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지나고 열세 살 봄이 왔다. 하루는 어머니가 보리밭 매러 간다고 하시면서 나더러 밥을 해오라고 하셨다. 모두 열 명, 일할 사람을 사서 밭을 맨다고 했다. 내가 밥 안 한다고 하자니 아버지한테 혼날 것 같고 해 갖고 가자니 보리쌀을 씻어서 삶아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10인분 밥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 길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왔다. 기차를 타려고 무조건 기차역으로 갔다. 성당을 다니면서 글도 조금 알게 되고 내 시간도 있어서 살만 했는데 농사철이 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될 농사철을 생각하니 더 힘들 것 같았다. ‘어머니한테는 미안했지만 내 발길이 가는 대로 가야겠다’ 하면서 무조건 기차를 탔다. 강원도로 가는 기차였다.
기차를 타고 보니 옆자리에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는 어린애가 혼자 기차를 타는 게 이상한지 먼저 말을 건넸다.
“너 어디 가니?”
“무조건 가는 대로 가볼 합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니?”
아주머니는 자꾸 말을 걸었다. 할 수 없이 사실대로 집 나온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자. 너를 보니 우리 딸 생각이 나네.”
아주머니가 자꾸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우리 남편은 죽고 나는 새로 재가했어.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데 아들은 어려서 내가 데리고 있고 큰 딸은 너하고 동갑인데 대구 비단 공장에 다녀. 내가 너를 잘 돌봐 줄게. 너를 보니 우리 딸 생각이 나서 그래. ”
아주머니는 기차에서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해 주었다.
아주머니 집에 가서 보니 아주머니 남편이 이북 사람이었다. 6.25 전쟁 통에 혼자만 남한으로 피난 와 휴전선이 막히니 눌러살았다고 한다. 아저씨는 탄광에 다니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더러 집에 안 가려면 탄광에서 일을 하라고 했다. 나도 집을 나왔으니 돈이 필요해 아저씨를 따라 탄광에 갔다. 내가 거기서 해야 하는 일은 탄광에서 나온 돌중에 연탄 같이 까만 돌이 있는데 그런 돌을 골라내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주머니들도 많이 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것이 어찌 이런 일을 하려고 왔냐... 공부할 나인데....”
아주머니들은 하나같이 일하지 말고 집에 가라고 했지만 나는 집에 가지 않고 일 년을 거기서 일하며 돈을 벌었다.
집 나온 지 일 년이 지나고 하루는 아주머니가 대구 딸 네 집에 가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했다.
“대구 가면 내가 딸에게 잘 말해서 공장에 취직시켜 줄게.”
나는 공장에 취직할 생각에 따라나섰다. 아주머니는 기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대구 가기 전에 너희 집에 들렀다 가자.”
아주머니가 설득해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안동 어게골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너 집 나간 뒤로 잠 한 번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 이제 집 나가지 말고 나랑 같이 잘 살자.”
“싫어요. 나는 아주머니 따라 대구에 갈래요.”
아주머니도 어머니랑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아주머니를 따라 대구로 갔다.
식모살이
막상 대구에 도착해서 보니 당장 먹고 살 집이 없었다. 아주머니 딸은 친구와 함께 세를 주고 살고 있었는데 나까지 거기에 껴서 살 수가 없었다. 살 집이 있다고 해도 비단 공장에서는 일할 사람이 넘쳐나니 내 나이가 너무 어려 받아주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어머니 집에 가든지 식모살이를 하든지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집에 가서 아버지 눈치나 보면서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일을 하느니 차라리 식모살이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이가 어려 돈을 조금만 받고 식모살이를 갔다. 식모살 집에 가 보니 나 말고 다른 식모 아주머니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는 보조였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주인이 식모 아주머니를 내 보내버렸다. 식모 아주머니도 없이 내가 빨래, 밥하기, 설거지, 청소까지 다 해야 해서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식모 일이 너무 고돼서 어머니 집에 갈까, 계속 있어야 하나 여러 번 고민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돈을 주니까 일을 해야겠지? 일단 돈을 벌고 보자.’
아무리 힘들어도 다 참고 그 집에서 일 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어머니가 식모 사는 집으로 이종 언니를 보냈다.
“태복아, 이제 집에 들어가. 외할머니랑 친척들이 네가 집 나간 뒤로 네 어머니 외갓집에도 못 오게 하고 ‘딸 공부 못 가르칠 거면 집에라도 데리고 있지, 왜 남자아이도 아닌 여자아이를 밖으로 돌리냐’ 면서 나무라셔. 이번에 나랑 꼭 같이 가자.”
이종 언니의 간청에 못 이겨 식모살이 1년, 강원도에서 1년, 총 2년 세월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이 년간 번 돈을 드리면서 말했다.
“어머니, 이 돈으로 논을 사서 우리도 쌀밥 먹고살아요.”
하지만 그 돈으로는 아직 논을 사기에 부족했다.
쌀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돈을 더 벌기 위해 의붓아버지랑 집 식구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하천 부지에 개간을 많이 했다. 여름에는 개간한 땅에 농사를 지었고 겨울에는 부업으로 성냥통을 만들었다. 겨울에 동네 사람들이 성냥공장에 성냥 껍질을 가지러 가면 나도 따라가서 얻어 다 성냥 껍질을 붙였다. 나는 낮에 일이 있어 성냥 껍질 붙이기를 다 못 끝내면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일을 끝냈다.
아버지, 어머니는 별로 일을 거들어 주지도 않는데 내가 잠도 안 자면서 일을 하다 보니 일감이 딸렸다. 공장에서 일감을 얻으려고 해도 겨울이라 너도나도 성냥 껍질 붙이기를 해서 일감을 얻기 힘들었다. 일이 없어 내가 집에서 놀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성냥공장 사장네 집에 일감을 얻으러 갔다.
“성냥공장 사장 사모님이 나랑 아주 친한 친구야. 내가 너한테 일감을 많이 달라고 얘기해볼게.”
사장네 집에 가서 어머니는 나를 사모님에게 소개해주었다.
“얘가 내 딸인데 성냥 껍질을 붙이고 싶다고 하니 일감 좀 주겠니?”
“아이가 일할 나이도 아니고 공부할 나인데 왜 애한테 자꾸 일을 시키려고 하니? 모처럼 왔으니 점심이나 먹고 가.”
사모님은 나 공부 안 시킨다고 어머니를 엄청 혼내고 일감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 때문에 친구한테 창피만 당했다고 속상해했다.
그 뒤 어머니 도움 안 받고 옆집 사람 따라다니면서 일감을 가져와 성냥 껍질 붙이는 일을 계속했다. 식모살이를 하면서 일은 힘들었지만 먹는 것은 쌀밥에 좋은 반찬만 먹고살았는데 집에 오니 꽁 조밥, 호박죽 같은 것만 먹었다. 돈을 더 빨리 모아 논을 사서 쌀밥을 먹고 싶었다.
재건 중학교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열다섯이 되었다. 나는 공부를 안 해서 친구들이 보낸 편지를 읽어 볼 수가 없었다. 또 친구들이 학교 다니는 것을 보니 너무 부러웠다. 하루는 어머니한테 학교를 보내 달라고 졸랐더니 재건 중학교에 가라고 하락해주셨다. 재건 중학교는 목사가 학교 안 다니는 사람을 모아 놓고 저녁에 공부를 가르쳐 주는 야간 학교였다.
나는 낮에 부지런히 일을 하고 저녁에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온 학생들이고 나는 국민학교도 다니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간 것이라 선생님이 가르치는 공부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영어는 똑같이 처음 배우는 것이라 좀 알 만한데 국어, 수학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시험만 보면 무조건 빵점이었다. 낮에라도 공부를 하면 좋을 텐데 낮에는 일을 해야 하고 저녁에만 공부를 하니 공부가 뒤쳐져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학교가 너무 다니고 싶어 5개월쯤 더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수녀님한테 한글 기초를 조금 배우고 중학교도 5개월 동안 다녀서 더듬더듬 글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받침이 있는 글자는 쓸 수가 없었다.
재건 중학교 옆 건물에는 양장 만드는 학교가 있었다. 어느 날 그 학교에서 나오는 이종 동생을 만났다. 이종 동생의 엄마인 이모는 딸만 여덟을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아 모두 형제가 아홉이었다. 가끔 이모 집에 놀러 가면 이모부는 나를 보고 ‘하나가 모자라는데 네가 와서 아구를 채워 주니 정말 좋구나’ 하시면서 좋아하셨다. 그날 만난 동생은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나보다 어린애가 그런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동생은 국민학교를 마치고 양장 학교를 다니는 데 나는 국민학교를 나오지 않아 그런 학교에도 갈 수가 없었다. 양장 학교를 다니려면 옷 치수를 재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는데 나는 수학도 못하고 한글도 모르니 그런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농사일이나 식모살이뿐이었다.
천운
잊지 못할 친구 김영혜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우리 집 앞 낙동강을 건너가면 복숭아 과수원이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복숭아를 사 오라고 해서 낙동강을 건너려는데 그해 워낙 날이 가물어서 낙동강 물이 말라 바짓가랑이를 조금만 걷고도 그냥 건너갈 수 있었다. 친구 영혜하고 나, 둘이서 복숭아를 사러 가서 한 보따리 머리에 이고 다시 낙동강을 건넜다.
그런데 우리가 강을 막 건너는 순간 강 위에서 물이 멍석말이처럼 굴러 내리더니 말랐던 강에 물이 꽉 찼다. 그때 나는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경북 안동에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는데도 강원도에 갑자기 소낙비가 와서 그 비에 물이 불어 낙동강에 물이 넘쳤다는 것이다. 돼지도 물에 떠내려 오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내려갔다. 거기다 사람도 살려달라며 소리치며 막 떠내려갔다. 우리가 조금만 늦게 강물을 건넜어도 그 물에 휩쓸려 갔을 것이다. 이틀 뒤에 낙동강 물이 어느 정도 빠지자 한 사내아이가 구조되었다고 했다. 급류에 떠내려가다 다행히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가 물이 빠지자 극적으로 구조된 것이다. 나도 낙동강에서 조금만 늦게 나왔어도 큰일 날 뻔했다.
쌀밥을 먹게 되다
우리 집은 정구지 농사를 많이 지었다. 정구지는 베어내고 나면 또 베고 또 베고 해서 일 년이면 여덟 번을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야채 장사 중에는 정구지가 가장 돈이 된다. 정구지를 베어 단으로 묶어 놓으면 아버지는 정구지를 리어카에 담아 읍내 상인들에게 넘기기도 하고 내가 장에서 가서 소매를 하기도 했다. 우리 정구지 단은 크고 다른 사람들보다 싸게 팔고 하니 장사꾼들이 밭이 어디냐고 물어서 직접 자전거 타고 와서 사가기도 했다. 이렇게 장사꾼들이 집까지 와서 사주면 내 입장에서는 한 짐 덜어낸 셈이다. 나는 밥하고 집안일하고 시간 나면 성냥 껍질도 붙여 한시도 쉬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이사이 짬이 나면 성당에 갔다. 시간이 나도 아버지가 친구들하고 노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친구들하고 놀 지는 못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내 나이 열일곱 살 겨울에 드디어 우리도 논을 한 기 샀다. 그래서 이듬해부터 쌀밥을 먹긴 했는데 완전히 쌀밥을 먹은 것은 아니고 보리쌀이나 조를 섞어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