣고 반죽해서 빵을 쪘다. 빵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해도 낮에는 친구들이 학교에 가고 없었다. 

  ‘아! 친구들이 학교 갔다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한 덩이씩 주면 되겠다.’

그 당시는 먹을 게 별로 없던 배고픈 시절이라 빵 한 덩이씩 받은 친구들은 빵이 어디서 났냐면서 알려달라고 했다. 

  “성당에 가면 밀가루를 주는 데 그걸로 빵을 쪘어.” 

그 뒤로 아닌 게 아니라 친구들이 성당을 다니기 시작해서 성당 다니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성당 덕에 살 것 같아     


  며칠 뒤 또 수녀님은 옷을 줄 테니 리어카를 가져 오라고 하셨다. 리어카를 끌고 성당에 가니 창고 앞으로 데리고 가 옷이 잔득 담긴 커다란 고추 포대를 실어 주셨다.

  “이거 너무 무거운데 끌고 갈 수 있겠니?”

내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수녀님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셨다. 

  “이 포대 갖고 가서 너희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옷을 다 쏟아놓아라. 그중에서 너랑 네 식구들은 좋은 옷, 네 마음에 드는 옷 네 벌만 골라놓고 나머지는 동네 사람들한테 한 사람당 두벌씩 골라 가지라고 해라.”


수녀님이 시킨 대로 동네 집집마다 다니면서 알려주었다. 

“우리 집에 오시면 좋은 옷이 있으니 오셔서 구경도 하시고 옷도 두 벌씩 가져가세요.”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다. 그 때는 양장 옷들이 별로 없고 사람들이 대부분 한복을 입고 살 때였다. 사람들은 옷 구경을 하더니 ‘서양 옷이네...., 멋쟁이 옷이다.’ 라고 한마디씩 하면서 좋아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그 많던 옷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런데 동네 사람 중 한 명이 나를 붙잡고 말을 건넸다.

“얘야, 내가 젖이 안 나와 우리 아기가 못 먹어 저렇게 말랐어. 성당 가면 신부님, 수녀님께 말씀 잘 드려서 우유 좀 얻어다 줄 수 있겠니? 좀 부탁할게.”

이튿날 성당에 갔더니 수녀님은 나를 보고 말씀하셨다.

“카타리나야, 옷은 잘 나눠 드렸느냐?”

“예, 잘 나눠 줬어요. 그런데 우리 동네 사람들은 너무 못 살아 하루 한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해요. 그래서 애기 엄마들은 젖이 잘 나지 않아요. 어제 한 아주머니가 왔는데 애기가 울고 젖 달라고 보채서 불쌍했어요. 우유 좀 줬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동네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수녀님께 전했다. 

“카타리나야, 애기 엄마들한테 애기 데리고 성당에 오라고 해. 내가 우유도 주고 밀가루도 줄게.”

수녀님의 말씀을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더니 동네 사람들 모두가 성당으로 몰려가서 애기 줄 우유도 타고 밀가루도 탔다. 


  그 해 동네 사람들은 보릿고개도 잘 넘기고 성당도 많이 나갔다. 우리 마을에 한 50가구정도 사는데 절반 이상이 성당을 다니게 되었다. 성도가 많아지자 수녀님 두 분이 번갈아 가며 우리 집에 오셔서 교리를 가르쳐 주셨다. 그 때 마을 사람들과 나는 영세도 받고 성당을 열심히 다녔다. 우리 집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친구들이 많아졌다. 혼자 다닐 때는 성당이 정말 멀었는데 친구들하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성당에 가니까 성당에 금방 도착했다. 클라라 수녀님은 계속 공부를 가르쳐 주셨고 성당을 다니고부터 의붓아버지가 잔소리는 심하게 해도 매질은 하지 않았다. 매만 안 맞아도 살 것 같았다. 

마음의 피난처 성모고상 앞에서


이전 02화 47년생 엄마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