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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아주 Sep 25. 2021

47년생 엄마 #6

딸이 써주는 자서전

제4장 속은 결혼(19~24세)


이사 1

   

  시집을 와서 좋은 것은 첫째, 의붓아버지 잔소리를 안 듣는 것이고, 둘째는 형님이 나한테 잘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식모 출신이라, 일 시키기 전에 척척 알아서 일을 하니 형님은 나랑 같이 살고 싶은 눈치였다. 그래도 나는 그곳에서 하루도 살고 싶지 않았다. 우선 시아버지 방을 차지하고 있는 자체가 미안했고 또 하나는 호랑이 울음소리가 무서웠다. 해만 지고 나면 그 소리가 너무 무서워 문도 꼭 잠그고 바깥에 나오지도 못했다. 당시는 전기도 없고 집집마다 호롱불을 켜 놓고 살 던 시절이라 해만 지면 보이는 것이라곤 이리 쳐다보아도 산, 저리 쳐다보아도 산이었다. 그런 산골짝에서 형님이랑 시숙은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는데 내가 처음 시집올 때 청송 고무신 상점 하나 보고 시집왔지 이런 산골짝에서 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을 잡고 그냥 살려고 해도 속이 상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랑한테 언제 청송 가서 살 거냐고 자꾸 졸랐다. 그랬더니 신랑은 전자제품 파는 가게를 인수받았다고 하면서 청송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다. 계산해보면 시댁에서 한 달 정도 산 것 같다.

 

  청송에 와서 좋은 것도 잠깐이고 이사하고 보니 부엌도 없어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었다. 가게는 좁고 위치도 외져서 장사도 아주 안 되는 가게였다. 다리미 같은 전자 제품을 팔았는데 가게와 집까지 월세를 내야 해서 한 달에 월세만 해도 돈이 솔찬히 나갔다. 밥은 할 수 없이 고무신 장사하는 시동생네에서 함께 해 먹기로 하고 몇 달을 지냈는데 결국 월세도 못 내고 빚만 졌다.

 

  나는 아기 가진 줄도 모르고 시댁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자연 유산이 됐다. 청송에서는 시동생 눈치도 보이고 신랑이 하는 장사도 안 되니 친정이 있는 안동 가서 노가다 일이라도 하자고 했다. 우리는 청송에서 두세 달 정도 살고 안동으로 이사 갔다.      


이사 2     


  나 중신해준 큰 시누에게 부탁해서 안동에 방 좀 하나 얻어 달라고 했더니 한 달에 천 원짜리 월세 방을 얻어주었다. 막상 이사를 와서 보니 신랑이 취직할 데가 없었다. 아직 추운데 집에 연탄도 없고, 쌀도 떨어져 먹고살 길이 막막했다. 그런데도 신랑은 장사할 줄도 모르고 이른 봄이라 노가다 일도 없어 집에서 놀기만 했다. 돈 빌리러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날이면 날마다 빌리러 다닐 수는 없었다. 어디 돈 빌리러 가는 것도 내가 굶으면 굶었지 가기 싫었다. 시집오기 전에 의붓아버지한테 잔소리는 심하게 들었지만 양식 걱정은 없이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고살았는데 시집을 오니 먹을 것도 해결 못해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큰 시누를 찾아갔다.

  “언니 어디 일할 데 없을까요?”

  “동사무소에 가서 일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요새 동사무소에서 주는 일을 하면 밀가루를 준대.”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 때였는데 동사무소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거리도 주고 외국에서 원조를 받은 밀가루도 나눠 주었다.

 

  그 길로 동사무소에 가서 일거리 좀 달라고 직원에게 졸랐다.

  “이 일은 젊은 사람은 안 되고 나이 든 사람만 해당됩니다.”

  “나는 글도 모르고 어디 취직할 데도 없어요. 당장 사 먹을 돈도 없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제발 일거리 좀 주세요.”

직원은 하도 떼를 쓰니 일하는 표를 주었다.

 

  일하러 가야하는 곳을 물으니 내가 시집가기 전에 늘 일하던 낙동강 하천 부지 친정 밭이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그 밭을 쳐 올리면 된다고 했다. 새마을 하천 정비 사업으로 강둑 옆에 밭이 있으면 물이 잘 흘러가지 않으니 밭을 없애는 것이다. 어찌 이런 일이 다 있는지 기가 막혔다. 밭에 가 봤더니 어머니가 밭둑에 나와 대성통곡을 하고 계셨다. 내가 시집가고 1년 만에 어머니는 그 밭을 다 떼여 농사를 지어먹고살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나를 보고는 창피하다며 거기서 일을 못하게 했다. 내가 여기서 일하면 동네 사람들이 내가 시집 잘 간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을 한다며 흉본다고 했다.

 

  엄마가 뭐라든 당장 먹을 것이 없으니 마음은 아프지만 밭을 쳐 올렸다. 그러고는 밀가루 배급을 타다가 삼시세끼 수제비를 해 먹었다. 그런데 수제비를 먹은 남편은 설사를 잘잘했다.

  “나는 이제 밀가루 수제비는 못 먹겠어.”

  “그럼 양식을 사게 돈을 벌어오세요.”

친정 밭을 쳐 올려가며 밀가루를 얻어 왔는데 돈도 벌어오지도 않고 수제비는 먹을 수 없다고 하는 남편 때문에 정말 기가 막혔다.   

   

시어머니 탈상   

  

  내가 결혼했을 때 신혼 방에 어머니 번수가 있었던 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시어머니 탈상 때가 되었다. 결혼한 뒤로 시어머니 첫제사고 탈상인데 안 갈 수가 없었다. 차비가 없어 시댁에서 해 준 결혼반지 한 돈 반짜리를 하는 수없이 팔았다. 그 반지는 결혼할 때 오래오래 죽을 때까지 잘 살라고 신부님이 축복해준 반지였다.

 

  시댁에 도착해서 제사를 지내는데 동네 사람들은 며느리가 시어머니 본 적도 없는데 번수 앞에서 저렇게 서럽게 우느냐면서 나를 기특해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살아갈 길이 캄캄하고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대성통곡하면서 실컷 울었다. 이렇게 하면 속이라도 풀릴까 하면서 울었는데 아무리 울어도 내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하도 답답해 돌아가신 시어머니께 속으로 애원했다.

‘어머님, 저는 부모 복이 없네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안 계신 사이에 시집을 왔으니까요. 어머님 영혼이 여기 있다면 제 마음 좀 헤아려 주세요.’

시어머니 첫제사를 무사히 마치고 안동 집으로 남편과 함께 돌아왔다.

    

고추장사  

   

  집에 와도 먹고 살길은 막막했다. 그러던 차에 작은 시누가 우리 사는 게 걱정돼서 찾아왔다. 시누네 집주인 할머니가 장사를 하는데 서울 청량리로 다니면서 말린 고추, 참깨 같은 것을 많이 사다 판다고 했다. 안동에서 청량리까지 직통 기차가 있어 사람들이 그 기차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물건도 많이 싣고 다녔다. 주인 할머니는 기차 의자 밑에 40kg씩 담은 말린 고추와 참깨 포대를 승무원 몰래 실어다 팔았다. 그렇게 하면 사람 타는 운임만 내니 돈이 조금씩 남았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그 할머니와 함께 청량리로 장사를 하러 갔다. 내가 할 일은 포대를 머리에 이어다가 의자 밑에 싣는 것이다. 한번 가면 의자 밑에 할머니 것 열 포대, 내 것 다섯 포대 넣고 할머니와 나는 사람 차비만 내고 청량리까지 갔다. 그걸 청량리에서 중간 상인에게 넘겼다. 할머니는 나이가 많아 임질을 할 수 없고 내가 할머니 것까지 다 이어다 기차에 실어야 했다. 이렇게 해야 겨우 밥을 먹고살 수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조금씩 장사에 눈을 떴다.  

    

닭장사     


  청송에는 유명한 달기 약수탕이 있다. 물을 마시면 톡 쏘는 맛이 꼭 사이다 같다. 그 물에는 칼슘이 많이 들어 있어 사람 몸에도 좋다고 한다. 소문에는 미국에서 온 아픈 사람이 여기 와서 물 마시고 나았다고 했다. 청송은 약수 물 먹으러 여행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약수 물에 닭을 삶아 먹는 달기 약숙이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청송에서 살았기 때문에 달기 약숙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니 청송은 안동보다 닭 값이 비쌌다.

 

  할머니와 청량리를 가지 않는 날에는 안동 장날에 닭을 많이 사서 청송 장날 닭을 팔러 갔다. 그렇게 몇 번 가서 닭을 팔았는데 할머니랑 기차 타고 장사 다니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다. 닭을 사면 중간 상인이 닭을 시장까지 차로 실어다 기 때문에 나는 시장에서 팔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닭을 팔러 갔는데 해가 다 질 때까지 한 마리도 팔지 못했다. 해가 너울너울 넘어가니 걱정이 되었다. 장이 파할 때가 되어 물건 사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남아있는 닭을 집까지 운반해 줄 차도 없으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까 어떤 신사 양반이 다가오더니 물었다.

“그 닭 한 마리 얼마요?”

“닭 사실래요? 제가 싸게 드릴 테니 다 사가세요.”

“내가 오늘 돈을 안 가져왔으니 외상으로 주고, 다음 장날 와서 돈 받아 가시려면 닭을 파시오.”

닭을 안 팔자니 갖고 갈 수도 없고 외상으로 주자니 돈을 못 받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자기 집 주소를 적어서 내게 주었다.

“걱정 말고 다음 장날 이리로 찾아오시오.”

할 수 없이 그날은 닭을 외상으로 주고 집에 왔다. 


  다음 장날 또 닭을 사서 청송 장날에 팔러 갔다. 이번에는 닭이 금방 팔려서 지난주 외상 한 아저씨 주소를 들고 닭 값을 받으러 갔다. 그곳은 달기 약수탕 옆 큰 여관이었다. 여관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청소하고 있는 아주머니에게 아저씨가 적어준 주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지난주에 판 닭 값 받으러 왔어요.”

“주인아저씨는 지금 외출했으니 기다렸다 받아 가세요.”

여관에서 아저씨를 한참 동안 기다렸다. 아저씨는 해가 빠지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오늘 내가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닭 값 여기 있다. 오늘은 너무 늦어서 집에 못 갈 테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거라. 우리 집은 여관이라 방이 많다.”

어차피 버스도 끊겨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여관방 하나를 열어주었다. 


  피곤해서 여관방에 누워있는데 가만히 들으니까 바깥에서는 연탄이 없어 방에 연탄을 못 넣는다고 했다.

‘아, 이곳 사람들은 연탄이 없어서 난리구나. 여기서 연탄 장사를 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겠는걸.’

그 이튿날, 날이 새자마자 버스를 타고 큰 시누네 집에 갔다.  

        

달기 약수터 옆 청송 여관(2017)


연탄 장사     


“형님, 청송에서 연탄 장사를 하면 돈을 벌 것 같아요. 저도 연탄 장사 좀 하게 해 주세요.”

큰 시누 남편은 연탄 공장에서 연탄 실어 나르는 일을 하고 계셨다.

“그래, 남편한테 말해서 당장 한 차 줄 테니 연탄은 걱정은 하지 말고 가서 팔아봐.”

트럭에는 두 사람밖에 탈 수 없어서 남편이 시누 남편과 함께 청송에 연탄을 팔러 갔는데 한 차를 눈 깜짝할 사이에 다 팔고 왔다. 그때 연탄값 본전의 배를 받고 팔아왔다. 시누 남편이랑 우리 신랑은 너무 좋아하며 내일 또 한 차 싣고 가서 팔자고 했다.

‘나도 이제 제대로 장사 줄을 잡아 밥은 먹고살겠구나.’

그날 시집와서 처음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좋은 것은 잠깐이고 다음날 연탄을 실으러 가니 우리 신랑한테는 연탄을 안 판다고 했다. 우리는 영문도 알지 못한 채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연탄 공장에서 연탄을 안 주니 연탄 장사는 더 할 수가 없고 나는 계속 작은 시누네 주인 할머니랑 힘든 장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시누네 집에 갔다가 가만히 들으니까 청송 고무신 장사하는 시동생이 연탄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시동생은 청송 고무신 가게를 하면서 안동 고무신 상점에서 물건을 떼어다 파는데 그 고무신 상점 주인하고 연탄 공장 사장하고 한 형제지간이었다. 시동생이 자기가 연탄 장사를 하려고 고무신 상점 사장에게 말해서 형에게 연탄을 주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너무 기가 막혀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신랑은 고무신 상점에서도 물러나 시동생에게 고무신 상점을 혼자 차지하게 해 주었는데 시동생은 사람이 양심이라는 것이 있어야지, 양심도 없이 형이 연탄 장사를 해 보겠다는데 그것까지 다 빼앗아 독차지한 것이다. 


  너무나 속이 상했다. 동생이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형을 나 몰라라 하는데 형은 동생에게 다 양보하고 물러나니 정말 한심했다. 신랑은 손에다 뭘 쥐어줘도 다 뺏기고 오는 사람이니 더 이상 그런 사람하고 살 수가 없었다. 죽어야겠다! 하고 마음먹고 죽기 전에 어머니나 한 번 더 보려고 친정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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