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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Sep 25. 2021

47년생 엄마 #5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4장 속은 결혼(19~24세)     


결혼 1  

   

  쌀밥을 먹은 것도 잠시 잠깐이고, 내 나이 열아홉 살에 어머니가 나더러 시집을 가라고 하셨다. 중신한 사람은 언니 시댁 친척이었다. 언니가 시집가서 시부모님도 잘 모시고 살림도 야무지게 하고 사니까 그 친척이 언니가 마음에 든다며 언니 동생인 나를 동생 댁으로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신랑은 청송에서 고무신 상점을 한다고 했다. 어머니가 청송에 가서 신랑 될 사람이 고무신 장사하는 것을 직접 보고 왔다.

  “너 청송에서 고무신 장사하는 곳에 시집가면 아버지 눈치 안 봐서 좋고, 아버지 잔소리 안 들어서 좋고, 또 농사일 안 해도 되니까 좋잖냐. 시집갈래?”

어머니가 이렇게 결혼하라고 꼬시는데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는 잔소리가 너무 심하긴 했다. 그걸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참고 살자니 내 목구멍에 생피가 다 올라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너를 자꾸 볶아대니 나도 그 꼴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다 너 편하게 살라고 권하는 거야.”

어머니는 자꾸 시집보내려고 꼬시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고 수녀가 되고 싶었다. 엄마 등살에 집을 나와 나도 수녀가 될 수 있는지 수녀님께 여쭤보고 싶어서 성당으로 갔다. 그런데 문득 나는 수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당에 도착했는데도 수녀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되돌아왔다. 


  고민 끝에 선을 보기로 했다. 선을 봤지만 신랑 될 사람은 키가 작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꾸 만나보라고 해서 한 세 번 정도 만났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세 번째 만났을 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시집 안 갈 것이니 더 이상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선 본 사람을 피해 외갓집에 갔다. 


  외갓집에 갔다가 친아버지도 좀 보고 오려고 했다. 그런데 외갓집에서 하룻밤 자고 그다음 날, 선 본 사람이 외갓집까지 찾아와서 청송 구경시켜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했다. 꾐에 넘어가 그 사람을 따라나섰다. 선 본 남자는 청송 달기약수터랑 청송 시내 여기저기를 구경시켜주고 외갓집에 데려다주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내일 어머니 집에 데려다줄 테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친아버지네 갈까? 어머니한테 갈까? 내가 친아버지네 집에 가봐야 아버지는 둘째 작은 아버지네 집에서 겨우 나무나 해 다 주고 밥이나 얻어먹고 있을 텐데....’

청송달기 약수탕기념(1965년)

나는 망설이다가 선 본 사람이 안동 집으로 가자고 졸라서 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사람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 나 정말 그 사람하고 결혼하기 싫어요.”

  “너희 아버지 성격이 별나고 너도 고집이 세서 너랑 네 아버지 사이에서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 더 이상 그 꼴을 볼 수 없으니 네가 시집을 가야 해. 남자가 청송에서 고무신 상점을 하고 있는데 너 하나 밥 굶기겠냐?”

어머니는 하소연하면서 자꾸 결혼하라고 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나 보다 하고 성당 수녀님을 찾아갔다.

  “수녀님 저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수녀님은 깜짝 놀라면서 물으셨다.

  “어떤 사람과 결혼할 건데?”

  “천주교 신자도 아닌 사람과 결혼해야 할 것 같아요.”

  “네 어머니 성당에 좀 오시라고 해라.”

수녀님의 단단한 표정을 보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결혼 2    

 

  “어머니, 오늘 성당 가서 수녀님께 결혼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가 성당 오시면 꼭 수녀님 만나고 가시래요.”

어머니가 수녀님을 만나러 가는데 나도 따라갔다. 수녀님은 어머니 손을 붙잡고 간곡히 말씀하셨다.

  “카타리나는 성당에서 봉사도 많이 하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아인데 어떻게 상의 한마디 없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나요? 성당 규칙이 외인(교인이 아닌 사람)하고는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총각 사는 주소를 알려주면 제가 소상히 알아볼게요.”


  어머니는 중신 한 사람에게 총각 주소를 물어서 수녀님께 갖다 주었다. 그 주소를 갖고 수녀님은 신부님한테 가서 상의를 하셨다.

  “카타리나가 외인하고 결혼을 한다 하니 어쩌면 좋아요.”

  “총각 사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잘 알아보는 게 좋겠소.”

총각의 고향은 의성 옥산이라는 곳인데 깊은 산골짜기 동네였다. 신부님은 거기에 사람을 보내 총각이 어떻게 자랐는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자세히 알아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불러서 성당 규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나를 그 총각 하고는 결혼시킬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 총각은 통일교에 아주 열심인 신자입니다. 카타리나를 그런 사람하고 절대로 결혼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우리 신부님은 한국 사람이 아닌 프랑스 신부였다. 이름은 여동창 아오시팅 이다. 그 신부님은 성격이 아주 칼 같아서 절대로 이 결혼을 허락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어쩔 수없이 총각을 불러놓고 사정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신부님이 외인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시니 이 결혼은 없었던 것으로 해야겠네.”

  “그럼 제가 성당에 찾아가 신부님을 만나 허락을 받아오면 결혼할 수 있습니까?”

  “본인이 가서 허락을 받아 온다면야 허락을 해 주겠네.”

총각은 어머니와 이야기를 끝내고 성당에 가서 신부님을 설득했다.

  “결혼만 허락해 주시면 각시를 성당에도 잘 보내고 저도 각시랑 성당에 잘 다니겠습니다.”

  “그럼 자네가 말한 것을 각서로 쓰게.”

총각은 성당에 잘 다니겠노라고 각서를 쓰고 결혼 허락을 받아왔다. 


  이 소식을 듣고 불안하여 성당에 갔더니 수녀님께서 위로해 주셨다.

  “카타리나 야,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도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늘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래, 이것도 내 운명이겠지.’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속은 결혼    

결혼식(1965년)

  결혼 날짜를 받아 성당에서 혼배식을 올리기로 했다. 결혼 날짜는 동짓날 25일 아주 추울 때였다.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청송으로 갈 줄 알았는데 시댁에 가서 적어도 한 달 시집살이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뭔가 속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성당에서 혼배식을 끝내고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그 이튿날 시댁으로 갔더니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모두들 새색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다들 새색시가 ‘무엇을 많이 해 왔나’ 하면서 함을 열어 봤다. 가기도 싫은 시집을 가니 어머니한테 아무것도 해 달라 하지 않았는데 그래도 어머니는 기본은 해서 시집을 보내야지 진짜로 가방 하나 사지 않고 조그만 상자에 내 내복, 갈아입을 옷 두 벌, 신랑네 집에서 보낸 내 옷 네 벌을 싸서 보내셨다. 이불도 신랑네 집에서 보낸 오강목 한통과 강목 두통 보낸 것으로 만들어 보냈고 시아버지 두루마기도 하지 않고 겨우 시누, 동서 버선 한 켤레씩만 접어 넣어 두셨다.  시어머니는 돌아가셔서 방에 번수가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아무것도 해 주시지 않았다. 동서가 이걸 알아차리고 자기 몫의 버선을 얼른 시어머니 번수에 갖다 올려놓았다. 그걸 보고 동서를 존경하게 되었다. 


  시댁은 기울어져가는 집으로 방도 조그만했다. 그중 큰방은 금방 아기를 낳을 것 같은 배불뚝이 동서랑 신랑의 큰 형, 조카 두 명해서 모두 네 명이 썼고 나는 시어머니 번수가 있는 방을 썼다. 이 방은 원래 시아버지 방인데 내가 와서 시아버지는 동네로 나가서 자고 들어오신다고 하셨다. 그곳에서 오래 살래도 방이 없어서 오래 살 수도 없었다.

  “신혼에 살 방도 없이 이게 뭐예요. 왜 청송에서 산다고 하더니 이런 산골짝에 있어야 해요? 빨리 청송에 나가서 살아요. 고무신 상점도 동생한테만 맡겨놓지 말고 청소라도 하러 가요.”

나는 신랑에게 자꾸 청송으로 가자고 졸랐다. 


  그제야 신랑은 고무신 상점이 자기 것이 아니고 동생 것인데 내가 착각한 거라고 했다. 신랑 동생이 안동 고무신 상점 점원으로 있었는데 주인이 빚이 많아서 동생 보고 그 가게를 인수하라고 했다고 한다. 동생 혼자서는 운영을 못하니 형하고 같이 하라고 하면서 시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소 한 마리를 팔아 밑천을 대 주셨는데 동생이 형보다 먼저 애인이 생겨 결혼하니 형이 가게 일을 봐줄 필요가 없어져 그 가게는 아예 동생 것이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청송 가서 신랑이 누구인지 알아볼 때 두 형제가 고무신 장사를 하니 당연히 그 가게가 형 것인 줄 알고 딸을 시집보냈는데 이제와 알고 보니 신랑은 동생에게 밀려난 백수 처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나는 화가 나서 중신한 큰 시누에게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가 있냐고 따졌다.

  “둘째 동생이 군대 가면 삼 년 동안 큰 동생이 고무신 장사를 해서 기반을 잡고 따로 고무신 가게를 차려 나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계획이 틀어졌어. 둘째 동생이 군대 안 가려고 아들 없는 집에 양자를 간 거야.”

그 당시 외동아들은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친척집에 양자를 가서 고무신 가게도 혼자서 다 차지한 것이다. 신랑은 다른 것을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타일렀다. 


  나는 그 쓰러져가는 집에서 내방 하나도 없이 잠만 자고 나면 방에서 나와야 했다. 새댁 며느리 방이 시아버지 방이니 아침에 들어오신 시아버지는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우리 어머니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집에 나를 시집보내 방도 없이 동서 밑에서 살림을 하게 됐으니 정말 기가 막혔다. 


  시집을 가서도 나는 쉴 틈이 없었다. 낮에는 삼시 세끼 밥 해 먹고, 시아버지 한복 빨래에 다른 식구들 빨래를 해야 했다. 또 밤에는 식구들이 담배 조리를 하는데 나만 잘 수 없어서 밤새도록 함께 담배 조리를 했다. 시숙은 나더러 일 년 더 농사를 지어 집하나 마련해 줄 테니 그때 분가하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주무실 방도 없이 동네 이 집 저 집 떠돌이로 잠을 주무시는데 일 년을 더 살라고 하니 정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언니와 친아버지 댁 방문     


그러던 중 언니가 나 시집올 때도 못 왔는데 친정에 온다고 해서 언니 보러 친정에 갔다. 언니는 내가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 친아버지한테나 다녀오자고 했다. 나, 신랑, 언니, 조카 이렇게 넷이서 친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고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친아버지는 우리들을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나라를 잘못 만나 이렇게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라지 못했다. 큰아버지는 일본 사람들만 우리나라에서 정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는 그 당시에 영어, 일본어, 중국말도 잘하는 유능한 인재였는데 일본 사람들한테 잡혀 고추 고문, 전기 고문 같은 온갖 나쁜 고문을 당해서 정신이상이 되었어.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하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는 사람도 잘 알아보지 못했지.”

큰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셔서 아버지께 좋다는 약은 다 해줘서 정신은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겨우 형네 집에서 나무나 해오고 밥이나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또, 그런 병든 아버지를 둔 우리 두 자매도 불쌍했다. 언니는 부모 사랑도 못 받고 외갓집에서 외숙모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자랐고 나 역시 의붓아버지 밑에서 매 맞고 온갖 궂은일을 해가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거기다 정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편케 살려고 시집간 곳에 내가 잘 방 조차 없었다. 친아버지에게도 언니에게도 내 사정이 이렇다는 말도 못 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언니는 언니 시댁으로, 나는 우리 시댁으로 각자의 길로 갔다. 


  버스를 타고 시댁으로 가려는데 시댁에 조카들도 있는데 친정 갔다가 빈손으로 가기는 너무한 것 같았다. 버스 정류소 길가에는 엿장수들이 많았다.

  “저 엿 한 덩어리 사 가지고 가요.”

신랑을 졸라 엿 중에 최고 큰 것을 들고 나서며 이걸로 사가자고 했다. 신랑은 할 수 없이 엿을 사주었다. 시댁에 도착해서 엿을 동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형님, 조카들 주려고 엿 사 왔어요. 조카들 주세요.”

  “자네 첫 친정 다녀왔는데 이 엿이 친정에서 보낸 음식이니 모두 나눠 먹어야지.”

동서는 이렇게 말하며 조그만 접시에 엿 두 동가리 씩 담아서 동네 집집마다 다 돌렸다. 양이 적어 조카들 줄 엿도 없이 돌렸다. 그런 동서를 보니 내가 너무나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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